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계통과 출신에 대해서는 기록이 알려져 있지 않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그의 본명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2]라고 적고 있다. 그의 이름은 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3] 일찍부터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의 서주(徐州)로 건너가 그곳에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인으로서 출사해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4]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흥덕왕 3년(828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고 있는 참상을 전하며, 군사 거점을 세워 이를 금지시켜 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의 활약으로 827년~835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신당서》 및 《삼국사기》는 평가하고 있다. 장보고는 해적 토벌에 그치지 않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발해와 탐라, 우산국, 참파, 스리위자야, 마타람 왕국, 크메르 제국, 라보 왕국, 팔라 제국, 라슈트라쿠타 제국, 프라티하라 제국, 아바스 칼리파국 등 여러 나라와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산둥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신라인들이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려 하자 그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신라인 출신 노예들을 사들이거나 주인에게서 되돌려받아 신라 출신 노예들을 석방시켰으며, 이들은 신라 출신 이민자들이 건너간 산동 주변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 이상이 되었으며, 토지를 기부하여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성장했고, 법회를 열 때 200~400명까지 인파가 몰려들었다.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였고, 또 자신의 진영에 환대하여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실력에 따라 대우하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 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이것들을 묶어 조직화하였다. 838년부터 847년까지 당나라에 머무르며 구법행을 했던 일본의 승려 엔닌은 자신이 당에 체재하는 동안 장보고의 휘하에 있던 현지 신라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구법행을 완수할 수 있었고, 장보고에게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귀국한 뒤 엔닌은 히에이 산 엔랴쿠지에 자신이 체재했던 등주(登州)의 신라인 사찰 적산법화원을 본떠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 도교의 신인 태산부군泰山府君)을 모시는 적산선원의 건립을 발원하기도 했다. 흥덕왕이 재위 11년만에 죽고, 신라에서 일어난 왕위 다툼에서 김제륭(희강왕)에게 패하고 피살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그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김제륭도 재위 3년만인 838년 김명이 일으킨 정변으로 피살되고 김명이 스스로 민애왕으로 즉위하자, 예전 김균정의 편에 섰다가 패하고 달아난 김양이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찾아와서 김우징을 만나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동의한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의 군사 5천을 내주어 김양과 함께 왕경으로 진격하게 했다. 장보고와 정년이 이끄는 청해진 군사는 무주와 대구를 거쳐 왕경에 입성, 왕경군을 격퇴한 뒤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신무왕)을 추대한다. 이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진해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문성왕 2년(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그러나 귀족과 신하들이 장보고가 신라 왕을 탐한다며 지속적으로 문성왕에게 경고했고, 결국 문성왕은 예전의 장보고의 부하였던 명을 받은 자객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살해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장보고가 사망한 연대를 문성왕 8년(846년)이라고 기록하였으나[5] 《속일본후기》는 조와(貞和) 7년(841년) 11월 중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회창(會昌) 5년(845년) 7월에 전 청해진 병마사가 국난을 당하여 중국에 망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교차검증과 전후맥락의 측면에서 보다 설득력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장보고의 사망 기년을 841년으로 보고 있다. 문성왕 13년(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