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반공을 내걸었고 일제가 히틀러 무솔리니와 방공협정을 맺은 천황제 파시즘의 반공을 내건 것이고. 친일지주들이 사유재산권과 천황제를 국가의 근본으로 내건 1925년 치안유지법이후 독립운동을 공산주의로 매도하였던 것.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오죽이나..." 윤직원 영감은 팔을 부르걷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땅- 치면서 성난 황소가 영각을 하듯 고함을 지릅니다.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이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목마다 공명한 정사,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p. 310 참고
얼마전에 퇴임한 아버지 왕인 후안 카를로스1세가 프랑코가 부활시킨 첫번째 왕입니다. 후안 카를로스1세 왕은 프랑코 이전 스페인의 마지막 왕이었던 알폰소 13세의 손자입니다. 1975년에 취임한 카를로스1세 왕은 프랑코 총통의 모든 권한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나 스스로 입헌군주제로 전환하고, 46년 만에 처음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여 권력을 총리에게 돌려주는 등 스페인을 오늘의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하였습니다. 1981년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하는 모습등을 보고 불만을 품은 일단의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카를로스 국왕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진압에 성공합니다. 이 사건으로 스페인 왕실은 국민들 속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립니다.
바르셀로나 뿐만 아니라 레알마드리드도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에 저항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마지막이 카탈루니아(바르셀로나)가 점령당한 후의 마드리드 공방전이었고 FC바르셀로나와 마찬가지로 조합원의 투표로 당선되는 레알 마드리드의 지도부도 그 마지막을 함께 하였지요. 그래서 이 때까지는 서로 나쁜 사이도 아니었고 오히려 연대의 대상이었죠. 근데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가 바스크나 카탈루니아에 대한 갈라치기를 시작하죠. 바스크어, 카탈루니아어에 대한 금지 등등. 그러한 가운데 레알 마드리드 선수 출신이자 스페인내전 중 레알마드의 감독이었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등장하면서 달라집니다. 스페인내전 당시 프랑코의 국민전선에 참전했다고 돌아와서 1943년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에 당선됩니다. 그리고 축구에서의 갈라치기차별정책의 핵심으로 레알마드리드가 대 FC바르셀로나, 대 아틀레틱클럽빌바오 의 주력으로 프랑코장군에게 선택받게되죠. FC바르샤, 아틀레틱클럽에 상대하기 위해서 베르나베우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고 베르나베우는 그 돈으로 연습시설이나 유쓰육성장을 복구하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등을 영입하여 50년대 유럽피언컵 5연패를 이루어내지요. 베르나베우는 1978년 죽을때까지 종신회장을 지냈는데 75년 죽은 프랑코와 한몸인 셈이었죠. 뭐 프랑코가 죽고 역사적 화해를 했으면 좋겠지만..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장 이름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인데 어떻게 화해가 가능할까요? 왕정이 없어지고 2공화국시기 레알을 떼낸 마드리드 CF 시절보다 독재자와 그를 지지했던 구단회장에 의한 황금기를 더 기억하고..추억하는 사람들 위주로 팬덤이 형성되어 있으니.. FC 바르셀로나나 아틀레틱클럽 빌바오와 친할래야 친해질 수 없는 구단이 된겁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프랑코 진영에서 싸운 것 맞지만, 프랑코가 레알 마드리드를 지원했다고 할만한 근거는 딱히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 내전 이후 10년이 넘는 암흑기를 보낸 게 말이 안 되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1943년 회장으로 취임했는데, 1953년에야 라리가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 직전 우승이 1933년으로 근 20년 만의 우승이었죠. 참고로 그 기간 최다 우승팀은 바르셀로나 5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4회였습니다. 만약 프랑코가 레알을 지원했다면, 왜 그동안 우승을 못 했을까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회장이 되기 전까진 뭐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이후에도 근 10년 동안 우승이 없었죠. 잘못된 정보로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이 프랑코의 지원 하에 지어졌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신데, 딱히 증거는 없습니다.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부지를 구입하고 지었고, 제 가격을 치렀습니다. 총 건설 비용이 2억 88,34만 2,653페타스 정도인데 이는 누 캄프의 2억 8800만 페타스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누 캄프가 10년 후에 지어졌다는 점, 수용 규모 등을 생각하면 딱히 경기장을 지을 때 프랑코의 지원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말씀하신 경기장, 연습 시설, 육성장 등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투자자들을 모집한 것이지 프랑코의 지원을 받은 게 아닙니다. 알프레드 디스테파노 영입 역시 프랑코의 지원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물론, 바르셀로나가 디스테파노의 권리(?)를 가지고 있던 리버 플레이트(아르헨티나)와 먼저 계약을 맺긴 했습니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리그 2년 연속 우승 멤버의 주역 쿠발라의 부상 때문이었죠.
그렇게 바르셀로나는 리버 플레이트와 1955년 디스테파노를 이적시키겠다는 합의를 이뤄내지만, 문제는 당시 디스테파노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디스테파노의 권리는 리버 플레이트뿐 아니라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에게도 있었거든요. 자세한 사정은 복잡해서 다 서술하기 힘들고, 중요한 건 미요르나리오스가 디스테파노의 빚을 포함해 27000 달러를 요구했다는 겁니다. 바르셀로나는 이를 거절하고 1955년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보였죠. 그러나 스페인 축구협회는 리버 플레이트와 미요르나리오스 모두의 승인이 있어야 이적을 허용하겠다고 결정했는데(FIFA의 결정 때문이기도 함), 이때 나선 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입니다. 바르셀로나의 미온적인 움직임에 불만이었던 디스테파노의 관심을 얻는 데 성공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미요르나리오스와의 협상을 마무리하죠. 이제 디스테파노의 이적은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사이의 협상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바르셀로나는 유벤투스에게 디스테파노의 권리를 팔려고 했지만, 유벤투스는 딱히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디스테파노의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었죠. 결국, 바르셀로나는 리버 플레이트와의 계약을 취소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리버 플레이트의 거부로 무산됩니다. 상황이 진전되지 않자 FIFA는 알만도 무뇨스 칼레로에게 중개인 역할을 맡깁니다. 전 스페인 축구 협회장이자, 쿠발라의 바르셀로나 이적에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하죠. 이로 인해 디스테파노는 53~55년은 레알 마드리드에서, 55~57년은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에게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대신 디스테파노를 완전히 가지죠. 바르셀로나는 약 24만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디스테파노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쿠발라가 부상에서 회복한 것도 있고, 디스테파노가 프리시즌에 부진한 탓도 있었죠. 어쨌든, 이 과정에서 딱히 프랑코의 지원이라고 할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르셀로나의 전 회장인 엔리크 마르티 카레토가 더 문제였죠. 카레토가 미요나리오스에게 1만 달러 정도만 지급하려고 했었거든요. 만약 카레토가 그냥 이적료를 다 지불했더라면 이야기가 달랐을 테니까요. 만약 정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프랑코의 비호를 받고 디스테파노를 영입한 거라면, 굳이 바르셀로나에게 24만 달러에 대한 돈을 넘길 이유도 없었을 테고, 복잡하게 협상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또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프랑코 진영으로 참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친 프랑코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전은 친 프랑코 vs 반 프랑코라기 보다는 국민파(국가주의) vs 공화파(공화주의)였습니다. 여기서 공화파는 단순히 공화주의자만 있는 게 아니라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소련이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주의자 진영을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죠. 어쨌든, 공화파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다양한 세력이 있었던 것처럼 국민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왕당파, 공화주의 우파, 카를리스타, 팔랑헤 등등 오히려 어떤 면에선 공화파 보다 더 다양했죠. 그래서 내분이 터질 뻔도 했었고요. 그걸 프랑코가 찍어 누르기도 했고, 운이 좋기도 한 덕에 큰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요. 즉, 국민파로 참전했다고 해서 친 프랑코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레알 마드리드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의 행적만 봐도 그렇습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오히려 축구와 정치가 결부되는 것을 피했습니다. 프랑코 정권 시절 스포츠 책임자들과 갈등이 있었던 것은 유명한 사실입니다. 프랑코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었고(반대로 바르셀로나는 프랑코에게 훈장을 2개 줬죠. 프랑코가 누 캄프 건설에 도움(그린벨트 해제)을 주기도 했었고요.) 이렇듯 레알 마드리드가 프랑코의 지원을 받은 증거는 없습니다. 그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우수한 경영과 디스페노의 영입 등으로 유러피언컵 5연패를 하게 되고, 이를 프랑코가 정치적으로 선전하고 이용했을 뿐이죠.
@@끄덕-i4t 스페인의 소시오(조합원) 클럽(현재는 레알, 바르샤, 아틀레틱, 오사수나 정도만 남음)의 조합장(회장)은 그냥 축구단의 단순 운영이 아니라 운영철학을 가지고 결정하는 거지요. 그러니 정치적인 의사가 많이 들어갑니다. 30년대의 레알마드리드는 공화파 조합장이 많이 당선됩니다. 그러니까 쏘시오의 다수가 공화파, 공화국지지자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요. 근데 스페인내전이 끝나고 나서 그 다수파인 공화파를 다 은퇴시키고 추방하고 감방보내고 해서 다 날려버리고 국민당, 국민파 사람들만 남게된 상황에서 레알마드리드가 힘든건 당연한 거겠지요. 그리고 베르나베우의 레알마드리드 회장 취임시기도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죠. 산체스 게라은 감방에 가고, 안토니오 오르테가 회장과 임원들은 사형을 당하고 나서 20년전 회장하던 멜렌데즈가 다시 나와서 잠시 수습하다가 산토스 페렐바에 넘어갔는데 그 유명한 프랑코정권이 개입되었던 11-1 사건이 발생합니다. 레알, 바르샤(프랑코 어용) 회장 둘 다 짤린 후 회장이 된게 베르나베우이기 때문이죠. 전임회장이 짤인 이유는 프랑코정권의 개입입데 국민파로 내전에 참전했던 사람이 후임회장이 되긴 하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므로 의심해선 안된다.라는 태도를 취할수록 래알 마드리드팬들은 절대 그 시대를 못 벗어납니다. 사실 프랑코는 빌비오나 바르샤의 회장조차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기 때문에 특정팀을 지원하거나 할 필요도 없었지요. 단지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사람들이 지지하는 아틀레틱클럽이나 바르샤가 잘나가는 꼴온 보기 싫은데 그역할을 잘해주던 레알 마드리드가 프랑코의 마음에 든 것 뿐일 수도 있죠. 하지만 빌바오나 바르샤의 프랑코 어용 회장들은 다 흑역사가 되었는데 그 시대를 살아갔지만 프랑코와는 별도로 자자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베르나베우는 프랑코에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그냥..프랑코와 성향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어차피 경기장이 베르나베우이고 그러한 시대를 존중하는 팬들이 모여있는 마드리드팬 성향이 있는한 안 변할테지요.
ㅎ죠지 오웰의 추천. 1492년 바르셀로나의 아라곤왕국 페르난도 2세가 마드리드의 카스티아 왕 이사벨여왕과 공동왕국으로 되면서 스페인이 된 것인데 내륙 마드리드보다 바르셀로나와 바스크족의 팜플로냐를 수도로 한 아라곤 왕국, 공업도시 빌바오 등 해안지방이 공업발달한 지방이어서 분리독립하려는 중. 고담 마드리드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바르셀로나에서는 별 문제가 안될듯
스페인 내전에서 대문호 두명이 운명적인 만남을 합니다. 헤밍웨이와 앙드레 말로가 만나서 이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전쟁을 소제로한 소설을 집필하기로 약속 합니다. 이래서 나온 소설이 키스할때 코를 어디에 둬야 하나요? 라는 유명한 영화대사에 원작인 무기여 잘있거라 가 나옵니다. 앙드레 말로는 희망이라는 소설을 집필 하구요.
이란 민항기 격추해서 이란인 300명 몰살햇는데도 사과한마디 없는게 미국임. 우리나라 imf때 한강으로 산으로 간사람들 수도없슴, 줄폐업 실직 등등 imf보다 훨 무서운게 미국제재, 베네수엘라 모든 무역 차단함. 대체 얼마나죽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곯앗을까? 툭하면 인권타령하는 미국, ㅋㅋㅋ 악마샏휘들.
빙고. 토지개혁이 분단의 원인입니다. 1941년 임정의 건국강령은 전국토의 국유화였고 1946년 3.5.토지개혁한 38선 이북에서 월남한 지주와 교회들이 토지개혁을 반대한 이승만을 옹립하여 남한단독정부수립으로 분단을 한 것 그래서 임정을 잇는 한독당과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했던 것
와~ 😄 세계사 역사공부 한번 리얼리티하게 잘 들었습니다👍 대학원 수업시간때 "게르니카" 그림보면서도 전쟁의 참상을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매불쇼 보면서 무서운 전쟁 생생 해 지네요 비극적인 전쟁은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합니다. 매불쇼 진행 하시는 최욱님도 완전 멋져요👍
미국직장에서필리핀인을 만나 식민지당한것에 분하지않냐 물었더니 ...천만에요...다행이지요...우린 영어권이고 필리핀에서 간호공부하고 미국와서 라이센스 시험받고 통과할수있는법이 있어서 학비를 엄청줄이고 미국에서 당당히 살수있어 좋다네요...미국인들이 식량과 인권에 얼마나 정당한 권력을 행사해서인지....진짜 좋아하드라구요...우리나라 점령군 ..일본에 대한 저항과는 판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