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meline 00:00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02:16 욕망을 놓아버리면 화도 사라진다 05:56 후회를 내려놓고 참회를 하는 다짐 08:54 자신에 대한 자애에 기반한 반성이 진정한 참회! 11:18 마음 알아차림과 감각기능의 단속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12:40 자신에 대한 자애가 있으면, 긍정적인 쪽으로 나가는 힘이 생긴다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어주라, 십자가 박혀있어도 회개한 도둑 논리와 결이 비슷한 ‘용서하라’. 이 말은 앙굴리마라같은 행을 한 이들이 참회할 때 필요한 말. 피해받은 자들 가족들이 돌로 치고 칼로 찔러도 스승과 스승부인의 악에 넘어가 어리석어 수많이 살인했던 때처럼 악행악심을 품지 말라는 상황에 합당.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하신 말씀은 아님! 힘 있어 만행을 한 자 힘을 휘두른 자들이 전력으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숙고하여 해줄 수 있는 것!!!
스님 말씀 듣고 부처님의 진정한 뜻에 대해 많이 알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아직도 의문이 있는 점은 부처님 성도 전 두명의 스승이 선정에 들었으냐 하는 점인데 제 기억으로는 스님께서는 두 스승이 든 삼매를 선정이라고 하시진 않았다는 것입니다.선정과 유사한 집중상태? 정도로 얘기하신 걸로 기억합니다.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성도 후 천안통으로 두 스승이 무색계에 태어났다는 것을 보셨죠.부처님이 거짓말 할리는 없고 보통 초기불교에서는 선정에 들어야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난다고 말합니다.그래서 두 스승은 선정에 들었다고 봐야 마땅한거 같습니다.선정이 아니라면 무색계에 태어날수 없는 것인데 모순이 발생하니까요.
아니요 선정 맞습니다.. 힌두 스승들도 선정에 다 들었어요..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그 2스승 그 선정을 닦은 분) 다 .. 배우고닦은게 부처님이시니.. 이후 참나 견성을 지나 극악의 피안이 있기에 고행을 하셨고.. 멸진정에 이르러.. 순환되는 이치 연기를 깨닫고 설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멸진정에 이르러 성불한다... 그러지만 부처님이 어떠하셨는지.. 경을 보면 어렴푸쇼 이해할 수 있어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해탈 법문.. 탐진치를 여의고 연기로 풀며 인과를 말합니다.... 무색계 이후의 멸진정도 2가지... 나뉘지만. 실제로는 나뉘지 않습니다....
힌두아트만은 참나 피안에 든 것에 머물지만.. 부처님은 무색계 선정 이후 까지 보셨고.. 연기. 인과를 설하고.. 수행의 이치에 공을 말하고 색을 말하는 법문역시 순환의 이치를 말하셨어요.. 그래서 윤회 인과 연기..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머물지 않는 자유로움을 .. 이루어셨습니다...
질문자의 본래의도는 질문이었던것 같은데, 나중에는 공감으로 바뀐것 같습니다. 화를 안냈으면 하는 바램으로 질문했는데 답변이 화를 내지 말라는건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없이 화에 대한 단점들만을 나열하자, 질문자도 이에 호응해서 화의 단점만 나열한것 같습니다. 답변자가 답변에 해당되는 말을 한것은, '이해하면 바뀐다'라고 하신것 같은데. 이것은 질문자가 캐치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개인적 견해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바뀌는것은 없습니다. 이해해야 바뀔 가능성이 있는거죠. 그 가능성을 현실화 시켜주는것은 반복수행입니다. 반복해서 이해하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생각하는 와중에 약간의 의도(업,여기서는 유익한 업이 되겠네요)를 쌓을 수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생각'에 시간을 보냅니다. 실제 유익한 업을 쌓아야죠. 영상을 예로 들면, 자애의 표상을 반복해서 세우거나 표상을 잡지않는 행위를 반복하는거죠. (혹은 답변자가 '반복 호흡수행'을 염두해둔건지?) (이해의 역할을 반복수행의 범위까지 확장한것 같아서 언급해봅니다)
수행은 반복입니다. 이해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검증을 하는데 필요하지만 실제 움직이는건, 이해보다는 반복입니다. 이해해야 반복할 수 있지만, 반복을 안하면 마음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자애의 표상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거나, 마음이 인지한 표상을 반복적으로 버리십시오. '이렇게 버리는게 잘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땐, 적의의 표상이 형성된것인지 아니면 영속성이 있는것인지를 판별해보아 자아가 없음을 인지하고, 과거(전생포함) 수많은 의도(업)이 쌓여서 형성된 것이라는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반대로 유익한 업(의도)를 쌓아가면 괜한 적대감은 없어질 수 있겠죠. 이런식의 '이해'를 한후 다시 반복합니다. 자애의 표상을 또반복 반복해가며 세우던가(내 스스로가 행복하기를 모든이가 행복하기를 고통이 없기를, 반복), 마음으로 인지한 표상을 반복해서 계속 버려야 합니다(인지된 표상을 잡았을때 또 놓고 또잡으면 또 놓고 계속 반복) 이해는 잠깐, 그리고 동일행위 반복(수행이 반복임) 반복이 쌓여서 어느정도 선을 넘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하지만 또 반복 계속 반복. 또 어느정도 선을 넘으먄 더 편안해짐. 그리고 또 반복 반복. 중간에 의심일 들땐 잠깐 '이해'를 해봄(지금 나의 느낌이 형성된 것인가?). 그리고 또 반복 반복(자애의 표상 떠올림 반복, 혹은 표상을 잡지않는것을 반복) 수행은 같은행위 반복입니다. 운동선수가 기본달리기, 기본팔굽혀펴기, 기본줄넘기 이것 반복하는것과 같아요. 기타리스트가 반복해서 같은 코드를 치는것과 같아요. 이론으로 방향잡고, 계속 반복. 교학으로 방향잡고 계속 수행. 이론은 방향잡기에 필요한것이고, 실제 자를 움직이는것른 반복(수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는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교학에 더 비중을 둬야할테고, 충분히 교학을 습득한 사람은 수행에 더 비중을 둬야할 것입니다. 실제 움직이는 것은 수행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해는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이지, 실제 변화는 반복수행(마음을 반복적으로 길들이는 행위)을 거쳐야 합니다. 이해는 필수이지만, 이해로 변화를 바란다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는 반복행위의 영역입니다.
기독교나 이슬람은 어떤 완벽한 존재를 상정해 놓고서, 그 사람의 가르침이 이게 맞다/저게 맞다를 가지고 싸우는 거니까. 마치 뉴진스라는 아이돌(우상)의 팬이 되기로 했는데, 어떤 팬들이 뉴진스도 트럼은 하겠지(사람이니까) 라고 하면 뉴진스는 트름안해 하는 팬들과 서로 뒤지게 싸우게 됨. 근데 불교는 너도 수련하면 뉴진스 될수 있어, 나는 이렇게 수련했더니 뉴진스 춤빨에 가까워지더라. 서로 뉴진스가 되려고 경쟁 및 연습하는 거라서. 내 수련법이 맞고, 라이벌들이 수련법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내 수련법이 맞으니까 너는 반드시 내 수련법으로 고쳐야해. 안고치면 때려 부실꺼야 라는게 애초에 필요가 없슴. 내 수련법이 맞고, 상대방의 수련법이 틀렸으면 그냥 한숨쉬고 자기 갈길 가면 되는거지. 뉴진스도 방귀낀다고 주장하며 내 로망을 깨는 놈들을 제거하기 위해 목숨걸고 싸울 필요는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윤회에 관심갖는 이유는 결국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족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러니까 윤회가 있냐 없냐를 따지는 것의 이면에는 '아이고.나 지금 힘들어'라는 고통의 절규가 자리하고 있는 거다. 붓다가 지혜를 남기신 이유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함이지, 사람들을 괴롭히고 두렵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윤회도 무슨 저주나 공포심 조장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을 소멸시키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일 뿐이다. 문제풀이를 할 때 우리는 흔히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말씀도 행간에 숨겨진 의도를 피악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윤회는 반드시 고통의 소멸과 행복을 설명하는 쪽으로 연결시켜야지 고통의 반복과 불행을 설명하는 쪽으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 즉 이러이러하면 윤회가 멈춘다고 해야지, 이러이러하면 윤회가 지속된다고 하는 것은 공포만 조장할 뿐 실익이 없다. 행복의 지혜를 가르친 붓다를 왜 저주와 처벌의 존재로 만드는가. 붓다는 과거나 미래 대신 현재, 즉 '지금 여기'를 강조한 지혜자이고, 사성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팔정도의 길을 제시한 자상한 교사다. 간혹 붓다를 염세주의 철학자로 오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붓다의 중도 수행의 핵심에 '자애심과 측은지심'이 있음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윤회를 두려움과 공포로 바라보는데, 대단히 잘못됐다고 본다. 윤회는 반드시 붓다의 자비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일묵스님은 종종 윤회나 무아에 관한 이해는 수행의 척도라고 하신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수행의 깊이는 자비심과 관련된다. 지혜는 자비심과 일란성 쌍생아이기 때문이다. 일묵스님이 종종 자비심을 강조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윤회나 무아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 앞서서 지혜와 자비심을 기르는 수행에 애쓰는 이들이 늘기를 빈다. 이 수행의 첫단추는 탐욕(갈애와 취착)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탐욕을 증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길잃은 아이 대하듯 바라보고 위로해주고 돌려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윤회를 끊어내고 평온함을 기르는 좋은 방법이다. 머리로만 알고 행함없는 내가 진실로 행함의 열정이 있기를.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