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드신 것은 알면 알 수록 대단한 것입니다. 과거 모든 나라는 국민을 쉽게 다스리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서민들이 글을 알고 공부를 해서 자신들에게 도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왕이 직접 기득권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만들어 국민들을 교육시킨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사회 시스템을 무너트릴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시도였습니다.
@@진격의다마네기센세 훈민정음에 써있는데요?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노라. 내가 이를 위해 가엽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것이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JinhyunChung 그러니까요.. 나랏말싸미 듕국과 달라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홀쎄..훈민정음을 몰라서 그런게 아닙니다,,조선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안 맞아서 만든 글자라 하잖아요,,,여기서의 백성은 양반이에요... 한자를 쓰는 사람이 양반 빼고 있었나요? 실제 한글은 배우기도 쉽고 우수한 글자이나 사대하던 조선에서는 언문 취급받고 글자로 제구실을 못했습니다 만약 백성을 위해 만든 글자라면 양반은 한자를 썻다해도 아무리 노예국가일지라도 백성들은 한글을 썻겠지만 아닌것이 조선의 문맹율이 일제에 와서야 높아젓습니다,,
@@진격의다마네기센세 초기의 문맹률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만든 한글과 무슨상관? 양반이야 한자를 썼으니 제 뜻을 아뢸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니 여기서의 백성은 천민 노비를 포함한 어리석은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것. 문자와로 서로 맞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의 말이 중국의 문자를 발음할 때 어렵기도 어렵거니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한계점을 가리키는 것 이는 중국인이 자국 언어로 한자를 발음한다해도 여전히 문맹률은 높고 실용성에서 떨어지기에 세종은 한글을 만들때 홍익인간의 개념에서 첫째는 자기 백성을 위함이고 나아가서 문자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만든 것 세종 자신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던간에
중간에 자막이 잘못되었네요 중국어를 빌려쓴게 아니라 한자인 문자를 썼던거죠. 그리고 한자는 정확히 말하자면 동이족이 만들었고 동이족은 우리 조상이기도 합니다. 빌려썼단 말도 사실 맞지 않죠. 우리가 우리역사를 제대로 세우지 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자가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것도 사실이죠. 배우기 어렵고 표현의 한계가 있어서. 이제라도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세워나가야 할때입니다. 중국, 일본, 국내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축소된 우리역사를 바르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dndnpdp20 한자의 모태인 갑골문자는 한족이 만들지 않고 한국인의 조상 동이족이 만들었습니다. 단군조선은 오색인종이 어울려 사는 다민족연방국가였으며, 큰 나라 9개와 작은 나라 12개가 있었습니다. 다만 삼한관경제에 따라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나누었으며, 현지 실질통치자가 욕살이었고, 세 단군이 욕살을 다스렸습니다. 서기전 2333년부터 서기전 238년까지 진조선 단군은 47분이 계셨으며, 민족은 크게 보아 아홉민족이어서 구환 또는 구이라고 불렀습니다. 3개 민족 밖에 없었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지금 한국 초중고 역사교과서는 1920년 일본이 만든 식민사학이며 한국 대학 사학과 교수는 대부분 실증사학으로 변명하는 식민사학자입니다.
@@dndnpdp20 중고음, 상고음, 갑골음으로 거슬러가면 현 중국어 보다 한국어와 연관이 깊다는 건 조금만 찾아봐도 알것입니다.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FIEUL9NgNek.html 이곳에 가시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음운학 최춘태박사님 채널을 추천해 주고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실것 같습니다. 중국 사서 구당서에 동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일본이라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래이는 백제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중국에서 그린 지도에도 래이 지역을 산동에 그려 놓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동이를 동쪽의 오랑케라 지칭하는 것은 화하족 관점의 일방적인 주장일뿐 우린 군자의 나라입니다. 화하족은 한중, 성도 등 사천지방 산골에 살던 사람들이며 그 동편, 즉 대륙 동부지역은 다 동이의 영토이니 그들의 시셈이 우릴 욕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떼(놈), 쪽(발이) 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구글지도로 사천성을 검색해 보면 그들의 지역이 나옵니다. 동서남북 사방을 동이니 북적이니 남만이니 하면서 그저 지들 주변국을 욕했을 뿐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들의 욕하는 말에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 전혀 없습니다. 그래봤자 우리는 공자가 살고싶어 했던 군자의 나라임에 틀림없으니까요.
제발 한국에는 글자가 없어 중국에서 한자를 빌려 썼다는 잘 모르는 소리는 하지 마라. 한자는 중국이 상나라 동이족의 갑골문을 변형시켜 사용한 글자이고, 동이족이 바로 지금의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퍼져 살던 우리의 조상이다. 한글이 위대하고 좋은 문자인 것 맞지만 원래 우리 글자인 갑골문의 변형자인 한자를 중국에서 빌려 썼다는 무식한 말은 제발 하지 말자.
한자는 한글 이전에 우리 조상이 써 왔던 우리들의 고대문자입니다. 따라서 한자를 중국어 또는 중국문자로 단정해서는 곤란합니다. 한자를 어느시대 누가 만들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자만 대략 그 기원은 은나라 갑골문자라 하지요. 은나라는 동이족이라하며 동이족이라면 우리 고대 조상일 수도 있지요.
옛날에 중국어를 빌려다 썼다는 얘기는 큰일 날 소리죠.. 문자인 한자를 빌려 썼다는 얘기를 잘못 한 거 같은데 이것도 틀렸죠.. 한자는 중국의 문자가 아니라 동아시아 문자였고 이걸 주도적으로 사용했던 민족 중의 하나가 우리였습니다. 한자는 중국 글자라고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한자 소유권의 일부를 스스로 내팽개치는 한심한 작태..버려야 합니다.
고대 동이족이 전부 한민족은 아니였지만, 한민족은 고대 동이족의 일부 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임. 중국 땅에 남아 있던 고대 동이족들은 현대 거의 중국 한족화 되어서 그들 고유의 문화, 전통등 정체성을 상실했음. 현재 고대 동이족의 문화, 전통을 유지하고 계승한 민족은 한국의 한민족이 유일함. 따라서, 한국의 한민족은 고대 동이족의 정체성을 지닌 유일한 민족이므로 역사적, 문화적인 유일한 계승자임.
중국의 동북공정의 특징은, 이전의 한족 중심의 역사 즉 민족 중심의 역사에서, 자신들의 영토 중심으로 즉, 영토 안의 민족과 문화를 중국인, 중국문화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소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 문명이 한족이 아닌 동이 문명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중국 지배층이 한족이 아닌 때가 많았다는 점 등등의 이유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친일 또는 사대주의 사관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국뽕이라 폄하, 폄훼하는 뽕 먹은 뽕쟁이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더 정확하게 한자는 동이족 문자입니다. 우리민족 글자입니다. 하늘(천),따(지) 음 정확히 한음절이죠. 개발한 곳은 한음절인곳이 원조입니다. 중국은 자기네 문자가 아니다보니 두음절과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는데, 우리는 어디나 한음절이죠. 요녕성,산둥반도도 동이족 같은민족.
역시 중간도 못 되는 코로나 원조국! 태생 자체가 가짜라 도둑질밖에 할 줄 모르는, 허구의 한족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다. 그 외는 다 이민족 왕조로, 그 당시 한족은 가장 밑바닥 계급이었음. 몽골 왕조 원나라만 해도 1계급이 몽골인 2,3계급이 고려인,아랍인,여진인 등이고 4계급이 한족이었다. 상(은)나라 같은 상고시대 왕조는 북방에서 내려온 동이족 왕조.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왕조다. 5호16국이나 5대10국 모두 갈족,저족,강족,선비족 등 대부분 북방 이민족 정권이다. 북위나 수나라 당나라는 선비족 왕조, 요나라는 거란족 왕조, 원나라는 몽골 왕조, 금과 청나라는 만주(=여진=말갈=읍루=숙신)왕조다. 서방으로 간 투르크 등은 돌궐족 왕조 등 모두 북방 이민족 왕조다. 이이제이가 몽골이나 여진 등 북방 이민족 왕조로 들어서면 역으로 이한제한(以漢制漢) 곧, 한족으로서 한족을 제압한다는 방침으로 바꿔 세웠졌고,이 수법이 적중하여 이들은 쉽게 중원으로 들어가 한족을 지배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반항하면 아예 씨를 말리는 식으로 학살하는 원나라 청나라 초기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놈지도 나오고 얼마 안 있어 차이나에서 유전적으로 한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각 외신들에 발표났음 장강 이북과 이남으로 북방과 남방 민족으로 크게 분류된다고도 했고 기사 검색하면 금방 나옴. 한나라 유방은 흉노에 패하고 그 후 오랫동안 흉노에게 조공을 바쳐가며 지냈고 또 다른 이민족 왕조들이 들어섰을 때는 조공은 고사하고 나라 자체가 없어지고 노예처럼 지배를 받았으면서 어이가 없네. 그래서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발해 등도 자기 것이라 우기고 유적 탐사를 막고 역사공정을 하나. 미래예측학자들은 차이나는 반드시 민족이든 빈부격차든 종교든 어떤 이유로든 분열하게 돼있다고 주장한다. 신장위구르와 티베트,내몽골 등에서 이미 조짐이 나오고 있다. 한족은 허풍과 거짓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른바 '아큐산법(阿Q算法)'이라는 것이다. 아큐가 불량배들에게 두들겨 맞은 뒤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사실은 내가 이긴 거야.' 그리고 아큐는 의기양양하게 걸어간다. 1920년대 한족 지식인들은 노신이 쓴 이 을 읽고 '혹시 내 얘기 하는 것 아닌가'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수치를 모르는 한족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조작하고 세뇌하면 된다.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라고 우기며 정신승리로 자위할 뿐이다. 차이나의 조작과 달리, 남북국시대 반도의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대륙의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다.
한나라의 유방은 오만하게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흉노족은 모돈선우라는 영걸이 나타나 흉노족의 힘이 막강할 때였다. 유방의 30만 대군은 기세좋게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흉노족의 포위에 걸려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포위된 유방은 온갖 뇌물을 다 바치고 앞으로 매년 엄청난 조공을 할 것이며 모돈선우를 황제나라 어버이로 모시고 유방은 신칭을 하기로 했다. 흉노족 일대의 영걸 모돈선우는 이 정전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유방을 풀어 주었다. 그들의 사서는 유방이 모돈선우의 신하가 된 사실을 극구 숨긴다. 그리고 바친 조공도 오랑캐에 대한 하사품이라 왜곡을 하였다.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사상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 송이긴 하지만...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 탕쿠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요나라에는 매년 금 20만냥과 비단 50만필을 서하에게는 금 10만냥과 차 2만근을 보내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명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를 지배하다가 몰락한 몽골족의 기마대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개국시조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최고의 영걸인 영락제가 즉위하고서는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초원에까지 명나라 군대를 진주시켰지만 바람같이 사라지는 몽골기병대를 토벌하지는 못했다. 중기에 들어오면 몽골족이 아니라 투르크계통의 오이라트족 에센 타이지가 몽골초원을 통일했다. 그들은 명나라를 위협하자 이미 나약해빠진 명나라는 이 몽골족에 대해 마시장을 열고 울며 겨자 먹기로 수십만 마리의 몽골말을 비싼 값에 사주었고 몽골의 사신이 오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선물을 안겼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1000명까지 정원으로 하여 오라는 사신이 무려 3000명씩이나 왔다. 명나라는 이 3000명에게 모두 값비싼 선물을 안겼다. 말하자면 돈으로 북방의 평화와 국가안보를 산 셈이다. 그래도 명나라 입장에서 북방에 수십만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비보다 이게 훨씬 싸게 먹혔다.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몽골족 입장에서 중원대륙을 집어삼키지 못할 바에야 목숨걸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명나라를 위협하여 평화적으로 삥을 뜯는게 그 또한 구미에 맞았다. 명나라는 돈으로 명분도 얻고 북방의 국가안보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어떻게 되는가? 몽골의 오이하트 4부의 패자 에센이 임금에게 조공을 바치러 오자 명나라에서 사은품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물자가 부족한 몽골족 입장에서야 하사품이라 하든 뭐라고 치든 재물만 두둑히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결국 명나라의 방대한 사서만 남았다. 몽골이 보잘 것 없으나마 조공품을 들고 명나라에 조공하러 왔을 때 임금께서 은혜로운 마음으로 변방의 오랑캐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게 실제와는 정반대인 그 날들의 황당한 조작된 역사이지만 글자로 남겨진 사서만이 진실이 된다. 1000번을 거짓말해라 그러면 진실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도둑놈의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이것이 진실된 역사이고 이조차 사서는 전부 엉터리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명나라가 몽골족에게 한번 선물을 제대로 안 주다가 서로 충돌이 일어나서 마치 코미디처럼 군사지식이 전혀 없는 조정의 실력자 왕진이라는 환관의 고집으로 몽골족에게 도전할려고 50만대군을 일으키고 그도 왕진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임금이 직접 친정을 하였다가 명나라 왕이 야전에서 생포를 당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토목의 변이다. 우여곡절 끝에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는 다시는 몽골족에게 변변한 저항을 한번 하지 못하고 망할 때까지 비싼 경비를 들여 북방의 평화를 구걸하였다. 하지만 사서는 그래도 명분은 임금이 몽골족에 물품을 하사한 것으로 뻔뻔스럽게 기록을 하였다. 허풍이 심하기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차이나인들의 행태가 결국은 역사상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남아있는 것은 대개 그들의 사서이기 때문이다. 중원대륙과 고구려와의 관계도 이런 식이라 보면 된다. 책봉은 외교적인 일종의 형식일 뿐인데도, 허풍이 세고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차이나인의 사서는 고구려가 마치 그들의 책봉을 받은 변방국가로 조작한 것이다. 이를 보면 동북•서북•서남 등 역사공정이 얼마나 형편없고 잘못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한나라 역시 한민족에게 돈으로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예를 들면 한나라는 고구려와의 경계선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그 곳에 한나라의 물품을 갖다놓고, 고구려로 하여금 그 물품을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린 나머지 물품을 주며 고구려의 침략을 막은 것을 마치 하사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6대 임금인 태조는 자주 한나라를 공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는데 일생을 바친 임금이었다. 태조 때 하도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의 영토와 주민들을 잡아가자 한나라에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 주민을 돌려주면 어른은 비단 48필, 아이는 그 반의 값을 주겠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보면 차이나는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동이족에게 갖은 침탈을 당한 나라였다. 우리 동이족에 비해 군사력이 약해서, 그들은 돈과 물품으로 평화를 살 정도였다.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나라, 이것이 바로 한족 역사의 흐름이고 그들의 실체이다.
@@PrettyT-rex 중국 사서에 동이족을 구이라고 하는데, 구이 중에 우리 민족이 포함되어 있어요. 동이족은 우리 조상 민족입니다. 언어 체계가 화허족과 달라요. 동이족 언어는 퉁구스계입니다. 언어의 근간이 같다는 건 문화인류학적으로 동질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동이족이 만든 한자를 동이족이 공유한 게 문제가 되나요? 한문의 어순은 주나라 이후 주어 동사 목적어로 정립된 거지, 원래는 우리 언어처럼 주어 목적어 동사의 순이었어요. 한자를 여러 민족이 공유하다보니 어순이 혼재되다가 주문왕이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지금의 주어 동사 목적어 순으로 정립한 것입니다.
@@hbkim8195 서양인에는 슬라브족, 게르만족, 켈트족 등이 있음. 그렇다고 영국인이 슬라브족을 자기들 조상이라고는 안함. 서양인에 동이족을, 구이족에 각종 서양종족들을 대입해서 생각해보셈. 동이족 언어는 퉁구스계? =>근거없는 망상ㄴㄴ~언어의 근간이 같다고 누가 그럼?? 비교언어학이 뭔지 아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산동의 동이족과 한반도인은 관련이 없음. 화하족이 산동을 차지하기 전 산동거주민을 동이라 칭했고 나중에 동이를 흡수하자 더 동쪽에 있던 한반도와 일본, 만주의 종족들을 동이라 칭했을 뿐임. 애초에 같은 종족을 칭하던 명칭이 아니래두?
@@PrettyT-rex 한(漢)나라 이후 쓰여진 사서에 나오는 동이는 전국시대까지 중국의 동부지방에서 활약한 ‘동이’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였다. 한(漢)나라 때의 중국인은 변방의 종족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불렸는데, 동이는 바로 동쪽에 있던 종족을 가리킨 말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예(濊) ·맥(貊) ·한(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이족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수십년동안 학자들끼리 논쟁하고 있어요..국내는 주류 역사학자들이 구한말부터 짜여진 내용밖에는 말하지 않고 연구도 하지 않고 있어요...다만 재야 학자들이 연구하시는 것 같은데 아쉽지요...예산을 받아서 연구해야 하는데 ................... 주류가 그런 부류니
동이는 지역을 뜻하는 거지 민족이 아니에요 중국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주변 4방향으로 이민족을 구분했는데 중국의 북동쪽 이민족들 전체를 동이라고 했던 겁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도 물론 동이에 포함되지만 바다 건너 왜와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했던 퉁구스 계열의 민족들 전부 다 동이인데 여기에는 말갈과 돌궐도 포함하고 말갈의 경우 종족 명칭이 이후 여진족으로 바뀌고 청나라를 세울 때는 만주족이 되는데 같은 퉁구스 계인 거란도 마찬가지로 동이에 포함됩니다 만약 진짜 한자가 동이에서 유래했다고 해도 동이로 분류되는 수많은 민족들이 한국인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금은 중국에 속해 있어요 그리고 한자 동이 기원설이 아니더라도 원래 한자라는 건 그 자체로 완성된 문자체계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계속 새로 만들어지는 구조인데 이제 와서 기원을 찾는 건 큰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한자 동이 기원설 주장은 오히려 같잖은 중국인들에게 역공만 당할 겁니다
X 같은 소리하고 있네...중국이 우리 민족 (夷族)의 문자를 월등한 쪽수로 빼았아 간것이다...그래서...현재에 와서는 소위 한자라고 말하는 글자로는 불오나전하기 때문에 점점 어려워 지고 있는 것이다...한국도 마찬가지다 본시 한자(漢字)라는 이름은 없다 진서(眞書)인데 한자로 불리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본시 한국도 이 진서(眞書)와 가림토(훈민정음,한글)을 병행해서 써야만 완벽해 지는데...현재는 완벽하지 안다. 그런데 진서(眞書)를 월등한 쪽수로 빼앗아가서 한자(漢字)로 부르며 한자(漢字)는 어떤가? 21세기에 이정도 인데...아마도 22세기쯤 되면 글자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중국어를 빌려썼다는 한심한 저 여자는 대체 뭐하는 작자임? 로마자를 바탕으로 문자로 쓰고 있는 다른 문화권을 가진 많은 나라들이 영국의 영어를 빌려쓰고 있는거냐? ㅎㅎ 우리 한민족을 비롯한 당시 중국의 주류민족들이 문자로 써온 같은 한자문화권이었다라고 표현해야 맞는 거다.
한글에 대한 2가지 오류! 교수 맞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어이가 없습니다. 1. 한글은 양반들이 환영했습니다. 한자 배우기에 너무나 편리한 도구였습니다. 그당시엔 같은 한자에 대한 발음이 사람마다, 지역마다 다~ 달랐습니다. 한글로 그 발음을 특정함으로써 한자 음이 전국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한글창제 반대상소 때문에 반대가 강한 것처럼 많이들 알고 있으나 '소수의견'입니다. 그당시 최만리의 상소 이외에 한글에 대한 양반, 유생들의 반대가 없었고, 최만리의 주장을 인용하며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현재 이영상에 좋아요가 8900개정도 달렸는데, 싫어요가 1개 달리면, 이영상은 모두가 싫어하는 영상인가요? 오죽하면... 조선후기에 오면, '조선왕조실록'에 요즘 과거합격자들은 어려서 한글 위주로 공부해서 한자 능력이 떨어진다는 한탄도 나옵니다. 2. 글자가 없어서 '중국어'(언어)를 빌어다 쓴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 '문자'인 '한자'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자가 쓰여지던 시기에는 '중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죠!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은 이제 70여년된 나라입니다.
@@PrettyT-rex 님도 참~ 답답합니다! 1. 영상에 '중국어'를 빌려 쓴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한자는 '언어'가 아니고, '문자'입니다. 그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자는 우리가 빌려 온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동아시아에서 쓰던 문자를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쓰고 있었을뿐입니다. 빌려 썼다는 표현을 하려면, 한자가 한국에 도입된 시기 같은 게 있어야죠! 반대로 말하면, 중국인들은 한자를 빌려쓰는 건가요? 그들도 고대부터 쓰던 동아시아 문자를 계속해서 오늘날까지 쓰고 있을뿐입니다. 한자를 누가 만든 것도 아닌데, 그게 중국의 문자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 발상이죠! 뭐...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민족이 맨먼저 한자를 썼다는 주장도 있는 상황입니다. 2. 중국이라는 표현이 오래전부터 쓰인 것은 사실이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에 있는 국가"라는 뜻으로 지금엔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현대에 맞게 고쳐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서국'... 정도? 현대의 중국(옛날 뜻을 그대로 반영)은 '미국'입니다.
@@PrettyT-rex 잘 쳐줘도 겨우 150여년 밖에 안 되었단다. 지나, 차이나가 너희들 정식 국명이야... 최초로 중화, 중국이란 명칭이 등장한 것은 1870년대 였고, 실제로 유통시킨 것은 모택동이 1959년도 부터 밀어 붙였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해서, 줄여서 중공이라고 불렀단다. 나는 지금도 너희를 중국이라고 부르지 않고, 중공이라고 부르고 있지,,, 상호주의원칙에 따라 너희들이 우리를 대한민국민주공화국을 줄여서 대국으로 부르지 않는데, 우리가 너희를 중국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 그냥 중공으로 불러도 되는 데, 미친 넘들이 중국으로 불러 주고, 북경을 베이징, 상해를 상하이로 부른다는 것이 븅신 짓인 거지.. 아무튼 미개하고 야만스런 되놈아... 여기서 이럴것이 아니라... 너희 나라 화장실 문화 좀 고치고 이야기해라.. 아직도 여기저기 아무데서나 똥을 싸지르고, 화장실에는 문도 없이 서로가 보면서 뻘쭘하게 똥오줌을 지린다는 것이 얼마나 미개한 문화니? 중공은 위대한 나라가 아니라 미개한 나라야... 솔직히 소수의 공산당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 가는 것 분노도 안 생기는 거니? 공산당 가족이라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너희들 역사는 그냥 허구야... 공자 새퀴가 자기 민족을 팔아 먹고 뭐 이러쿵 저러쿵 하길래, 진시황의 선조의 사당 문지방에 '虩使蠻夏'란 글귀가 새겨져 있지..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알거야.. 화하족 미개인들은 말로는 쳐 듣지 않으니, 몽둥이로 쳐서 두려움으로 벌벌 떨게하라는 뜻이야~ 그리고 진시황이 권력을 잡은 후에 빡쳐서 분서갱유를 벌인 것이지. 너희들이 차이나라고 한 것도 사실은 우리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너희들이 주워다 자신들의 역사라고 쓰는 것이고... 되놈아 여기서 분탕질 치는 것은 그만 두는 것은 어떻겠니? 나는 너희 중공놈들의 행동들을 보면 진짜 뻔뻔하고, 무식해서 말이 안 나와... 너희들의 억지와 땡깡을 보면 진시황처럼 중공놈들은 虩使蠻夏를 해야만 된다고 봐~~ 그러니 고구려를 침략했던 수나라 군인들을 무기로 죽인 것이 아니라 수만명을 몽둥이로 쳐 죽이고 그 위에 경관을 세웠다는 것 이지... 그래서 너희 되놈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지칭할 때, 거우리방쯔, 몽둥이로 부르고 있어. 너희들은 뜻을 왜곡하여 부르지만 역사적 사실은 몽둥이로 패야만 너희들이 말을 알아 들어 쳐 먹기 때문에 샐긴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이지... .
난 이게 불만이야...실제 고추가 우리에게 전해진건 15세기말인데...그럼 김치가 15세기 말에 생긴거야? 그럼 고추가 전해진 15세기 말전에는 김치가 없었어? 고추가루 없이 김치를 먹은거야...그런데 왜 김치라고 하면 고추가루를 이야기 할까요? 고추가루 들어 가지 안는 김치도 엄청나게 많아요. 고추가루가 들어가지 안는 김치를 외국인들에게 가르켜 주세요...!!!
4:40 여자 분 우리나라의 문자 역사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잘못 소개하고 계시네요. 영어라도 못하면 그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을 텐데 외국인들 더군다나 방송에 대고 저렇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면 어떡하나요. "(한글 창제 이전까지는) 한국인들의 글자는 전혀 없어서 중국어를 빌려 썼다." ("Korean people didn't have ANY letters or words to write (with) so we had to borrow Chinese (letters).")는 건 틀린 얘깁니다. 이두가 있었죠! 한글 창제에도 이두가 도움이 되었을 거고요. 싱가폴은 대부분의 기득권층이 중국인들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이렇게 또 중국인들의 잘못된 우월감을 고취시켜 주네요.
@@PrettyT-rex 우리가 버린 글자를 얻어 쓰는 주제에 고마운 줄도 모르고... 너희들을 발전 시키려면 우선 역사부터 제대로 공부해라... 공산당이 억지로 왜곡한 역사 말고... 우리도 식민사학자들이 왜곡시킨 역사를 바로 잡는데서 부터 진짜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으니 조언할 처지는 못되지만, 너희 되놈들은 의도부터가 글러 먹었으니,,, 쯧```
4:45 먼가 잘못아시는거 같은데요. 세종대왕이 우리글자가 없어서 한글을 만드신게 아닙니다. 한자라 불리우는 글자는 원래 우리민족 계통인 동이족 은나라의 글자였어요 원래는 종교색체가 강한 글자이며 한자는 한나라 한족의 글자란 뜻이 아니구 은하수 글자란 뜻이에요 옥편을 보시면 한이란 글자의 원래뜻은 은하수란 뜻이에요 그래서 한자는 은하수 글자란 뜻인데요 이게 난중에 주객이 전도되어 마치 한나라 한이 원래뜻인거처럼 생각들 하시는거 같은데요 그건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주객이 전도된거에요.... 한자가 한나라 글자 혹은 한족의 글자란 뜻이 아니라 은하수 한이며 은하수 글자란 뜻이란걸 알게되면 왜 우리나라 서울을 관통하는 강을 한강이라 부르고 조선시대 서울을 한양이라 부른지 이해 되는거에요.. 한나라나 대륙한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은하수강 은하수빛이란 뜻이니까요 한강 즉 은하수강이 흐르고 은하수빛이 비추이는 한양이란곳에 북극성을 상징하는 경복궁 근정전을 만들어 놓았던거에요.... 은하수글자 한자는 은나라가 망하구 그게 그냥 대륙에 남아 대륙에 패권이 있었기에 패권 글자가 되고 변방으로 밀려난 우리들은 주객이 전도되며 어느샌가 대륙 패권국의 글자로 인식하며 썼던거 뿐입니다. 한자는 원래 우리의 글자였구 원래 목적인 종교문자여서 그 실용성이 넘 떨어지게 되고 패권이 대륙에 있었기에 한자도 대륙에 맞게 변화되며 우리말과는 너무 괴리가 커지자 세종대왕이 표음문자인 한글을 새로 만드신거에요 대륙이 공산화되었을 초기에 한글을 쓰려다가 그러면 한족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므로 번자체를 만들어 쓰게된 이유인겁니다.. 한자는 그래두 대륙패권국들의 문자로 오래동안 지속도었기에 한족 지분이 잇었던 거죠..
🔍 한자는, 한국인의 조상 동이족이 만든 글자입니다. 🔔 우리가 한자를 중국에서 빌어다 쓴게 아니라 '갑골문자 부터 발전하며 조상 대대로 현재까지 사용해온 우리글자 입니다.' "[다른나라 역사를 토대로 역사 자료를 만들면서 왜곡시켜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한자는 동이족이 만든 우리 조상의 글자이고 상고시대 부터 조선시대 까지 한자를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 조선의 4대 임금이신 세종대왕께서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만드신 뜻대로 한글이 대중화가 되었지만 2023년 현재도 향후에도 세상이 끝날 날까지 한자는 병행하여 사용할 것입니다. 🔍 오히려 중국이, 우리의 조상이 만든 글자를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발전시켜 왔다고 해야 맞습니다. 왜곡된 자료를 만든 것에 심히 유감을 표합니다.
한자는 중국의 글자라고 단정지으면 곤란합니다. 한자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던 문자이고 일부 기록에선 이 한자를 처음 사용한 사람들은 동이족이라고 하며 그 동이족은 바로 우리의 조상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한자는 고대 우리의 조상들이 사용하던 뜻 글자 이고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소리 글자 인 셈입니다. 한자가 중국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문화재와 역사를 다루는 데에서도 같은 오류를 만들어내는 데요. 그것은 중국을 지금의 국경을 기준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고구려시대를 기준을 생각하면 지금의 중국의 상당부분은 우리 선조들의 강역입니다. 따라서 무비판적으로 중국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것인 경우가 많다는 걸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일제는 경복궁을 대단히 싫어했습니다. 경복궁이란 말 뜻 자체가 이 나라가 영원토록 복되고 번영하라는 뜻인데 일본은 경복궁 말 자체를 싫어해서 일제에 의해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 경복궁입니다. 경복궁은 법궁이라 지금으로 치면 정부청사 역할도 했는데 900칸이 넘는 전각들, 즉 경복궁의 90% 이상을 파괴해 버려 경복궁이 지금처럼 휑한 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30% 미만만 복구되었고 앞으로 복구가 다 되도 40%가 안 될 것이라 합니다. 일본에 의해 훼손된 전각중엔 세자가 머물던 전각도 있는데 일제는 그걸 뜯어내 도꾜의 어느 허름한 호텔 식당으로 썼다고 합니다.
글자가 없어서 중국어를 빌어 쓴 것이 아니고, 한문은 동이족이 만든 글자입니다. 동이족의 나라인 은나라의 갑골문, 그 보다 앞선 동이족의 홍산문화(유적)의 골각문자 등이 증거입니다. 올바른 역사를 아셔야합니다. 화하족이 동이족의 문자인 한문을 차용해서 사용 중인 것이고, 우리는 불편한 한문을 버리고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글도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고조선의 가림토문자가 바탕입니다. 훈민정음에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에서 듕귁을 중국으로 해석하고 중국과 달라서 이렇게 말하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조선 때 ‘명, 청’ 시대인데, 그 당시는 중국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원에 있는 나라들과 달라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입니다.
한자가 중국 글자라고 누가 그러던가? 중국학자도 한자는 한국인의 조상 동이족의 글이라한다 한자와 중국어의 형태는 비슷하지만 중국어 문법과 한자의 문법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해서 한문 문장을 현대 중국인들에게 보여주고 무슨 뜻이냐 물어 보면 전혀 답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확실히 알지 못하면 엉뚱한 소리는제발 하지 좀 마라 자신의 조상들이 써왔던 글을 중국글이라고 터무니 없는 소리는 그만 좀 해라 무식하다 소리듣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참 안타까운것은 한자는 우리민족이 만든 우리의 언어인데도 교육 지도자들이라는 사람이 공부를 하지 않고 우리 글이 없어 한자를 빌려다 썼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한심스럽고 통탄 할 입니다. 중국의 석학들과 미국,유럽의 석학들 그리고 우리의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연구로 사실을 밝혀 놓았는데도 우리 스스로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식민사관과 사대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서 벗어 나지를 못햐고 정부당국자,교육부,문체부 그리고 역사 선생들, 언어 교수들 전부 바꿔야 합니다. 정부가 나서서 진실한 우리의 역사를 재 정립해야 합니다.
뭘 어쩌겠다는 .. 역사 자료랑 유물은 중국 일본이 다 움켜지고 있고.. 오히려 고구려 부여 가야사를 증국 일본에 갖다 바지고 있는게 울나라 기득권 세력임... 고조선은 아애 신화 정도로 치부하다가 근거가 나오니 간신히 언급정도 하는거고.. 당장 국립중앙박물관이 하는 것만 봐도 딱 그런 태세임... 뭐 일본 중국이 역사 조작에 쓰는 돈이 천문학적이니, 거기 븥어서 단물 빨아 먹는 인간이 한둘일까요
@@dosa8643 이것도 하나의 주장일 뿐입니다. 식민사학자들의 주장~~ 제가 알고 있는 한은 고춧가루로 담근 김치는 적어도 1천년을 훌쩍 넘어갑니다. 우리가 잘못배운 역사에서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로 도입되었다는 것에서 부터 혼란을 가져 온 것입니다. 그런데 수년 전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 졌습니다. 고추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생하고 있었습니다. 재배한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재배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는 광동 계림 부근에 후백제인들의 후손이 살고 있는 데 그들이 고춧가루로 버무린 김치를 먹고 있더군요. 김치를 팔고 있기도 하구요.참고로 그들은 서기 970년경 후백제 멸망 후 이주한 세대들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은 임진왜란 때 들여 온 고추가 그 동안 조선에서 사용되던 그 어떤 고추보다 기호에 맞아 떨어 진 것이었습니다. 이름도 그 때 고초라고 지었던 것입니다.그러니 고초를 넣은 김치에 대한 기록을 보고 그렇게 추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추를 넣은 것은 새로운 품종의 이야기였지, 실제로 고춧가루를 넣어서 김치를 담근 것은 훨씬 이전이 맞습니다. 적어도 천년은 넘고, 대략 2천년전쯤으로 거슬러 올라 갈 것입니다. 이는 김치연구소에서도 비슷한 논문을 제출하기도 했습니다.우리가 부르는 고초, 즉 고추는 품종을 의미하는 것이지, 새로운 향신료가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적어도 한반도에서 50만년 전부터 고추는 존재했습니다. 그러니 임진왜란 후, 새로운 향신료 고추가 도입된 것이 아닌, 새로운 품종인 고추가 도입되었다고 역사책을 수정해야 합니다. .
팩트: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긴 하나 정도전이 지어서 재수 옮붙었다는 이유로 조선왕들은 대부분 창덕궁에서 기거했고 신년조례나 사신접대에나 사용했다. 그래서 임진왜란때 불타고 1876년까지 방치했다. 그나마 재건한것도 여러차례 화재로 훼손되었고 조선 고종도 별 관심이 없어서 덕수궁을 애용했다. 그나마 남은 전각도 일제가 훼손하기전에 고종이 덕수궁 건축 자재로 쓴다고 반이상 허물었다.
외국인들이 각종 문화재 죄다 공짜 구경 하는 거 넘 싫어 저들 나라에 우리가 가서 보려면 ㅈㄴ 비싼 입장료 내고도 줄 오지게 서서 기다려 가며 봐야 하는데 울 나라 화장실도 공짜 지하철도 무료환승 그거 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데 그것 누리는 것만 해도 배아프구만 굳이 문화재 박물관까지 왜 공짜로 보여주는지 이해불가 울 나라 문화재가 그렇게 돈 주고 볼 가치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