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선생님이 새벽에 절 앞마당을 산책하고 있다고 칩시다... 아무 생각없이 오롯이 그냥 걷습니다. 그런데 문득 범종소리가 울립니다. 이 종소리는 그냥 들려진겁니다. 내가 생각해서 들어야지 해서 들은게 아니죠... 사고하고 사유하고 생각을 궁글려서 그것은 들려온게 아니고 텉 비어 있었는데 범종소리가 들립니다. 생각도 없었고 감정도 없었던 무아의 상태인데, 다른 말로는 진공의 상태인데 그것은 그냥 들려진 겁니다. 그것이 곧 법신입니다. 무아지만 묘유한 작용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진공묘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경험의 주체는 무아입니다. 그런데 들었던 그게 무엇이지 사고와 사유를 일으키면 다시 이분법에 빠집니다. 추구하고 노력하면 그것은 멀어집니다. 실상계합하고..... 있었는데 언어와 사고에 빠지면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움직이게 되면서 망상에 빠집니다. 붓다가 영산회상에서 꽃 한송이를 들자 가섭이 미소짓습니다. 이것을 염화미소라고 하죠. 깨달음은 단순하고 간결하며 명료합니다. 꽃 한송이를 들었을때 그냥 보여집니다. 봐야지 하고 본 것이 아니라 그냥 보여졌습니다. 알아차림해야지 하고 알아차림 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아차려 졌습니다. 꽃 보는 그 자리 그런데 그 자리는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허공과 같습니다. 언어도 없고 문자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립문자라고 합니다. 나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절로 알아차림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얻는 것도 아니요 구하는 것도 아니요 수행해서 알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 영상 주제가 이에 관한 주제입니다. 평안하시고 행복하세요.
@@foolBuddha 설명 감사합니다. 무아는 단순히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나와 세상이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어 변화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空하고 無常하다는 연기공성의 진리를 깊히 깨달아 ‘나’라고 하는 고정된 자아의식과 여기서 나오는 온갖 분별심과 이기심 탐진치 그리고 크고 작은 번뇌를 다 여의어 마음이 허공처럼 청정해지는 것을 무아의 경지라 할 수 있지요. 온갖 수행을 통해 이기심의 온상인 아상을 타파하여 평온 고요한 청정심을 성취하는 것이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이른바 明心見性하는 것이지요. 아상이 있는 유아는 생노병사 고통의 주체이고 아상이 없는 무아는 상락아정 해탈의 주체라고 봅니다. 이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아닌가 합니다. 청정한 마음 속에 이미 무아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무아만 따로 떼어내 궁극적인 께달음이라 보는 것은 좀 납득이 안갑니다. 절간의 종소리가 문득 들리어지고 부처님 손에 든 꽃을 보고 정법안장한 가섭존자의 마음도 시비분별과 집착이 모두 사라진 아상이 타파된 청정한 마음자리를 확인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청정심은 세상이 자와 타로 나뉘지 않고 육경과 육식이 하나로 합일되어 함께 공명할 수 있는 깨달은 자의 마음, 즉 불심이라 하겠습니다. 무아라해도 결코 마음을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무아란 이 세상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지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이 세상에 없고 이 세상 너머에 있습니다. 당연히 육신(몸)은 내가 아닙니다. 주체에는 1인칭 주체, 2인칭 주체, 3인칭 주체가 있습니다. 그 중 1인칭 주체를 나라고 하는 겁니다. 현상적 관점에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집 거실에 있는 TV에서 재미있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데 1인칭 주체인 나는 없고 다른 주체가 있어서 그 드라마를 본다면 1인칭 주체인 나에게는 보이지 않고 보고 있는 다른 주체에게는 보일 겁니다. 집에 그 어떤 주체도 없다면 드라마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주체가 있고 주체가 대상인 드라마를 볼 때, 주체에게 대상이 보이는 겁니다. 만약 집에 내가 있어서 내가 드라마를 본다면 드라마가 1인칭 주체인 나에게 보이겠지요. 현상적 관점이 아닌 본질적 관점에서 보자면 육신이 속해 있는 시공간세상은 드라마와 같은 대상입니다. 시공간세상이 대상이니까 시공간세상에 속해 있는 육신은 당연히 대상입니다. 지금 시공간세상이 다름아닌 1인칭 주체인 나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나에게 세상이 보인다는 것만큼 내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육신이라는 고정된 관념을 버리면 시공간세상 너머의 내가 인식됩니다. 다만 알 수만 있고 보이지는 않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