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 성읍(城邑) 영토[封境] ㅡㅡ대륙고려 북경 고려위치 ㅡㅡㅡ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맞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맞닿아있다. 육로ㅡ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遼水)를 건너[陸走渡遼]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가는데 모두 3,790리(里)이다 해로 ㅡ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항상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서 먼바다[絶海]로 길을 잡아 ㅡㅡㅡ북쪽으로₩₩₩ㅡㅡㅡ 나아갔다. 배를 탈 때는 언제나 하지(夏至) 다음의 남풍(南風)을 탔으니 ₩₩₩₩바람이 순조로우면₩₩₩₩₩₩ 닷새도 안 돼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 성읍(城邑) 영토[封境] ㅡ 영토[封境]ㅡㅡㅡ요수는 영정하 ㅡ압록강은 원문에 압록 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맞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일본(日本)·유구(流求)·담라(聃羅)·흑수(黑水)·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개의 어금니[犬牙]처럼 서로 맞물려있다. 저 신라와 백제가 자신들의 영토[圉]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병합이 되었으니 현재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여기에 해당된다. 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遼水)를 건너[陸走渡遼]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가는데 모두 3,790리(里)이다 . 해도(海道)로는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淮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 등이 있는데 모두 왕래가 가능하다. 지금 세워진 나라는[今所建國]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정확하게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원풍(元豐)註 001 연간 이래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항상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서 먼바다[絶海]로 길을 잡아 ㅡㅡㅡ북쪽으로₩₩₩ㅡㅡㅡ 나아갔다. 배를 탈 때는 언제나 하지(夏至) 다음의 남풍(南風)을 탔으니 ₩₩₩₩바람이 순조로우면 ₩₩₩닷새도 안 돼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 옛날에는 그 영토가 동서(東西)로는 2,000여리, 남북(南北)으로는 1,500여리였는데 현재는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동북쪽이 약간 넓어졌고 서북쪽은 거란과 접해 있다. 전에는 요[大遼]와 경계를 이루었는데 나중에 침범을 당하게 되자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견고하게 〈방어토록〉 하였다. 아울러 압록강을 의지하여 요새로 삼으려 하였다. 말갈에서 발원하는 압록강[鴨綠水]은 그 물빛이 오리 머릿빛[鴨頭]과 같아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요동(遼東)과는 500리 떨어져 있는데 국내성(國內城)을註 002 거치면서 다시 서쪽으로 한 강물과 합류하여 흐르는데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註 003 이 두 강물이 합쳐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註 004 고려에서는 이것이 가장 큰 강이다. 물결은 맑고[淸澈] 지나치는 나루터[津濟]에는 큰 배를 댈 수 있다. 고려에서는 이 곳을 천혜의 요충지[天塹]로 여기는데 폭이 300보에 이를 정도로 넓다 . 평양성(平壤城)에서는 서북쪽으로 450리이며 요수(遼水)의 동남쪽으로는 480리에 있다. 요(遼)의 동쪽은 곧 옛날 거란에 속했던 지역인데 현재는 사람들[虜衆]이 이미 흩어진 상태이다. 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여서 다시 성을 세워 수비하지 않고 다만 오가는 길목으로 삼았을 뿐이다. 압록의 서쪽으로는 백랑수(白浪水)와 황암수(黃嵓水)라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몇 리(里)를 흐른 곳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니 이것이 바로 요수(遼水)이다 ==========%%%%₩₩₩₩₩₩₩₩₩ .註 005 당 정관(貞觀)註 006 연간에 이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를 크게 격파하고 물을 건널 때 그 물이 얕고 좁은 것이 괴이하여 물으니 이곳이 요수(遼水)의 수원(水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註 007 이로써 옛날에는 요수를 견고하다고 믿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려가 압록강의 동쪽으로 물러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이유이
청은 지도가 없이 경계 확정 회담을 한것같다. 극동과 청조정의 어리섞음이다. 토문과 두만강의 위치를 혼동하면서 회담한 것은 분명한 실수이다.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은걸 모르고 백두산에 오른 것이다. 거기다 실제 토문강 발원지에 비까지 세웠는데 조선은 알면서 모른척했다.
정계비는 토문강원비(土門江原碑)로 되어 있고 비석도 그려져 있다. 이들은 토문강을 여러모로 조사하였는데, 토문강이 곧 물줄기가 끊어지고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곳을 입지암류(入地暗流)라고 적고 있다. 이들은 제1파가 땅속으로 잦아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제2파가 시작되고 있음도 조사하였으며, 노은동 산쪽을 거쳐 대흥단수도 조사하고 어윤강(漁潤江)에서 우리측 접반사와 만나 박하천을 지나 무산부(茂山府)에 도착하였다. 지도에는 백두산 천지도 크게 그려져 있으며 천지에서 세 줄기의 강이 시작하고 있음을 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압록강과 송화강과 토문강이다. 정계비를 세운 뒤 목극등은 이 지도를 필사하여 우리 나라에 주고 갔는데, 그 지도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에는 이 지도 외에 백두산정계비도가 3종이 있는데, 두 지도는 정계비를 설치한 뒤 경계가 불확실한 지역에 돌이나 나무 등으로 경계를 명확하게 표시한 상황을 표기한 지도이다. 또 하나의 다른 지도는 1887년(고종 24)에 이중하(李重夏)가 감계사(勘界使)가 되어 청나라 감계사 덕옥(德玉) 등과 국경지역을 조사한 내용을 표기한 지도이다. 이상의 4종 백두산정계비도는 모두 규장각도서에 있다. →백두산정계비 규장각에 이증거물이 있다는 것은 구글에서 처음 보았다. 극동은 여기까지 조사하고 토문이 동쪽으로 흘러(두만강과 동일) 동해로 들어간것으로 생각한 것같다. 토문강이란 강이 송화강으로 합쳐진다는 것은 미처 몰랐던 것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청나라는 만주국의 땅에서 시작하여 중국으로 강역을 넓혀 갔고, 명나라는 한반도의 4대문 안을 수도로 하고 있었다고 보면 됨.만주국은 강동 6주를 발판으로 성장 하였으며 강동 6주는 정세가 어지러운때에 이 지역을 관리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져서 이에 대한 영유권을 갖게 되는 당사자가 잘못하면 재정이 엎어 질까 항상 걱정이 되는 묘한 상황이 연결 된다고 보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