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원망하고 화를 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러지도 않고 조용히 떠나버린 아지의 행태는 마치, 제게 분노하고 원망할 만한 그런 작은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화가 났다. 끝까지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어서. "왜 날 버렸어요." "...너, 차에 뭘 탄..." 슬슬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아지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극심한 두통을 이겨내지 못한 그녀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율은 멈추지 않았다. 왜, 날 버렸어요?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물음을 반복하며 아지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던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괴로워하는 아지가 목전에 있었다. 왜 날 버렸어요? 왜 날 버렸어요? 왜?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딱 그 중간에 놓여있는 기분이었다. 위험했다. 작은 무언가라도 툭 치고 지나가면 끊어질 것만 같은 실이 율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실을 아무도 건드려선 안 됐다. 만약 건드린다면 아지가 위험해질 터. 그러나 실의 끝자락을 쥐고 이를 가볍게 뜯어낸 쪽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아지, 본인이었다. "...하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에는, "...웃겨?" 저를 향한 비웃음이 한껏 담겨 있었다. 참을 수 없었다. "큭...!"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율은 어느새 아지의 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손끝에 힘을 가하자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오기 시작했다. 약기운에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손수무책으로 무너져 가는 꼴이 보기 좋았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어떻게 나한테!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율에 비해 아지는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짙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못 죽일 것 같아? 그래서 이래? 이윽고 아지의 눈이 완전히 뒤집히기 직전, 그리고 율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의 순간에서야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해." 숨통 전체가 틀어막혀 입 밖으로 나온 단어는 죄다 뭉개지고, 실상 바람 소리에 가까웠지만 율은 정확하게 알아 들었다. 일순 깜짝 놀란 그가 아지의 목에서 급히 손을 떼어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쿨럭, 쿨럭. 미친 듯이 기침을 토하는 아지에게서 율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 마냥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다시. "...다시 말해줘요." "쿨럭, 쿨럭..." "다시 말해 보라고!" 그녀가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상황임을 자각했음에도 율은 여전히 아지를 재촉했다. 마음이 급했다. 혹여나 제가 잘못 들었을까 봐. 어째서인지 다신 듣지 못할 대답이 될까 봐. 마음이 초조해져만 갔다. 그러나 아지는 의외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끝끝내 제가 원하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사랑해." "... ..." 고작 그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에서 거짓말처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율이 붉어진 입가를 매만지며 물었다. 거짓말이죠?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죠. 이에 아지의 대답은 잔인할 정도로 명확했다. "응." "..." "왜? 네가... 쿨럭, 네가 나한테 매번 하던 거잖아." "..." "원하는 만큼 해 줄 수 있어." "..." "율아, 사랑해. 그러니까..." 팀장님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줘. 하. 아지의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율은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쩐지 아지 답기도 했다. 상처받은 서로를 목전에 두고, 그녀는 끝까지 저와 싸우려 들려 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저를 통해 팀장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처음부터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했고, 끝도 이렇게 막을 내려야 맞다는 것을 마치 상기시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렇다면 응해드려야지.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율의 질문에 아지는 이를 갈며 답했다. "...찢어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 "그만큼 사랑해." "...증명해 봐요." "... ..." 율의 대답에 아지는 아주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 끝내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순순히 딸려오는 율의 모습에 이를 악무는 것도 잠시 재빨리 입을 맞춘 그녀는 그대로 그의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서툰 모양새에 핏방울이 번져오고 점점이 묻어난 입가에 비릿함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고 율도 제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사랑을 증명하려고 중간중간 입술을 물고 당기며 달콤한 호흡을 섞으려는 아지가 보여 제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팀장님은 돌려줘." 율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돌려줘." "..." 아지가, 그 장아지가 울고 있었다. 사실상 그녀에게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빼앗은 격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으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녀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있었다. 아지는 이제껏 자신의 감정을 잘 감췄다.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으며, 하물며 그의 행방까지 묘연하게 만들어 많이 초초했을 법도 한데, 그럼에도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랬던 그녀가 약 기운에 끝내 울음을 터트린 것은, 실상 본인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율은, "정말, 정말 내겐 정말 소중한 사람이란 말이야..." "... ..." 그런 그녀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크게 울렁임을 느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던 거다. 이래서 우리는 함께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더 빛나고 아름다워질 수 있어.' "아지 누나..." 사실은 두려웠겠지. 팀장이 다쳤을까 봐, 혹은 죽었을까 봐. 많이 초조했겠지. 그럼에도 그 모든 감정들을 억누르고 앞선 상황에 대처하며 끝까지 원하는 것을 얻으려 쟁취하는 모습이 우린 닮아있고 그 부분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와 함께 하면 당신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테니. 그러니까... 율은 구슬피 우는 아지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역시 당신은 나와 함께 해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