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잘듣고 있습니다. 전 연대라는 단어를 매우 즐겨쓰는 편인데 선생님말씀듣고 좀 생각해 봅니다. 접속이라는 단어를 쓰라고 하셨는데요 현재의 sns 사회를 바탕으로 하면 접속이 정답이네요. 팔레스타인 핍박을 위해 캠 퍼스에서 연대하는 전 세계 젊은 학생들을 보면서 "연대"감이 참 좋았는데, 이때도 접속인가요?
제가 불평 댓글 잘 안다는 사람인데 소비자 정체성을 가지라고 해서 말씀드립니다 며칠 동안 듣고 있는데 귀가 좀 불편합니다 발성법을 좀 배우시면 좋겠어요 코맹맹이 소리 날 때도 있고 약간 성대가 긁히는 듯한 소리 날 때도 있고 어떤 단어는 너무 빨라서 잘못 알아듣겠고 발음도 안정확하실 때가 있고 속도가 일정하지 않고 암튼 그렇습니다 ㅠㅠ
저는 20살 때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임상심리사나 상담심리사 자격의 윤리 규정에는 내담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규정과 전도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죠. DSM에서 동성애자라는 항목은 사라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실제 성소수자가 상담사가 되려면, 수련 감독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대학교나 병원에서 종교색을 대놓고 드러내는 교수와 수련 감독관(슈퍼바이저)가 있습니다. 상담 연구소에 CCM을 틀고, 극단적인 종교색으로 내담자에게 되레 용서를 강요하거나, 설사 포비아임을 숨겼다고 해도 상담자-내담자 혹은 슈퍼바이저-견습생 사이에서 갈등이 안 생길 수 없습니다. 감독 과정에서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죠. 현 심리학회에서는 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이는 완벽한 기만입니다. 피해자로서 당한 수치심을 동기나 교수에게 털어놓으면 나오는 말은 '병원에 가라.'나 '치료가 필요하다.' 뿐이죠. 설령 동종 업계의 사람이 저런 말이 가해하려는 의도가 아니여도, 이 말이 가해자의 언어인 이유는 실제 정신과에 찾아가는 데에는 도덕의 선악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나쁜 짓을 저질렀으니 정신에 이상이 있으므로 정신과에 가야한다.'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처를 받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정신과에 가야한다.'라고 말해야하는 상황에서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과에 가야 한다는 말은 좋은 의도여도 2차 가해가 맞다고 할 수 있죠. 사실 저는 30살이 되어도 정착을 못 하고 있습니다. 전체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별 것 아닌 고통입니다. 하지만 전 가해자처럼 진로를 멀쩡하게 밟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비밀을 가해자가 오픈하였고, 더 이상 심리상담 계열에서 무사히 상담사로서의 과정을 밟을 수 없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일을 찾고 있습니다. 오전에는 쿠팡에서 일당으로 살아가며, 저녁에는 가끔 들어오는 프리랜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제가 너무 힘들어서 진보적인 교단의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제가 대학교와 교단에서 성소수자로서 받은 피해를 이야기할 수 있었고 용서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희진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정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피해자로서 누릴 수 있었던 '도덕적 우월감'을 다루는 부분이었어요. 제가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 가해자를 이해하려고 해봤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되려 그 사람들을 용서하려고 오만을 부렸던 그 시기가 저를 망가트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교수님처럼 신학을 전공하지 않아 잘 모르지만, 현재 공동체에서 ‘용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한 가지 배울 수 있었던 건, 피해자로서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제 자신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거와 그런 특정한 행위로서 가해자의 비대해진 자아는 결국 그 누구와도 소통을 할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추해진 채로 죽겠다는 점입니다. 정신 건강은 타인과의 별개가 문제가 아니므로 가해자들은 점점 축소지향적으로 변해가는 이 사회 속에서 옛날과 같은 방법으로 살아가다가 더욱 추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더 행복하게 되네요. 마지막으로 제가 성경을 제 마음대로 이해한 부분은 ‘용서’라는 말은 가해자에게 향한 분노를 하느님에게 봉헌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회복되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가해자가 떠오를 때마다 매번 주님에게 미움을 봉헌하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 회복은 ‘용서’라는 이름의 ‘침묵’과는 거리가 먼 것일 지도 몰라요. 제가 피해를 입고, 저를 위안시켜주는 것은 현재 공동체 사람들이 제 고통을 진심으로 경청한다는 것과 한 제국이 무너지듯 가해자의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제가 신앙인으로서 ‘용서’라는 구절을 실천에 옮긴다면 저는 반드시 저와 같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와주세요. 고맙습니다. 이 상황에 나를 맡깁니다.., 라고 조용한 밤 혼자 되뇌었을 선생님 생각을 하니 왜인지 겸허해지고 조금 울컥하기도 하네요.. 아침마다 일어나서 감사할 일을 몇 개씩 꼬박 찾아 말했다던 공지영 작가님의 이야기도 언뜻 스쳐가고요. 선생님이 이렇게 양지(?)로 나오셔서 소통해 주셔서 참 좋습니다. 초반에 진행하실 때 보다 목소리도 더 좋아지신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좋네요.. 정희진의 공부, 꼭 오래, 오래 해주세요..!🙏
선생님 말씀 재미있게 듣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상황에 대해 화가 나서 이야기 하시는 부분이 솔직하게 있는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신 것 같아서 불편함이 없고 오히려 공감이 더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때 "저 사람은 안정되고 행복하고 편안한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은 한명도 없다." 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잣대로 남들의 삶을 단정하시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누구를 위해서 안정되고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굳이 보일필요가 없이 안정되고 행복하고 편안히 사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것만도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셔서 좋은 강의 많이 해주세요.
자기 전에 하나씩 듣고 있는데요. 처음의 의도와 달리, 들을 때마다 생각이 많아져 잠을 설치게 되더라고요. 그게 너무 좋아요. 댓글을 다니 부끄럽네요. 저는 유튜브에서 공짜로 듣는 사람이고, 선생님 책도 거의 대출해서 읽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영상(?)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구독을 시작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