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을 자존심으로 버텨온 이서영에게 가족은 기댈 만한 존재일까? 잠깐의 해프닝으로 마무리 된 등산 장면은 시간대와 장소를 바꾸면 스릴러가 따로 없다. 늦은 밤, 골목길에서 낯선 사람 서넛이 길을 막고 위협한다면? 못난 가족일지언정 사람 구실만 했다면 한 가닥 희망은 걸어볼 것을, 아버지는 구제불능의 인간이었고, 남동생은 먹여살려야 하는 아이여서. 집안의 가장 이서영에게 가족은 힘들 때 기대고 싶어도 기댈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도 선뜻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등장인물이 갈등을 빚어야 드라마가 재밌다는 사실은 접어두더라도, 강우재가 천사같이 착한 성격이었다면 이서영이 정한 선을 결코 넘지 않았을 것이다. 자존심으로 철갑을 두른 이서영에게 다가가기 위해, 강우재는 MSG 한 스푼을 첨가한 독선적인 성격이 되었다. 그리고 강우재가 밀어 붙이듯 권한 식사는, 이서영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포기하고 있었던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서영은 결혼했고, 또 이혼했다. "우......우재씨!" "어! 왜! 나 여깄어!" 변명 한 마디 하지 못했지만, 이서영에게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기대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녀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사라지라고 말한 전남편이다. 아버지도 남동생도 아닌 전남편. 만일 강우재가 눈길에서 조금만 더 심하게 다쳤다면 이서영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이서영 또한 강우재가 했던 숱한 고민들을 했고 비슷한 결론을 얻었을 테니 말이다.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의 괴롭힘과, 그 모든 걸 용서하게 만드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고 그걸 넘어서는 죄책감. 사랑받으면 안 된다는 단단한 자기혐오. "나는 서영아, 내가 너였다면 못 이겨냈어. 그 상황을 버텨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나." "우재씨가 뭘 알아서 눈물이 나." 강우재가 이서영의 진심을 알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로맨스 작법에 의거한 전형적인 후회보다는 성장통에 가깝다. 상우가 미경과 이별을 겪으며 누나를 이해하고, 미경이 병원에 자기 신분을 들킨 후 새언니를 이해하듯, 우재는 과거를 회상하며 비로소 이서영을 이해한다. 어리광부리며 커야 할 나이에 철가방을 든 아이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들은 묵묵히 이서영의 성장을 기다린다. 누나의 심정을 알고 말리지 못해 미안해하는 이상우의 눈물도, 서영의 상황을 생각하며 우는 강우재의 눈물도, 이서영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눈물을 가늠하게 한다. 위급한 순간에 우재를 외쳤듯 이서영이 마지막 껍질을 깨기 위해 필요한 건 우재에 대한 사랑과, 그로 인해 흘릴 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