1988년 / 김만호 사과나무는 아주 작은 열매를 맺다가 갑자기 시들어 갔다 그해의 의림지에는 어느 처녀도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다 애써 여름 내내 잡아놓은 잠자리는 방안에서 날아 오르지 않았고 잠 깊이 든 날개는 건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기력한 어둠이 무섭게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벽지에는 알 수 없는 이름의 네가 웃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나날이 늙어 가고 있었고 말문 없는 누이의 허리는 더욱 가늘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느리게 울음을 게워 내고 있었다 표정 없이 발 아래서 나를 쳐다보던 꽃뱀처럼 그해의 겨울이 지나갔다 의림지에도 귀찮은 듯이 봄이 왔다 아직도 의림지에는 빠져 죽은 처녀가 없었다 칼은 날이 서 있었지만 칼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인기척은 없었지만 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고 나는 산에 올랐다 그해 내내 의림지에는 빠져 죽은 처녀가 없다고 했다 산은 높지 않았다 낮은 언덕을 오르는 처녀들은 말쑥한 얼굴로 쑥만 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