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가가 오늘날로 치면 국정원 CIA 같은 첩보원 정보부장 비슷한 역할로 세작 정보수집 등을 집중 담당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 주장도 있습니다.. 손책 암살 건부터 유표의 유비 미중용 건까지 너무 속속들이 정확히 알고 꿰차서요 ㄷㄷ.. 또 그런 역할 위치 특성상 겉으로는 군공이나 업적 기록 등이 잘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유비뒤를 이은 아들이 폐급 귀뚜라미사랑 + 우유부단 걍폐급 + 오나라는 땅에 대한욕심 트롤 형주를 전략적으로 사용하며 위를 공격할것도아니면서 괜히 땅욕심부리며 형주먹음 그덕분에 촉이 형주를 잃음으로써 촉은 위나라로가는 시간이 더늘어남 오나라가 형주 욕심버리고 계속 촉의땅이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 하지만 그당시 형주를 지키던 관우는 안하무인이었음 위땅을 먹는것은좋은데 형주를 지키던 병력을 관우 자신이있는곳으로 지원병력으로 빼버리는바람에 오나라의 전술에 쉽게 형주 함락당함
유비의 패전은 전략의 부재....전투는 자신이 있었더라고 전략 자체가 없이 들이 대서 개 박살이 난거죠... 서로 대치 한다고 700리 목책을 세우고 대치라니...그것도 산악지역에... 화공을 떠나서 공격 방어가 다 힘든데 대치 하는건 수비 하는 쪽에서 하는거지 공격측에서 저러고 시간을 때우고 있으면 죽으려고 환장한거죠.. 그러니 조비도 알고 있는거고.. 대치 상황을 벗어날 계책이 없으면 차라리 이릉 앞에다 성을 짓던가...고작 10만병력을 700리에 일자로 흩어서 배치하니 당연히 뻥뻥 뚫리지....대치 상황을 벗어날 계책이 없으면 철수를 해야지... 무슨 생각으로 700리 영채를 지어서 언제 까지 대치 하려고 했는지 이해 불가...그러다 보면 벼락이라도 떨어져서 육손이나 손권이 죽을거라고 생각했나 ㅋㅋㅋㅋㅋㅋㅋ
주연 무덤 발견으로 주연과는 1도 연관이 없는 한국서 풍납토성 관련으로 발굴 반대측에 어이없는 논리가 하나 붙었죠. 발굴 반대하는 주민들이 풍납토성서 발굴된 도자기중 주연 무덤거랑 같은 물건이 있으니 그 이전에 지어졌다는 위례성은 개뿔이고 듣보잡 중국놈 유적이고 건축연대도 그때니 풍납토성은 가치없으니 발굴이 아니라 재개발해야한다하는 논리로 발굴 반대하고 나서고 있으니요. 그게 위례성이 아니라 듣보잡 중국놈 거주지라 해도 절대 가치가 없는게 아닌데 말이죠. 저 이후 그 논리 들이대며 주민들이 발굴현장 유물까지 굴착기 동원해서 유물이 없어져야 재개발이 된다며 부숴버린 사태도 터졌으니요. 뭐 풍납토성 위치가 위치인지라 재개발 되면 엄청난 이익이 생기고, 반대로 유적 발굴이 진행되면 돈이 생기기는 커녕 있던 부동산마저 날아갈테니 그렇습니다만 저런 말도 안되는 논리를 들이대며 유적 파괴를 나선건 선 넘었다 봅니다.
유비가 이릉 대전을 일으킨 것은 관우의 복수보다는 형주를 되찾아서 북벌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우가 혼자 급발진해서 형주를 상실한 거 때문인지, 아니면 유비가 촉에서 유장 상대로 사기극 벌이는 시기 손권이 수작을 부린 거 때문인지. 유비는 관우에게 마음이 떠났는지 시호도 안 내려주죠.
제갈량 멋있다 유비가 제갈량말을 듣고 형주를 취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모른다 그러면 조조가아닌 유비가 삼국을 통일 했겠지 조조도 결국엔죽고 사마의 후손이 삼국을통일 했지만 .... 사마의 대단하다 끈질게 인내해서 결국엔 다죽고 사마염 삼국을통일했으니 멘땅에 해딩하는유비 도 참힘들었겠네 안타깝다
정사 1차 북벌 1. 조운, 등지의 촉 선발대 기곡 전선 대치 > 조진의 대군을 미끼로 잡아둠 2. 제갈량의 중군 기산 너머 우회하여 지방 천수군 점령 > 장기전을 대비함을 알아채고 곽회는 바로 상규성 점거(상규는 진창위수도, 미성, 가정, 장안을 통하는 중심거점) 3. 제갈량의 중군은 상규의 곽회에 막혀 있을 때, 위의 조예는 장안에서 장합의 정예 병력을 상규로 추가 투입 > 진창위수도를 지나 가정으로 가는 길목 4. 제갈량은 실제 정사 기준 마속, 왕평에게 별동대를 편성하여 추가로 들어오는 위의 원군을 저지케 하고자 2만 5천을 가정에 전진배치. > 위의 정예군에 대패. 그와중에 왕평은 홀로 고군분투 승진. 상규성 점령 때까지 버텨달라는 제갈량의 군령에 그대로 못버티고 도주한 마속은 참수형. 5. 조운 기곡 전선 가정 상황 모르고 전진하다 조진에 패배 후 철수, 제갈량의 중군 모두 양평관으로 후퇴. 결국 곽회의 상규를 점거하지 못한 제갈량의 판단미스를 마속에게 과하게 전가한 측면이 있고, 조예의 중앙군 파견은 물량전에서 이미 끝났다고 보여집니다.
촉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음을 뜻하는 게 이릉 참사 이후 제갈량의 급하게 내려간 남만행이었는데, 말이 좋아서 칠종칠금이었지 촉 남부 윈남, 구이저우(운남성, 귀주)를 포함한 촉 서남부 반란을 구실삼아 베트남 북부 지역까지 내려가서 군수물자 및 식량 필요한 인적자원을 약탈해가면서 북벌을 준비했고, 이는 촉 스스로 자립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옹주자사 곽회가 제갈량을 대적하는 기본원칙에 촉은 장기전을 할 수 없다는 그 상황 자체를 간파했다는 건 이미 소설과 다르게 촉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고 위나라 입장에서는 스스로 가만히 앉아 촉을 말려 죽이는 것이 병법상 최고였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