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아작낼 나라 코리아.. 바로 한국일거라는 설이 왜 설득력 있는지.. 현대전에서의 화력은 맘만 먹으면 한순간 자금성 정도는 골로 보낼수 있다는데 예견자들은 자충수는 중국이 먼저 시작 독기품은 한국의 반격으로 자금성이 상위 순번으로 유력 하다는설. 역사적으로 수없이 침략 당한 한국.. 현재 문화팽창 역사왜곡으로 감정또한 기름에 불 땡긴다는거지.
오만함의 지속.... 후진국의 절하평가..노예종족이라 이분은 한국에서 귀족생활에 물들어 ... 전형적인 자본가들이 많이 다루는 용어를 사용.....그래 후진국에서 온 거지니까 노예의 사고방식.....이...이분은 짧은 글이지만 비난이 최대한 패창되....그럼 너희는 어떠한 사고방식.....고도로 발달된 자본가식 사고방식....너희는 공부 더 해야...썩어빠진 선진사상으로....우리를 설득시킬수 있나?
왕이 살았다해도 가보니 대 실망 겉만 크고 화려하지 씻을곳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솔직히 조선시대 궁궐은 온돌도 되어 있어 따뜻하고 깨끗하기나하지 바닥은 흙이고 보료도 제대로 된거 없고 문도 엉성해서 중국의 겉치레른 확실히 봤다 속빈 강정이지 돈내고 거기가서 본 내눈 망쳤다
황제도 한인간에 불과함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헛되며 죄악을 낳는지 자기 모까지 죽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희생 시키며 권력을 찬탈 하는가 ? 헛되고 헛되도다 결국 인간은 죽음을 피할수없고 흙으로 돌아가는걸 지혜로운 소년이 간함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라 부질없는 인생 ㅡ 후회없는 인생 사시길 ㅡ
고구려 마지막 수도 국내성(평양)이 오늘의 북경이다. 고구려가 유,연나라를 굴복시키고 장수왕 재위 시절 그곳에 34년 간 대공사를 거쳐 장대한 성을 쌓아 새로운 도읍으로 삼았다. 세월이 흘러 고구려가 패망하고 통일신라 시대를 지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몽골의 유라시아 정복이라는 역사적 대격변을 맞이했고 이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100년이 지나고 명나라가 등장했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가 수도를 남경에서 옛 고구려 수도로 천도하고 이 곳을 북경이라 칭하였다. 북경 이전 오래 전부터 자광사가 있던 곳 위에 황궁이 세워졌다. 그게 바로 자금성이다. 그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연호 “영락” 을 가져와 스스로를 영락제라 하였는데 그는 고구려 제국의 위엄을 만방에 떨쳤던 광개토태(대)왕의 연호를 통해 스스로 북방 유목 세력을 밀어내고 새시대의 천자가 되려했던 것이다. 연(연이 닿는다 바로 그 “연”)경이 있던 곳, 고구려 유주자사 진이 활동했던 "유주"라고 불렸던 곳,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고구려 지명(북평, 어양, 상곡, 태원, 안평, 서안평, 신성)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곳, 한반도에서 아무리 찾아도 그 유래가 없는 고구려 고유의 지명들이다. 당시 패권국으로서 고구려가 제국이었기에 수나라와 당나라는 차례로 나라의 명운을 걸고 동쪽과 서쪽의 두 국가가 거대한 패권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그것을 막아내며 존속했던 것이다. 수나라는 그래서 망했고 당나라는 결국 내부분열로 약화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현대로 와서 한국, 중국, 일본은 일찍이 고대로부터 문자(한자)를 만들고 동북아시아 역사의 여명을 열었던 동이족의 후예들이다. 그래서 북경을 가보면 비록 말이 다르긴 하나 우리와 생김새가 같다. 그것은 단군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후예로서 일찍이 무역과 장사로 번영을 누렸던 문명국으로서 서로 다르더라도 마냥 다르지 않고 같은 점이 있어도 마냥 같지 않으니,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존과 번영을 향한 길을 위해 문명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응 저거 신라김씨의 저택이지 푸이가 우리말로 하면 김부이지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의 이름이 김부였지 청나라 마지막왕의 이름도 공교롭게도 김부 신라가 고려에 망하고 경순왕의 손자요 마의태자의 아들이 만주로 건너가서 말갈족과 고구려 발해유민을 규합하여 금나라를 세우고 명나라를 정복하여 청나라를 세웠지
@@권k-k5d 《만주원류고》 에서는 금나라의 시조를 신라, 혹은 고려의 인물로 상정하면서 고구려를 제외하고 부여, 삼한, 백제, 신라, 발해 등을 그 계통과 역사에 포함시켰다. 역대 사료들에 나타나는 기록 가운데 만주 계통과의 유사성을 취사선택하여 고증하고자 하였고, 특히 언어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만주어, 몽골어 등을 고찰하여 비교하는 언어학적 방법의 객관성이 결여된 점이 문제시되고 있다. 또한 1차 사료와 후대의 2차 사료에 대한 구분이 없다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라고 설명되고 있는데, 언어학적 방법으로 접근한다고 그것이 완벽하게 옳은것이 아니며 현대시대에 와서 연구를 통해 잘못된 부분이 많이 있다고 해석되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건가요?
어느 중국 가이드분 경복궁이 자금성 화장실 크기라 했다는데 실제 자금성 9,900칸 경복궁은 7,700칸 정도로 아주 큰 차이는 아닙니다... 인구수는 조선의 20배.... 전 경복궁의 규모보단 북악산이 전면에 있어 그 멋스러움이 최고의 고궁이란 생각, 하루빨리 경복궁 후원이었던 청와대 이전해서 완전체 경복궁을 보고 싶습니다.
@@소원-o7g 검색을 어디서 한거냐 흥선대원군이 7700여칸으로 중건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방치되다가 19세기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되었다. 당시에는 7천여 칸이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로 거듭났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천 칸의 전각이 헐리고 매각되었다 경복궁 7700여칸 공사한다고 조선이 망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공사한다고 조선화폐의 70%를 끌어모았고 그로인해 상평통보는 말살되고 조선경제는 파탄났다 경복궁 공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언제적 755칸이냐 7700칸 전체 다 복원은 못하겠지만 반이상은 복원할 계획중이다
ㅋㅋㅋ실제로 보면 황토색지붕에 갈색벽 컬러 조합이 미적감각이 너무 없어보였고 아름답지 않음. ㅋㅋ공기까지 뿌얘서 더 별로였는데 외국인관관객은 거의 없고 다른지방에서 보러오는 중국인들이 80% 였음 . 중국인들 냄새가 너무 심함. 뿌옇고 냄새나고 아름답지도 않은 건물 ㅋㅋㅋㅋ그냥 별로였음ㅋㅋ
솔직히 자금성 실제로 보면 경복궁이 참 왜소해 보이긴함. 당시는 조선이 못살았으니 어쩔수 없지만 부유하게 된 지금도 멋진 건축물을 짓는데 소홀한건 참 아쉬움. 나중에 후세에 아파트만 물려줄건지 아파트만 짓는게 안타까움. 지금이라도 멋지고 우리 정체성이 담긴 현대건축물과 전통건축물 둘 다 많이 지었으면 함. 일본도 각 지방에 성과 사찰 등 현대사회에 지은것도 많음.
@mo gana 청나라때 외성은 한족의 관원들도 살던 곳이였습니다,원래 관원들은 내성에 살았지만 청나라가 차지하면서 한족들은 전부 외성으로 내보냈죠, 내성중 "황성"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를 보통 자금성이라고 오해들 하지만 황성은 꽤 넓은 지역으로 그중 황제가 사무를 보고 생활을 하는 "자금성"은 아주 작은 일부분입니다, 그외 내성을 8개 구간으로 나눠서 당시 청나라 "만족"의 8기군이 서로 차지를 했던거로 알고있습니다,이밖에 황궁의 남문쪽으로 나가면 유명한 "菜市口"라고 있는데 말 그대로 채소를 팔던 시장이였지만 청나라때 형장으로 사용해서 유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