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왜란전후로 그렇게 자기들도 휘청할정도로 도왔던게 이럴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였을 겁니다. 조선 입장에선 이를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거고요.... 만약 지금의 미국이 우리에게 sos를 치면 거절할 수 있을까요? 다 그시대의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한겁니다. 깔끔한 설명 잘봤습니다.
@@j.c.s7762 그건 아닌게 사르후전투는 조명 연합군이였는데(심지어 이때는 광해군) 개발살나고 그 이후 영원성 전투까지 명나라한테 단 한번도 진적없음. 10배 이상 강했다는건 도대체 어느 소식인지... 당대 사람들, 역사학자들도 부인하지 않는게 그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였음.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게 아니라 당시에 인조도 그런걸 알고있었음. 그런데 친명배금이 정통성인 인조가 후금을 돕는다는건 자기를 부정하는거였지.
@@nWo4lifes 당시 인조는 친명배금에 입각해서 광해군을 내리고 들어선 정권이고 1641년 홍타이지가 산해관 외곽을 먹기 전까지 후금군은 절대 산해관을 넘지도 못했습니다. 누르하치도 원숭환이 이끄는 영원성을 함락하지 못했구요. 그 때 영원성 전투 당시 후금군이 기록상 16만(실제추정 10만~6만)이고 영원성 전력은 고작 2만(실제추정 1만5천~1만)입니다. 전쟁은 사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후금은 당시 가장 강력한 군대였을지는 몰라도 공선전에는 그닥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12문 정도의 홍이포 또한 예상하지 못했죠. 애초에 전투를 오래 끌고 간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후금군이 신무기를 도입해도 근본이 팔기군을 이용한 유목민족식 전투인데 보병도 오래버티기 어려운 마당이 기병을 이끌고 전투를 오래 이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명나라가 망조여도 인조는 자신의 정당성과 명나라의 산해관이 뚫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후금편에 붙지 않은거죠. 하지만 이자성의 난으로 오삼계가 스스로 성문을 열어 명나라는 망하고 조선은 그 전에 뚜들겨맞죠. 영원성 전투가 1626년, 정묘호란이 1627년입니다. 아무리 얕잡아봐도 청나라 군이 강한건 알고 있었고요 당시 조정이 탁상공론에 빠진 문관들이 쥐고 흔드니까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인조가 무능하긴 해도 어쩔 수 없이 명나라 편을 든겁니다.
인조보다도...사르후전투를 치르기 전에 광해군이 궁궐공사에 나라 예산 몇년치를 다 쏟지 않고 군대를 대규모로 양성하고 했으면 사르후 전투에서 이겼을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겼으면...엄청난 혜자였겠자요. 잘하면 아예 북진해서 영토를 넓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삼전도의 굴욕은 피할수 있었겠지요..그떄는 후금이 그리 막강한 때도 아니여서....
@@jc8ms 경복궁&창덕궁:새 도읍을 세웠으니까 당연히 새로 지어야 함 창경궁:태평성대라 국고가 빵빵하고, 애초에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음 이게 그냥 창덕궁 살기 싫다고 궁궐을 계속 찍어내던 광해군이랑 비교가 가능한 부분인가요? 그리고 폐모살제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건 뭔;
근데 이괄도 깔 사람이 맞긴하지만 당시에 인조의 대처가 너무 미흡했다 생각합니다. 사실상 반정 1등공신인데 험한 북방으로 가서 군사육성하는데 지원도 제대로 못받았고, 자기아버지인 김류의 말고삐나 잡은 김경징과 똑같은 2등공신취급에다, 거기다가 하나뿐인 아들이 역모혐의를 뒤집어 씌웠는데 꼭지가 돌지 않을 사람은 없다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괄의 아들의 역모혐의때 군사를 동원하여 이괄까지 빠르게 잡던지, 아니면 인조가 나서서 그럴일 없다 커버를 쳤어야했다 생각합니다
그러고 사실 청나라는 중원을 먹을 생각자체가 전혀 없었다고 해요. 원래는 명나라에서 약탈을 할려고 했는데 이자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뒤 청나라 오삼계와 합작해서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자 도주하면서 자금성을 불에 태우고 모든 식량도 불에 태워버리고 궁궐보물들을 약탈해서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왔을 때 중원은 무정부상태였고 청나라 관료가 이 상태면 중원이 무정부상태이니 혼란하고 백성들의 안보에도 안 좋으니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게 좋겠다라고 권고해서 중원지배를 하게 된 거라고 해요.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에 대해서 제가 잠시 말씀을 드릴 것이 있는데, 당시 청은 당연히 그 이전의 여진과는 다른 차원의 국가가 되어 있었고 명을 몰아붙이긴 했으나 끝끝내 산해관을 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명은 북경에 다다르는 최대 관문을 잘 지키고 있었고, 청은 초반 러시로 몰아붙이기는 했는데 자원이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에서 산해관을 밀어붙이자니 뒤쪽의 조선이 뒤통수를 근질근질거리게 만들었고, 아무리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작살이 났던 국가였지만 여전히 동북아시아 대륙에서는 넘버 투의 군사력 국가였습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후 다시 폐쇄모드로 들어갔고) 산해관도 제대로 못 뚫는 상황에서 조선에 뒤통수 맞고 산해관에서 명 병력이 북진하거나 전선이 장기고착화 되면 청은 그대로 아웃되는 상황이었어요. 명은 강남의 곡창지대가 여전히 쌩쌩하게 식량 뽑아내는 상황이었고, 조선도 비실대기는 하지만 병력들 보급은 쥐어짜내면 가능한 상황이나, 청은 전선이 장기화되면 그대로 굶는 상황이었어요. 원래 유목민족이었으니 살던대로 육포나 씹고 양젖이나 짜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애초에 청이 산해관까지 밀고 내려올 수 있었던 건 만주와 산해관 사이에 있던 한족 및 기타 부족들에게 명에서 수입한 식량들을 무상제공하면서 포섭한 거라 명을 통한 식량 공급이 끊긴 상황에서 유목민이 아닌 이들이 배고프다고 칼날 방향을 바꾸면 청은 아작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홍타이지는 앞 쪽 본진인 산해관 방면을 일단 고착화시킨 다음 초고속으로 뒤통수에 있는 멀티인 조선으로 남하한 거에요. 정상적인 조선과의 전쟁이라면 주요 거점들을 쳐내면서 와야 하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우회해서 한양 방면으로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려오는데, (애초에 거점을 통해 장기적으로 올 수 있는 보급도 없어요...) 사실 이게 청이 조선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조선은 청이 한양까지 오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피난처를 강화도로 하려고 했습니다. 강화도는 말 그대로 섬이라서 뱃길 끊으면 청군이 쉽게 못 올라와요. 뚝딱 배 만들어서 오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유목민족이 배 만들어서 상륙작전 하는 건 마치 섬 맵에서 셔틀만으로 터렛 빽빽하게 박힌 적 본진에 드랍하는 꼬라지나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강화도로 가기도 전에 청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까지 내려왔습니다. 자세한 기록을 보면 청군은 미친듯한 속도로 한양 방면을 위해 달려온 거였습니다. 중간에 임경업 등이 주요 거점 방어를 잡았는데 그냥 개무시하고 본진으로 내달린 겁니다. 그러면 남한산성에서 청은 왜 저러고 있었느냐? 이처럼 미친듯한 속도로 내달려왔으면 영화 남한산성처럼 홍이포로 개작살을 다 내고 인조를 쳐죽인 다음에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 되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그게 아니었습니다. 홍타이지나 청 수뇌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을 목베면 항복을 받아내는게 아니라 원수 갚자고 전국의 의병들이 다 일어나서 골 아프게 될 것을.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미 가토 기요마사가 섣불리 북쪽까지 올라갔다가 여진족들한테 깨갱당해서 도망치고, 여진은 우리에게 도와줄까? 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쌔빠지게 달려와서 목표로 한 건 인조의 모가지가 아니라 공식적인 항복이었습니다. 만약 빠르게 인조 모가지를 베고 아직 남은 조선의 근왕병과 기타 의병들을 다 쳐부순다고 하면 그 시간에 명이 산해관을 뚫고 오히려 청 본진이 위험해질 타이밍이었어요. 그러니 조선 입장에서는 최대한 개겨야 한다와 청 입장에서는 저 자식들한테 빨리 항복을 받아내야 하는데...의 요상한 조급한 상황이었어요. 물론 인조가 기본적으로 그다지 뛰어난 임금이 아닌 건 맞는데, 단순하게 이게 왕이 띨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애초에 정권 자체의 설립 명분이 광해군이 전쟁 내내 우리를 도와준 명을 홀대한다...였는데, 이제와서 그걸 쉽게 뒤집는다면 내부적인 정권의 정당성 자체가 무너지는 거고 (광해군은 여전히 유배지에서 살아있었습니다.) 또 실제로 명-청 전쟁 자체가 누가 이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다가, 기존의 양쪽 전과나 잠재적인 국력의 차이를 보면 명이 쉽게 질 리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에서 우리 앞마당까지 적이 왔으니 얼렁 명과의 사대를 풀고 청과 사대를 맺는다? 그러다가 상황 역전되면 우리 본진까지 쓸려나가고 이젠 사대하는 조공국이 아니라 성질머리 난 명에 의해 나라와 민족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 도박의 상황이었어요. 당시의 상황은 단순한 사칙연산 수준의 상황이 아니라 고차원 방정식의 상황인데, 이걸 가지고 뭐 단순하게 멍청이네 어쩌네 하는 건 TV로만 축구보면서 저리로 패스해야지 병신 어쩌구 하다가 실제로 필드 들어가보면 조기축구회 수준에서도 어버버거리는 꼬라지와 같습니다. 1. 청은 산해관 제끼고 다른 곳으로 우회할 수도 있었어요. 아니 있을 수도 있긴 있었지만 (^^) 그 다음 관문인 산서는 산해관과 마찬가지인 요새, 그 다음으로 가면 아예 몽고까지 가야하는데, 이러면 보급이고 뭐고 포기하고 현지조달, 즉 약탈의 전술이라는 건데 이건 사실상 무리수였고 실제로 이 방법으로 북경 근처까지 러시한 적도 있었지만 이건 뭐 따지면 테란 본진에 저글링들만 쳐들어간 꼴이었죠. 아, 물론 이게 원숭환 모가지를 날리는 결과를 가져와서 결과적으로 성공적이김 했으나 이 우회전술 자체는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전술이 아니었습니다. 2. 여진족, 그러니까 청은 단순 유목민이 아니라 반농반목 민족이 맞아요. 근데, 말 그대로 반농일 뿐이라 그냥 자기들끼리 먹고 살 때에도 명이나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서 농산물 부족분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젠 포섭한 한족들에게까지 농산물 기반 식량을 나눠줘야 하는데 그걸 충당한 건 아이러니하개도 살살 달래보려는 명이 제공한 식량들이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접어든 이후 이게 끊어지니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나라 경제 꼬라지가 꼬라박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3. 청도 배 정도는 만들어서 강화도로 갈 수 있기는 했어요. 근데 문제는 조선 수군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명성은 임진왜란 당시의 그 분 덕택에 실제 모습이 어떻다는 것과는 별개로 명과 청, 일본까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존재였어요. 실제 청은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군의 특장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때문에 홍타이지는 계속 조선에게 산둥반도로 드랍 좀 하게 너네 수군 좀 빌려주라. 그러면 모문룡 수군따위 작살낼 수 있으니...라며 졸라댔죠. (당시 조선군에 대한 평가는 보병, 기병은 약졸이나 걔네들 수군과 포병, 총병들은 좀 무섭다....였습니다) 아, 물론 홍타이지가 겁낸 것과는 달리 조선 수군은 그다지 면밀하게 움직이지는 못했지만...일단 존재 자체가 강화로 건너가다가 모조리 수장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올바른소리 그쵸 ㅋㅋ 뭐 안해보려고 하는 것까지야 아니지만, 사실 농담투 비속어 안쓰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격변기에 유지하다가- 부적절한 방침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것] 뿐이죠. 1840년대에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서양의 문명발달을 모르고, 1850년대에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고, 고종이 영의정에게 미국에 대해 묻자 "미리견은 단지 부락 몇이 모여있는 곳으로 화성돈(워싱턴) 촌장이 영길리(영국)와 교섭하는 해적같은 놈들이다"라는 식이었다는 게 절망스러울 뿐이죠. - 해적이라.....해양세력이 바다를 토대로 전 세계를 발견하고 연결하며 상업으로 국력을 키우던 시절에, 농사만 안짓고 벼슬 안하는 놈들은 조선인은 사람으로 안봤겠죠. 뱃놈에 장사꾼으로나 보지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지식수입하던 놈들이 유학도 가면서 20세기는 영국이 최고인 시대고, 영국과 독일로부터 배워야한다는 사실을 간파하던 때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20세기에 참 일을 잘 했지만 뭐랄까.....교만함이 문화적 병폐같아요. 자꾸 남을 얕잡아보려고 하고. 아주 어려워져야 오기로 잘난 놈 따라가고.
전쟁의 원인중의 하나가 선조-광해군으로 이어진 인재라인이 난으로 숙청되면서 없어졌다고 들은거 같음.. 어쨋든 가장 큰 이유는 광해군 쫓아내고 인조가 왕이되면서 도미노마냥 문제가 계속 생긴거임 그러다가 전쟁 터진거고 인조가 왕이되고 정치못한거 떠나서 처음부터 왕이 안됐더라면 좋았을듯
인조의 잘못이 먼지 전혀 모르는 영상. 광혜군 시절만 해도 신형포를 개발하는 등 준비를 하면서도 중립외교를 했음. 단순히 병력만 보낸 인조랑은 천지차이 거기다 이괄의 난도 이괄의 아들이 역적으로 몰려서가 아니라 이괄을 잡기 위해 이괄의 아들을 역적으로 본것 즉 전후가 바뀐거. 역적의 아버지가 역적이 되는 건 조선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니까. 실제 인조반정에서 이괄은 거의 대부분의 공을 차지해야 하는 무장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찬밥 취급을 받은 사람임. 거기다 먼저 친것이 인조이기에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음. 백프로 인조의 미스로 일어났고 인조가 잘못한 일임.
참고로 병자호란 이전에 일본(에도 막부)에서 우리나라 측에 군사 원조를 제의했다고 하죠(속내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겠지만) 그나마 그 제안은 당시 조정에서 거절하였는데 만약에 진짜 일본이 개입되었더라면 여러모로 사태가 더 복잡해졌을 것 같습니다 진짜 이 때 일본이 개입 안 된 게 천만다행인 것 같습니다
월요일좋아 강화도 함락 안됬으면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시간을 더 길게 늘릴 수 있었음. 당시 청나라는 기근이랑 명과의 전쟁땜에 개판 직전의 상황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선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황제가 직접 내려온 상황 갓경징이 강화도에서 잘 버텨내고 갓자점이 병력 똑바로 모아서 청군 후미를 거하게 후드려 깟으면 삼궤구고두례는 인조가 아닌 홍타이지가 해야 했을수도 있던 상황. 심지어 식량 모자랐던 곳이 남한산성 뿐만 아니라 청군 측도 심각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장에 우리가 받은 굴욕인 삼궤구고두례 직후 정상적인 상황이면 청 황제가 직접 왔으니 이것저것 내정간섭할 기구 설치 및 별의별 난리를 치고 여유롭게 떠날 수도 있었어야 하는데 저 굴욕만 뜯어내고 인질들만 데리고 호다다닥 청으로 복귀했죠. 요는 김자점은 그래도 생각의 여지라도 있는데 갓경징은....
우리나라는 국토의 3분이 2가 산악지대인데다 돌로 이루어진 산악지역이라 과거의 전쟁에서 절대 정복당한 적이 없습니다 초기에는 상대의 화력에 밀리게 되지만 장기적으로 가게 되면 전쟁물자는 다 떨어지고 결국 상대가 지지를 치고 떠나게 마련이었죠 이런 지형적 특성을 살려 예상되는 전쟁의 파고를 전략적으로 대응하여 장기전으로 몰고 갔었다면 후금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물러나게 만들었을 겁니다 전쟁으로 굴욕을 맛본 최초의 사건이라 아쉬움이 남네요 정복당할 수 없는 천혜의 자연조건에 석전으로 전국민을 군사화시켜 대응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김민종-v7h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고전적 전쟁에서 우리 선조들이 살아남은 전술이 석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기마민족들은 활과 말로 전투를 하는데 산악지대에서 장기전으로 가면 무용지물입니다 우리나라가 전국 곳곳에 높고 넓게 성을 쌓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있구요 유사시엔 전백성들이 성안으로 들어와 침범하는 적을 돌로 박살냈다고 들었어요 활이 다 떨어지면 기마민족은 힘을 못써요
신무근 산성입보 전술에 대해서는 정확히 잘 모르겠구요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 본토의 왕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바로 이웃인 한반도를 점령하지 못한 이유가 산악지대의 지형을 이용한 요새화 석전 상대가 전쟁물자 소모하고 지쳐서 철군할 때까지 버티는 벼랄끝 전술을 썼다는 것이죠 이러한 천혜의 지형조건으로 정복당하지 않는 나라가 베트남 이란 등이 있습니다
인조의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상황이 문제였다 그놈의 유교,성리학만 고집하는 양반들은 세금도 내지않았고 세금은 다 농민이 내야해서 국가 재정이 고려보다 못한 수준이었음 또 조세를 거두는 과정에서 몇몇 비리가있어 조정으로 들어가는 수입이 엄청 줄어드는 상황도 빈번함 이렇게 국가재정이 빈약하니 군사를 키울려해도 돈이 없어서 못키운거지 왜란 후 직업군인들만 이루어진 훈련도감의 군인들도 당시 국가재정이 부족해서 월급도 제대로 못받았다고함 상비군이 월급을 못받는정도인데 속오군과 일반군들은 오죽하겠음? 그리고 조선의 양반들도 문제였다 조선에서 재산을 많이 가진것도 양반들인데 세금 조금 내라니깐 크게 반발하고 상소올려서 세금 못내겠다하고 도로를 정비하면 적이 침입하기 좋다해서 도로도 잘 안정비해서 길이 안좋으니 수레를 못끄니깐 사극보면 길거리에 대부분 지게지는 사람들이 보이는거임 솔직히 양반들도 세금내고 세종과같은 유능한 왕과 신하들이있었으면 조선 후기때도 잘성장했을거같다 조선이 저렇게된건 결국 무능한 왕과 신하들,양반의 타락,지나친 사대주의와 유교,조세문제가 원인이었던거같다
한 웹툰을 보다가 이런 댓글을 봤었는데... 선조 : 난 자식은 건들지 않았다 영조 : 손주는 지켜줌.. 인조 : ... 이었나? 일단.. 이괄의 난을 벌일 동기만 주지 않았더라도 더 발전했을 것 같고, 소현세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소현세자가 17대 왕이 되어서 조선을, 많이 발전시킬수 있지 않았을까 예상해봅니다.
@@arsenalatleletico9874 어..정묘호란은 1627년인데 무슨 뜬금없는 말씀이신지 ㅎ 혹시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니 전후맥락 다버리고 병자호란도 똑같은 이유로 일으킨거라는 이상한 발상인가요? 이상하게 조선까의 반작용인지 조선 위정자들의 실리적인 면모를 강조하려고 상대국 위정자들을 미치광이로 만들고 싶어하는거 같네요 ㅠ
@@isaibnmaryam4761 뭐가 상대방의 위정자를 이상하게 만든거죠? 단순히 식량난뿐아니라 당시 명과의 교역이 끊긴 여파로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경제적으로 피폐해서 심각해서 정묘호란뿐아니라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는 논문들 많던대요 지네 나라 국가적위기를 전쟁으로 해결하는것 나쁜놈들이지만 이상한 사람들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병자호란일으킨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님이 말한 기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전 3년전 기록하나로 아니라하는것도 웃기네요
1. 광해군 시절 부차전투로 인조 시기 이괄의 난으로 병력 날려먹음 2. 인조 시기 병력증강과 성곽 보수와 둔전(산성 축성은 무익하다는 주장도 있었음)을 했으나. 반란경험이 있는 인조가 원래 해야할 지방군 훈련을 감시하고, 지방관들도 훈련하는거 눈치봄 3. 후금의 전선 일원화와 후방 안전화, 기근 그리고 부양인구 증가로 조선 정벌 필요성 대두 (식량 문제는 홍타이지 치세때 어느정도 해결된것으로 추측함). 4. 3의 연장선상으로 복속한 몽골부족(내할하,코르친) 대치중인 조선과 차하르 그리고 점령지 한인의 반란과 언제 분해될지 모르는 버일러 연합체제. 이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교역단절과 소빙하기로 부족한 식량을 약탈로 공급하던지 아니면 전쟁을 통해 무력을 과시하던지 결론은.... 5. 정묘호란 발발전 침공로 예상과 성곽 축성 그리고 후금과 조선의 전력차 인식과 병력증강을 함. 하지만 병자호란때는 산성이 시간끌기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이 있긴했다. 즉 인조의 처신 문제만이 원인이 아니란 소리
광해가 키운건 이미 사르후에서 다 날아갔고요. 그 이후에는 궁궐병때문에 국방력과 내치가 ㅂㅅ되었습니다. 그걸 그나마 인조때 복구했는데 이괄의 난으로 박살나버렸습니다. 이후에는 목소리만 컸던 청서들의 주전론이 강세가되고요. 그리고 당대 조총이 야전에서 기병을 상대로 이기는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훈련도가 낮은건 병자호란때 속오군체제에서 온 근왕병이 그랬지 남한산성 내에 있던 정예병은 잘싸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0. 조선건국이념:유교, (경제) 소규모 자영농 중심+사대부 중심 의정부 강화(정치) ->경제적 하부기반도, 지배층의 상공업 개발 의지도 없음. 1. 부존자원 : 70퍼가 산지 10퍼가 황무지인 한반도에서 희소, 전략 자원마저 크게 없고 노동효율 증대와 농업 발전->잉여 생산물 및 잉여노동력 발생 ->도시경제 발달로 가지 못함(잘 쳐줘야 숙종 때 부터나 아닐까요.) 2. 부가가치에 대한 이해:농업이 근본이고 나머지 산업(상업 공업)은 근본을 해치는 사술 혹은 사기행위 정도로 봤기에(부가가치 개념 없음) 인적자본(실용기술, 지식수준을 갖춘 인력), 물적자본(돈, 기계류 등 고효울화된 생산요소), 인프라(도로 항만 전문 특수지구)의 축척을 도리어 기피하는 현상 발생->애초에 뭐가 없으니 부가가치는 커녕 자급자족도 힘듬->힘들 때마다 고리대를 빌린 백성 농민 파산 혹은 노예화 ->자원, 토지가 양반(물론 진취적인 기업인은 아니므로 재투자가 아니라 뇌물이나 사치 아니면 개인적 축재 정도로 끝난다.)에게 집중->악순환. 3. 불건전한 경제, 정치환경:건국 때부터 권신, 세도가, 종친회, 소수 독점 상인들에서 소금,쌀 등의 필수재화를 매점매석하는 경우가 만성적으로 존재->이는 정치권력의 타락, 비호속에 있었던 행위임에도 사대부는 이를 상업 공업 자체의 폐해로 인지->결국 도로 설치, 자유로운 상공업, 수레 사용, 화폐사용을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봄->상공업 발달 저해 및 자유경쟁의 부실로 악성 독점의 지속화. 결론: 약소국의 서러움(경제 발전 외에도 국방비 지출이 높을 수밖에)+ 의사결정시스템과 철학의 문제(앞서 말한 0번) + 기술인력, 물적 인적 자본, 부존자원의 부족+ 타락한 정치권력 등의 문제로 조선은 후기가 될 때까지 상공업이 눈에 띄게 발전하기는 커녕 수레 화폐 어음 유한회사개념 따위도 없어서 가치 자원의 유통이 원할하지 않아 흉년이 되면 수십에서 수백만씩 아사자가 나오고, 풍년이라도 소수 세력의 매점매석으로 시장왜곡이 되면서 인력은 인력대로 자본은 자본대로 축척않 않는 문제 발생 결국 농업이라도 잘 해서 현상 유지라도 하는게 최선인 국가가 됨.
@@kisear455 맞는 말인데 당시 조선은 망하기 직전까지 가기 전에는 정말로 상업, 제조업, 조직적 광업 없이 온리 농업이라고 생각해서요. 지금 기준의 엄격한 통계적 gdp가 없어 안타깝지만 그냥 인프라만 놓고 보면 도로와 쓸만한 항구(공도정책 피고 섬주민 및 해안가 주민도 엥간하면 다 들여옵니다), 계획도시(조선의 경우 수원 화성 말고는...), 어음과 신용장, 초보적인 수준의 유한회사 형태 등등도 없었고 애초에 화폐경제도 활성화되지도 않고요(말기의 엽전은 가치가 또 너무 낮아서 문제..) 그러면 통상 조선정부의 독점시전이나 내수사, 뇌물성격의 현물 증여 및 유통이 물자 이동의 전부인데 딱히 농업 말고는 경제를 논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고려시대때는 실크로드 무역망에 포함될 만큼 진취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선조님들이였으나... 역시 사상의 힘은 무시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crouchingstone 일단 18세기부터 상공업이 발달했고 도로같은경우는 해운이 이를 담당했고 화폐의 경우는 화폐를 만들어도 정작 사람들이 안쓰거나 윤 일단 18세기부터 상공업이 발달했고 도로같은경우는 해운이 이를 담당했고 화폐의 경우는 화폐를 만들어도 정작 사람들이 안쓰거나 악화가 제대로 구축못하거나 등이요 그리고 고려를 예로 드셨는데 당시 고려때는 중국도 개방정책이였지만 조선의 경우는 주변국가 전부다 해금정책을 펼쳐서 무역할 상대가 없습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는 애초 조선의 건국세력이 사대부(=실리보다 이상주의 위주로 명분으로 삼는 주로 책공부만 해왔던 샌님들)임. 이 명분자체도 지들끼리의 권력을 합리화한 도구였고, 이러한 권력을 잡고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신분제사회를 만들어 그 권력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대를 이어 점점 타락하고 위선적으로 변질되니, 그러한 고매하신 지배층이 운영하는 사회가 되어가니 비참해질수밖에 었었음
@@정상적인사회생활위해 아니죠 오히려 실리주의자인거죠 당대 미국이나 다름없던 명에 1대1로 맞짱 뜨자는게 이상주의 아닙니까? 사대란 이름하에 명의 체면 세워주고 대신 우리 건들지마라가 옳은표현 같다생각이드는데요 실제로 명에게 겉으로는 굽신했지만 명나라의 벼슬을 받은 여진족을 똑같이 벼슬을주는등의 회유책과 혹은 토벌을 실시하는등 독자적인 모습을 계속 보여왔었죠
광해군 중립외교는 이미 역사학계에서 아닌것으로 확정된지 오래됐습니다. 오히려 어느한쪽에 정확하게 붙지 않아서 어영부영 명 후금 양쪽의 눈쌀을 받게 된겁니다. 애초에 명나라는 조선에 5만명 파병을 요청해서 조선군이 아예 전선 하나를 더 형성해서 후금을 압박하길 바랫는데 광해군은 궁궐공사에 세금을 쓰는바람에 5만은 커녕 14000명만 지원합니다. 별 도움이 되기 힘든 숫자죠. 또한 지원 안할거면 아예 하지말앗어야 햇는데 14000명을 지원하는 바람에 후금에게 전쟁선포한것도 다름없게 되고 훗날 조선침입의 구실을 제공합니다. 너 전에 군사보냇엇잔아. 니가 먼저 싸움 건거잔아! 하고 침략명분만 제공한겁니다. 게다가 명나라와 후금이 20만 대 10만으로 후금이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엿기에 조선이 5만이상 대규모 파병으로 후금의 후방을 급습하면 후금이 패배햇을수도 잇기때문에. 광해군의 외교는 명나라에게도 도움이 안됐고 후금의 미운털만 박히게 된 이상한 외교엿습니다.
광해군은 애초에 파병자체를 안 할려고 했습니다. 물론 궁궐복구하느라 많은 자원을 쓴건 사실이고 그점은 안 좋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병에 대해선 광해군입장을 대변 해야겠습니다. 광해군은 애초에 파병자체를 안할려고 했지만 조정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이 무조건 파병을 해야한다고 광해군을 압박합니다. 광해의 세력이라면 북인들 밖에 없었는데 세력이 많이 약한상태였습니다. 이유는 선조새끼가 광해군을 매우 심하게 견제했기 때문이죠..... (이 이야기까지 하면 내용이 길어짐) 아무튼 광해는 대다수 정권을 잡고있던 서인들에 의해 어쩔수 없이 파병한거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