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집안은 친명부역자 집안이었죠. 조선계 명나라 사람인 이성량과 결탁해서 세력을 키웠고, 이성량이 여진족 치는데 앞장섰다가 명군의 실수로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참살당했고.. 그게 미안했던 이성량이 누르하치에게 교역권을 주었는데.. 그 교역권을 기반으로 부를 쌓고, 명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고, 결국 후금을 세웠죠.
여진족은 부여, 고구려, 발해때만 해도 한민족과 한 나라에서 같이 살던 민족이에요. 거기다 금나라 시조 함보가 여진족을 이끌고 금나라를 건국하는데 이 함보는 고려 사람이고요. 만주족의 청나라 건륭제 칙명으로 완성한 사서인 만주원류고에선 신라와 고려가 자신들의 뿌리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진짜 형제의 민족은 저 멀리 터키가 아니라 바로 옆에 여진족이 한민족에게 진짜 형제의 민족인데 소중화 사상에 찌들었던 조선시대를 거치며 우리 한민족도 한족중심사관에 세뇌되어 중국 처럼 여진족을 오랑캐로 보던 시각만 남아 있는거죠.
강한다는 고대 모든 종족은 몸방어구는 안할지언정 무조건 머리보호구는 필히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두건이라도 꼭 쓰고 전쟁터에 나가서 싸웠지죠. 근데 문제는 장시간 착용하고 전쟁이 지속되면 무족건 지루성 탈모든 유전적으로 탈모가 없던 있던 두피가 상해 탈모가 걸린 수 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이 있지요. 더군다나 오늘날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 보면 탈모이신분들 많습니다. 샴푸가 있고 퇴근하고 샤워를 해도 많이 걸리시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실용적 선택인듯 합니다.
도르곤은 결국 나중에 부관참시 당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좋죠. 홍타이지 사망 후 잘나가던 후금이 불안했었을 때.. 실권을 장악하고.. 결국 명을 멸망시킨 것이 도르곤이었고... 마음만 먹었으면 황제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청을 안정화시키고.. 황위계승을 조카에게 양보했죠. 그냥, 황위를 노렸으면..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병합한 위대한 군주로 역사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죠.
여진족의 모습이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초원과 인접한 서북쪽에선 몽골인 처럼 유목을 하는 여진족도 있고, 본격적으로 농사 지으며 살던 여진족, 아예 선사시대 원시인 마냥 수렵 생활 하던 여진족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접했던 여진족은 농사 짓고 살던 여진족들이였습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냉대기후라 농사짓고 살던 여진족들도 농업 만으론 살기 어려워 목축이나 사냥을 병행하긴 했습니다.
여진족은 지역에 따라 수렵과 농경 유목의 비중이 각기 다른 생활양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어도 부족에 따라 다른 경우도 많았구요. 만주 서북부는 몽골지역에 가까워 유목적 성격이 강했던 예허부족이 있었고, 압록강과 두만강 바로 넘어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남만주 지린성과 요녕성부근에는 바로 누르하치가 지배하던 건주여진이 있었고 지금의 사할린 쪽에는 건주여진마저 야만시했을 정도로 많이 미개했던 야인여진이 터잡고 살았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인구도 그나마 많고 사회조직도 발달했던 곳이 건주여진이었고 건주여진은 수렵과 농경(물론 조선의 농경수준에 많이 뒤떨어지는 생산력과 기술수준)과 부분적인 방목(말과 소, 특히 돼지)이 성행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요동의 명나라세력과 바로 남쪽과 조선과 인접해있다는 사실때문에 명과 조선과의 무역이 성행하였고 특히 명의 이성량이 지배하던 요동지역과의 조공무역쿼터를 독점하다시피했다는 사실이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여 이 건주여진을 예허부족 중심의 해서여진과 야인여진보다 훨씬 더 강성하게 해주었던 겁니다. 그리고 본래 여진족들은 초원지대의 투르크, 거란족들과는 달리 이동도 거의 하지 않고 자기네 촌락에 정주생활하면서 살아서 유목민족=전투력이라는 공식과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지만 고려시대와 송나라 기록에도 나오듯이 워낙에 사납고 호전성이 강한 종족들로서 매일 매일 부락마다 활쏘기 연습 등 전투력을 일부러 키우는 훈련을 생활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고려 중기 윤관의 여진정벌이 벌어지기전 고려 국경을 지키던 고려장수에게 여진족 추장이 찾아와 자기네 부락과 적대적인 부락간에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를 참관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때 고려 장수들이 가서 참관을 했는데 굉장히 사납고 잘싸워서 혀를 내둘렀다고 하는군요. 중국측 기록을 보건데 여진족들은 흡사 초기 고구려 같다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초기 고구려도 산악지대에서 수렵과 방목 그리고 빈약한 농경생산력을 약탈과 전쟁으로 보충하고 세력을 넓혀갔던 전투적인 종족이었죠.
가끔 만주족이 지금도 그들의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기는 한다. 우리랑은 당연히 인접 국가의 법칙에 따라 사이가 안좋고 고려의 여진 정벌부터 병자호란까지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서로 니가 맞니 내가 맞니 하고 싸웠겠지? 하지만 분명한건 혼자 너무 강한 국가가 군림하면 중소 국가들이 견제한다고 연합했던 이치처럼 중국을 상대로 싫어도 같이 연대하고 있었을지도
여진족이 왜 변발을 했는지 이유를 찾는건 우리 조상들이 왜 수천년간 상투를 고집했는지 이유를 찾는 거와 비슷함. 고대부터 동아시아에서 헤어스타일은 그저 멋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부족을 나타내는 표식이였음. 조선인에겐 상투가, 여진족에겐 변발이 자기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심볼임. 상투가 무슨 환경에 적응하면서 편의성이나 위생을 고려해서 만든 헤어스타일이 아닌거 처럼, 변발도 여진족이 자기 종족을 나타낼 수 있는 심벌로서 선택한 형태일 뿐임. 특히 여러 부족들간 전쟁이 잦았던 북방의 여건에서 피아를 식별할 수 있어야했고 이를 위해 한 눈에 다른 부족과 구분될 수 있는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음. 그래서 몽골, 타타르, 거란, 여진 모두 변발을 했지만 그 형태가 다 다름. 그들은 이 머리 모양만으로 눈 앞의 상대가 여진인인지 거란인인지 몽골인인지 구별 할 수 있었음. 그리고 이들은 적대 부족에 항복해 귀부하면 복종의 의미로 적대 부족의 머리 스타일을 따라했음. 중원을 장악한 청이 한족에게 변발을 강조하며 이를 위반하면 반란 의도로 파악하고 극형에 처한 것도 이때문.
@@jiabela9274 상투는 청동기 시대부터 하던 풍습으로 유교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었으며 당연히 유교와 아무 상관없음. 상투는 머리털을 잘라야 제대로 할 수 있는 머리임. 머리털 하나도 자르지 않고 상투 틀면 상투가 메론 사이즈가 됨. 대추알 사이즈의 그런 상투를 만들려면 적당한 길이로 머리카락을 잘라야만함. 심지어 여름엔 덥다고 가운데 머리를 싹 밀어머리는 백호치기를 하기도 했음 머리털 하나도 자르지 않는다는 오해가 생긴건 구한말 단발령에 대한 반대 논리를 오해한 거임. 신체발부 수지부모 운운한 내용은 머리털 한조각도 자르지 않는다는게 아니라 상투를 자르고 서양 오랑캐 머리카락을 하는 것은 부모에게 받은 귀한 몸을 함부로 취급하는 불효라는 거지 머리털 하나라도 자르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님.
영상에도 나온 거 처럼 투구를 쓰기 위해 변발을 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입니다. 투구는 보통 쇠로 만들지만, 쇠덩어리 그대로 머리에 쓸 수는 없으니 보통 가죽과 천으로 된 내피를 사용하였는데, 가죽으로 내피를 하면 통풍도 안되고, 머리에 열이나고, 땀이 많이 차게 되고, 불편할 수 밖에 없지요. 단순히 불편한 게 아니라 투구가 미끌려서 전투중 움직임이 커지면 쉽게 벗겨질 수 도 있고, 위생상의 문제로 탈모가 생기는 등 문제가 많지요. 그렇다고 아예 대머리로 삭발을 해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또 하나도 없어서 투구의 움직임이 커집니다. 그래서 뒷머리나 옆머리 정도는 남겨두는 편이 좋지요. 그러니까 투구를 쓰면 어차피 대머리가 되기도 하고 불편하니 아예 이걸 해결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변발입니다. 만주족 뿐 아니라 일본도 같은 이유로 비슷한 머리 스타일을 했고, 몽고족, 투르크족, 카자흐족 등 기마유목민족들도 많이 했어요.
참고로 동북아시아는 각 민족이 한국을 제외하고는 변발을 했었습니다. 그 형태는 모두 달랐지만, 선비/동호/거란/여진/몽골/일본 등 모두 변발이었죠. 다만, 변발의 형태로 분류하면, 선비/동호/거란/몽골은 비슷한 계통으로 보여서.. 크게는 몽골계 변발, 여진계 변발, 일본계 변발로 3가지 타입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변발의 이유는 아직도 명확한 학설은 없구요.
발해 멸망 이후 여진은 생여진, 숙여진으로 정의되었다. 이 분류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이 한 것이다. 이 중에서 숙여진(흑수말갈을 제외한 여진)만 우리 민족과 관계가 있다. 이들은 오랜기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발해인이 되었다. 발해가 멸망하자 숙여진은 거란 치하에서 거란인에게 협조하여 명맥을 이어나갔지만 거란이 망하자 생여진의 금나라가 산둥과 화북으로 이들을 뿔뿔이 강제이주시켜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발해가 멸망할때 왕자 한명이 무리를 이끌고 왕건이 통치하던 고려로 귀순하여 고려에 동화되었다. 숙여진을 탄압했던 생여진(흑수말갈족)은 고려와 동북9성을 놓고 전쟁을했고,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북중국을 정복한 뒤 통치를 위해 중원으로 들어가버려서 여진족으로서의 계보가 끊겼다. 여기까지가 고려시대 여진족의 설명이다. 반면 영상에서 설명하는 조선시대의 여진족(건주위, 해서위, 야인여진)은 퉁구스계 부족들이 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남하하여 한족, 조선인, 몽골인과 섞여 형성된 것으로 고려시대 생여진, 숙여진과 별 관련이 없다. 이들은 고구려, 발해와 접점이 없다는 말이다. 굳이 우리민족과의 연관성을 찾으려면 건주위 지도층이 이성계 부하 출신인것과, 조선과 여진의 국경이 워낙 길다보니 국경을 넘어와 조선인이 된 여진족들, 혹은 반대로 만주로 넘어가서 여진족이 된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정도. 청나라의 초대 황제인 홍타이지는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여진족의 근본에 대한 고민 끝에 여진족이라는 이름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따지고보면 자기들의 근본은 여진(주르첸, 주션)이 아닌데 왜 자꾸 여진으로 부르냐며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했고 만주족으로 민족이름을 변경했다.
@@user-zb7se9vu6n 만주말로 후금은 만주 구룬(만주 나라). 반면 금나라는 주션 구룬(여진 나라). 즉 그들말로보면 두 나라가 같은 국명을 썼다고 보기엔 애매하다. 대외적으로 중화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금(金)이라는 중국의 한자를 공유했을 뿐 이 금이라는 명칭을 읽는 방법도 금(알춘), 후금(아이신)으로 꽤 차이가 있다. 누르하치가 금나라를 칭한것은 정치적으로 과거의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와, 과거 금나라의 강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의미로 여겨진다. 또 홍타이지 이전까지는 그들 스스로도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해서 과거 동북지방에서 가장 유명했던 종족인 여진족과 자신들을 동일시 한 측면도 있다. 사실 만주원류고에서 만주족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법만 봐도, 만주족의 선조가 주션 구룬의 땅에 살고 있었다는 식으로 매우 애매하다. 여기서 주션 구룬이란 지금의 중국 동북3성,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부, 북한의 함경북도 지역까지도 포괄하는말로 중세 여진족이 정복했던 넓은 땅을 의미하는 것이지 여진족이 살던 땅이라는 뜻은 아니다. 주션 구룬에 살았다고 해서 여진족이라는것은 오해이다. 비슷한 예로 몽골족이 러시아와 중동, 페르시아까지 정복하여 예케 몽골 올로스(몽골 제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세웠고 러시아인, 아랍인, 페르시아인은 몽골 제국의 땅 안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몽골 제국에 살았다고 해서 그들이 몽골족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진족이 정복한 넓은 땅에 살고 있었다고 해서 여진족은 아닌 것이다. 이 예시는 매우 적절한 것이 몽골제국이 망한 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몽골을 계승하는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고 인도의 무굴 제국은 아예 국명이 몽골(무굴)이었다. 물론 혈통적으로 따지면 무굴과 몽골은 사실상 연관이 없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계승한다는 의미, 그리고 영토에 대한 명분 주장이라는 측면에서 옛 국가의 명칭을 따오는 일은 매우 흔하다.
여진은 고대 숙신으로.... 하은주 시대에도 있었고. 기록에 발,식신으로 묶어 적혀있기도하는데. 다른 사서엔 발,조선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듯이... 고조선 시대 동이족 계열이였음. 어쩌면 전(고)조선 세력일지도. 활을 잘만들어서 외교선물로 보낸것도.. 예맥각궁으로 외교선물하던 우리와 같고. 활촉에 독을 발라 두려움의 존재였음. 고조선의 북막추장이던 흉노후손 신라 마의태자가 금나라로 이어진걸 생각해도 우리와 깊은 인연인데. 그들의 변발은 우리가 땋은 머리를 고수한것과 같은 의미라고 추측됌. 고대 우리 이족 환족은 2대 부루단군의 명령에 따라.. 머리카락을 땋아 목에 드리우기 시작함. 그 명령을 머리를 깍아야하는 상황에서도 종족의 특징으로 고수한것이 변발로 이어진듯
누르하치 금나라는 신라김씨가문으로 우리방계 역사입니다. 일제와 한족이 우리 방계를 오랑캐라고 부르게 했던 거죠. 정작 한족이 대륙변방에 살던 오랑캐로 역사의 반을 피지배민족으로 살다 거대한 청나라의 유적을 운좋게 이어받은 거죠. 청황제 역사서 목차를 살펴보시길, 첫장에 자신들의 원류로 백제 신라 발해를 지목합니다. KBS 역사스페셜 금태조는 신라인의 후예였다편. 청나라 마지막 황제도 김씨였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북방민족들은 하늘과 인간과의 연결고리로 하늘과 제일 가까운 머리에 각 족속마다 여러형태로 문화가 형성됐다고 봅니다~~~ 우리 한민족이 상투를 통해 하늘과 가까워지길 원했듯~~~ 여진 거란도 그랬구요. 또한 각 부족마다 머리모양으로 서로 식별이 가능하도록 그 형태도 달랐을겁니다.
우리 조상들께서 상투를 틀때 윗부분은 밀어버리고 주변머리를 모아 상투를 틀었는데 ...상투를 틀지않고 그대로 내리면 변발과 같죠! ...같은 동이족인데 우린 상투를 틀고 여진 거란 몽골등은 상투를 틀지 않은점은 뭘까?...제 생각을 좀 보태자면 직계와 방계의 차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즉, 배달 고조선의 직계인 고구려는 상투를 틀고 방계인 여진 거란 몽골등은 상투를 틀지않고 변발을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해봅니다! 마치 집안에서 제사를 모실때 직계 장손과 그외 자손들처럼 말이죠!...
도처에 동사무소와 파출소가 있죠. 군부대도 있구요. 옛날에도 적군이 국경을 넘으면 계속 위치를 추적하고 며칠뒤에 어디에 닿을지 다 알고 있습니다. 대규모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그 위치를 모를수가 있을까요? 4만 잼버리부대가 새만금에 진을 치고 있을때 아무데나 포탄 한발만 떨어뜨려도 쑥대밭이 됩니다. 서로 도망가려고 짐챙기고 우왕좌왕하게 되죠. 근데 포 10대로 100발을 떨어뜨리면...짐싸고 도망가고 새로운 숙영지를 찾아야죠? 근데 거기도 사정거리 안쪽이면? 잠도 못자고 지쳐서 전투력상실.
디즈니 뮬란에도 나오는 센유, 즉 선우..변발을 한 사람임..유목민족의 우두머리를 칭함. 흉노의 왕을 선우라고 하는데..웃긴게 고구려왕을 선우라고 불렀던 중국기록있음. 흉노대군주 이름이 탱그리고도선우..인데..탱그리는 단군임..유목민족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딘가 한국사와 접점이 있음. 아마 그게 고조선이 아닐까 함.
@@Abkaijui 단군을 지금까지 기억하면서 선조로 생각하는 국가는 한국하고 몇 중앙아시아만 남음. 특히 제세이화 홍익인간의 원리를 이해하고 천부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국가도 한국뿐일듯. 일본이 고대사 뺏어가려고 고대사 날조하고 대종교 핍박했지만 결국 천손은 한국에서 나오고 있음. ㅋ
그게 매국사학자놈들의 주장이죠...미친 놈들이죠...고구려 망하고 당으로 끌려간 사람외엔 그 땅에 그대로 고구려인들은 살았죠..왕족들은 세금을 걷어들이며 토호세력으로 백성은 백성대로 대대로 그 땅에 살았죠...발해. 금.청인들을 여진족으로 따로 부른 기록은 희소한데 그걸 부풀려서 여진인들을 따로 실체화시켜 마치 고구려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왜곡했는데 그 왜곡한 놈들이 중국도 아니고 친일관변사학자놈들 이죠..이러한 사관을 그대로 답습한 강단사학이 스스로 굴종적으로 역사를 왜곡...일본에서 해방된지가 언젠데 아직도 일본놈들의 식민사관을 주입시키며 일본놈들의 쫄짜를 자처하고 있죠...천인공노할 친일매국노들...
1. 여진족 오야 가족이 전부 대머리, 2. 그 대머리 유전자가 너무 쎄서 세대가 내려가도 여자의 피가 섞여도 전부 대머리(만약 세대를 걸러서 대머리가 나오면 희망이라도 갖고 왕관을 썼을 거임 - 왕관을 쓰면 대머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요, 왕관을 쓰면 대머리가 아닐 경우 머리를 밀 필요나 아픔이 없지요, 3. 여진족 오야가 대신 등 지배계층과 회의할 때 "내 밑으로 다 밀어"라는 무언의 협박을 함 - 나만 없으니 서운하기도 하고 모두 변발이면 누가 대머리인지 알 수도 없고 4. 대머리가 아닌데 머리 밀게 된 지배계층도 열받아 피지배계층에게 "내 밑으로 다 밀어"라고 대 놓고 협박, 5. 이렇게 상급계층이 힘이 낮은 하급계층에게 대머리를 강요하다 보니 결국 민족이 모두 변발이라는 괴랄한 헤어스타일을 가지게 됨, 6. 이 이유가 아니면 머리카락을 신성(비스무리하게)시 하던 민족에게서 대머리와 같은 변발 문화가 생길리 만무 함
@@user-xw6qf9fj2z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예전에 국사를 공부할 때는 상투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이라고 배웠습니다.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할 때 상투를 먼저 틀고 들어왔다고 배웠구요... 이와 달리 유교식 사상과 문화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이후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뭔가 일의 순서로 따지면 다르게 추측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진의 강점은 다양한 생활환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임. 거란,몽골등은 순수 유목 민족이었지만 여진은 순수 유목 민족이 아니었음. 수렵,채집,유목,농업에도 종사했던 반농반목의 생활을 했음. 게다가 상당수는 어업에도 종사해 고려나 조선의 해안 지대나 우산국, 일본의 서해안 지대까지 약탈하는 해적들도 상당했음. 윤관이 여진 정벌 때 제일 먼저 한 게 서해안 지대의 여진 해적 근거지부터 박살을 내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 좋은 사례임. 여진의 해상 세력이 건재하면 고려군이 여진 지역 깊숙히 들어갔을 때 그들이 배로 배후를 공격할 우려가 있어서 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