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부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 모두 역사에 관해서 “발전론적” 시각을 갖고 있진 않았습니다. 세상은 “진보한다”가 아니라, “종말한다”고 믿었던 것이죠.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다만 그들이 생각한 종말이 염세주의적이거나 절망적이거나 파멸적인 것인 것이 아니라, 참된 구원이자 희망이라고 보았고, 그러한 구원을 성취하거나(마르크스주의의 경우엔 해방의 성취라고 해야겠죠), 구원의 은총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본 점에선, (발전론은 아니지만) 낙관론적 역사관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구원론적(해방론적) 포지션은 지극히 중요한 지점이라 간과되어선 안 됩니다. 바로 그 포지션을 통해 기독교도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역사 전체로부터 벗어나 그것들을 상대화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 또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이후 신앙인으로서 그의 작품세계가 바뀝니다 성경이 어떤 한 인물에 의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듯 그의 작품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작품들 입니다 성경만 성령에 감동 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죠 마태복음을 마태가 썼듯 그의 작품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만약 폭풍의 언덕이 한국에서 나왔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이 있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게 히드클리프가 3년만에 부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과연 가능한 얘기일까? 피부색도 검고 집시라고 하던데.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으면서 이 작품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했다.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그렸으니까. 그리고 폭풍의 언덕은 내용이 거칠었다. 당시 사람들에게서 외면받은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리의 영역은 인식여부를 떠나 독립적인 가정된 영역이며, 합집합은 진리와 믿음이 일치된 인식된 진리로 입증된 영역이고 , 믿음의 영역은 진위가 판정되지 않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밝혀져야할 미지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진리의 확장을 위해 믿음의 영역으로 우리의 인식의 확장을 위해 노력이 요청되는 영역일 것이다. 그러나 선입견과 편견이라고 했을 때 아직도 관찰 실험을 통해 사실여부가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아님이 밝현진 인식이 아닌가요? 즉 선입견과 편견은 믿음의 영역인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이미 사싱이 아님이 밝혀졌기에 선입견과 편견이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 아닌가요?
안녕하십니까 공학을 전공한 20대 후반 사람입니다. 학창시절부터 정말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과학을 공부해오며, 과학은 의심에서 출발했고 계속 의심해야하는 학문이라고 느껴왔습니다. 지동설, 상대론, 양자역학 모두 기존의 믿음을 의심했기에 탄생했고 지금도 과학자들은 과학적 원리에 대해 언제든지 의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공부하기 전부터 믿음 자체가 상당히 비합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해왔고 증거 없이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을 보며 이해하기 어려워했습니다. 신에 대해서도 저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과학을 떠나 일상에서는 무언가를 판단하거나 선택할 때, 그 증거를 과학에서처럼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거나 혹은 증거가 있더라도 논리적으로 무결한 결론을 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저를 괴롭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우유부단한 태도로 흐르는대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태도라고 정당화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결국 불안함과 공허함을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태도가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합리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믿음을 선택함으로서 행복할 수 있다면 믿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던 찰나였는데 이러한 고민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듯한 철학자를 만난 기분입니다. 철학에 대해선 무지하지만 책을 빌려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문체와 대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의 작품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책을 구입하고 처음 몇년은 어려워서 몇번이고 읽기에 실패하다 궁리 끝에 한글판을 구해 읽어본후 수년간을 소로우와 법정스님을 따라 살아보려 했고 그후로 간결한 삶을 동경했던 나자신을 후회했으며 또 한동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사는게 뭔지 지난 1년은 월든호수 근처에서 살면서 단한번 직접 가보았습니다. 월든이라는 책과 월든 호수는 제가 살아온 인생의 의미이자 회한 입니다. 아무도 읽지 않을 벽에 낙서하는 심정으로 몇자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