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전투의 지평리가 어딘지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 현재 양평군 지평면입니다. 지평면은 양평군의 중동부에 위치하고 경의중앙선 전철의 동쪽 종점인 지평역이 위치하는 곳이죠~~ 용문과 지평은 서울-홍천 간 국도와 중앙선이 모두 달리고 남서쪽으로 남한강을 끼고 있답니다. 그래서 서쪽으로는 서울, 북동쪽으로는 홍천을 통해 영서북부로, 남동쪽으로는 양동을 거쳐 원주,횡성으로 모두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특히 서울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6번국도와 중앙선 철도가 계속 같이 오다가 이 용문,지평에서 갈라진답니다. 국도는 북동쪽으로 향하고 곧 44번국도로 연계되어 홍천, 신남, 인제, 원통로 향합니다. 반면 철도는 여기서 남동쪽으로 꺾어 양동을 거쳐 원주와 횡성으로 간답니다. 그래서 이 곳은 서울에서 출발해 영서북부와 영서남부로 가는 경로가 분기하는 교통의 요지이죠
계산된 모험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장군으로서 얼마나 훌륭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지표인 것 같습니다. 훌륭한 군인이라면 전쟁에서 어느 정도 모험을 걸 줄 알아야 합니다. 모험 하나 없이 안전빵만을 선택한다는 것은 좋은 기회를 다 날려버리는 것인데 이는 많은 사상자를 내지는 않을지언정 절대 유의한 성과, 공적을 낼 수 없습니다. 반면 risk와 benefit에 대한 과학적인 검토와 계산 하나 없이 모험만 감행하는 것은 적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없이 무작정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와 다를 바가 없죠. 리지웨이는 위험이 너무 클 때에는 안전빵을 택했고 반면 위험에 비해 이득이 확실히 크다고 계산했을 때에는 주저하지 않고 선공을 가했던 훌륭한 장군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평막거리 공장 앞에 있는 중고등학교 안에 미군 기념비가 있어 매년 용산에서 행군으로 와서 행사를 했었는데, 그때 발에 물집 터트리며 집앞에서 잠시 쉬었을때 과자를 얻어 먹었던.... 그리고 땅만 파면 쉽게 탄피나 박격포탄 그리고 집 안뜰에는 비행기에서 투하하는 사람 만한 불발탄도 많았던 기억도 나네요.
지평리는 현재 양평군 중동부에 위치한 지평면에서 가장 중심지입니다. 용문과 지평은 북동쪽으론 홍천으로 가는 길이 이어지고 남동쪽으론 중앙선 열차가 양동을 거쳐 원주로 향합니다. 남서쪽에는 남한강을 접하는데 서쪽으로는 중앙선을 통해 서울로 바로 연결됩니다. 이 때 북서쪽에는 매우 크고 웅장한 용문산이 있는데 이 용문산을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어서 용문산을 먹지 못하는 이상 전선은 남한강-지평리-횡성이 최대 북한계였습니다. 이 지평리를 빼앗기게 되면 홍천, 서울, 원주로 향하는 통로들이 한번에 열리고 전선은 쭉 밀려나 이천-여주-원주 선으로 단번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만큼 지평리를 사수하냐 빼앗기느냐는 안정 전선에 매우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지평리 전투가 그만큼 매우 중요했습니다.
지평면 지제리인데 제가 복무하던 부대의 독립대대 본부가 있던 곳임. 원주 보충대를 거쳐 그곳에서 약 1개월 교육 대기하다가 춘천 원주 인제 박래 속초 강릉의 예하 중대나 소대로 배치받았는데, 저는 속초의 동경사 지원중대에서 복무했습니다. 매월 초에 지평 대대본부로 업무출장을 가서 2~3일씩 머무르는데 당시 갈참들은 심중령님 답사한 근처에서 밭일하는 아주머니들 옆에 가서 일손도 보태주고 빈ㅂ 얻어먹고 그러더라고요. 70년대 말입니다.
프랑스는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국토가 많이 유린당하고 입은 손해가 막심해 종전 이후 국력 회복으로 많이 힘들어했죠. 전후 복구 및 세계질서 재편에서 승전국으로 목소리를 낼 수는 있었지만 그마저도 미국, 영국, 소련에 비해 많이 밀렸습니다. 또 2차대전으로 싸우면서 소홀히 했던 식민지들이 여기저기 독립한다고 난리인 바람에 알제리, 인도차이나 반도 등 군대를 파견해 현지 주민들을 진압시키는 등 정신이 없었답니다. 그 와중에 대대급이라도 머나먼 극동의 한반도에 보낸 것도 대단하죠
2차대전 이후로 체면이 상해 처음에는 프랑스가 못싸우는줄 알고 지휘관들이 꺼렸다고 하죠ㅋㅋ 하지만 6.25때 너무 잘싸워서 명예회복좀 하나 했는데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완벽한 패배를 당하고, 알제리 독립전쟁때는 민간인 학살하는 나치전범 외인부대로 인해 망신중에 ㄱ망신을 당하면서 체면 복구하는데 참 오래걸렸지..... 지금도 프랑스는 잘 못싸운다는 인식이 남아있는 좀 안습한 나라.
딴지는 아니고, 개인적으로 저는 프랑스의 한국파병이 많이 아쉽습니다. 베트남과 알제리등 식민지에서의 전쟁과 2차세계대전의 피해를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유엔상임이사국으로써 1개 사단규모의 병력을 파병한 영국과 더불어 2개사단 정도는 파병해 주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몽클라르 장군 회고록에도 보면 프랑스 정부는 식민지 전쟁으로 국방비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해 자존심 상 상임이사국으로써 당연히 파병을 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대급이 아닌 2개사단 병력을 파병해 줄수만 있었다면 모든 군수지원(무기와 피복, 식량), 심지어 한국으로의 수송까지 미국이 지원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프랑스대대도 미군군복을 착용하고 미제 무기로 전투를 했구요. 한국에 파병된 15개국 중 영연방군(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미제무기와 군복을 입고 전투를 했었습니다. 심지어 태국군과 에티오피아군은 본국에서 가져온 무기의 성능이 좋지 않아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미제 무기로 교육받고 실전에 투입됐었구요.. 또 캐나다 같은 경우는 캐나다 육군병력의 2/3 가량을 한국에 파병하였고(여단규모 약6100명, 물론 캐나다는 주변에 적국이 없었으니 가능했음), 벨기에 같은 경우는 한국에 파병할 대대급 병력(약1000명 모집)을 모집했는데, 지원자가 무려 9000명 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숫자가 오래되서 가물가물 합니다) 물론 프랑스를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프랑스 대대는 한달여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50년 11월29일 도착했는데, 프랑스가 파병 병력을 한참 모집할 시기에 한.미.영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시점이라 연대급을 파병하려 했던 태국, 그리스 처럼 파병후 평화유지만 담당할 것으로 예상되어 대대급으로 축소 시켰을 수도 있지만, 프랑스는 국방비 압박이 문제였다면 모든 군수 지원을 미국이 지원하는 상황에서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
딴지는 아니고, 개인적으로 저는 프랑스의 한국파병이 많이 아쉽습니다. 베트남과 알제리등 식민지에서의 전쟁과 2차세계대전의 피해를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유엔상임이사국으로써 1개 사단규모의 병력을 파병한 영국과 더불어 2개사단 정도는 파병해 주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몽클라르 장군 회고록에도 보면 프랑스 정부는 식민지 전쟁으로 국방비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해 자존심 상 상임이사국으로써 당연히 파병을 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대급이 아닌 2개사단 병력을 파병해 줄수만 있었다면 모든 군수지원(무기와 피복, 식량), 심지어 한국으로의 수송까지 미국이 지원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프랑스대대도 미군군복을 착용하고 미제 무기로 전투를 했구요. 한국에 파병된 15개국 중 영연방군(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미제무기와 군복을 입고 전투를 했었습니다. 심지어 태국군과 에티오피아군은 본국에서 가져온 무기의 성능이 좋지 않아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미제 무기로 교육받고 실전에 투입됐었구요.. 또 캐나다 같은 경우는 캐나다 육군병력의 2/3 가량을 한국에 파병하였고(여단규모 약6100명, 물론 캐나다는 주변에 적국이 없었으니 가능했음), 벨기에 같은 경우는 한국에 파병할 대대급 병력(약1000명 모집)을 모집했는데, 지원자가 무려 9000명 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숫자가 오래되서 가물가물 합니다) 물론 프랑스를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프랑스 대대는 한달여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50년 11월29일 도착했는데, 프랑스가 파병 병력을 한참 모집할 시기에 한.미.영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시점이라 연대급을 파병하려 했던 태국, 그리스 처럼 파병후 평화유지만 담당할 것으로 예상되어 대대급으로 축소 시켰을 수도 있지만, 프랑스는 국방비 압박이 문제였다면 모든 군수 지원을 미국이 지원하는 상황에서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
딴지는 아니고, 개인적으로 저는 프랑스의 한국파병이 많이 아쉽습니다. 베트남과 알제리등 식민지에서의 전쟁과 2차세계대전의 피해를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유엔상임이사국으로써 1개 사단규모의 병력을 파병한 영국과 더불어 2개사단 정도는 파병해 주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몽클라르 장군 회고록에도 보면 프랑스 정부는 식민지 전쟁으로 국방비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해 자존심 상 상임이사국으로써 당연히 파병을 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대급이 아닌 2개사단 병력을 파병해 줄수만 있었다면 모든 군수지원(무기와 피복, 식량), 심지어 한국으로의 수송까지 미국이 지원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프랑스대대도 미군군복을 착용하고 미제 무기로 전투를 했구요. 한국에 파병된 15개국 중 영연방군(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미제무기와 군복을 입고 전투를 했었습니다. 심지어 태국군과 에티오피아군은 본국에서 가져온 무기의 성능이 좋지 않아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미제 무기로 교육받고 실전에 투입됐었구요.. 또 캐나다 같은 경우는 캐나다 육군병력의 2/3 가량을 한국에 파병하였고(여단규모 약6100명, 물론 캐나다는 주변에 적국이 없었으니 가능했음), 벨기에 같은 경우는 한국에 파병할 대대급 병력(약1000명 모집)을 모집했는데, 지원자가 무려 9000명 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숫자가 오래되서 가물가물 합니다) 물론 프랑스를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프랑스 대대는 한달여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50년 11월29일 도착했는데, 프랑스가 파병 병력을 한참 모집할 시기에 한.미.영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시점이라 연대급을 파병하려 했던 태국, 그리스 처럼 파병후 평화유지만 담당할 것으로 예상되어 대대급으로 축소 시켰을 수도 있지만, 프랑스는 국방비 압박이 문제였다면 모든 군수 지원을 미국이 지원하는 상황에서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
50년전 지평면에서 군복무 하면서 3번의 혹한기 훈련 받으면서 3번 모두 영하 25도 밑으로 내려가는 冬將軍의 위엄을 느꼈읍니다 제대하고난뒤 5사단=>20사단=>11사단으로 바뀌는것 지켜 봅니다 남한의 중강진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엄청 추웠읍니다 그당시 마신 막걸리맛은 요즘 막걸리와는 완전 다릅니다 용문면 광탄리에서 버스를 타고 휴가를 나가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지평면까지 전철이 다니는 시절 되었네요 광탄리는 그시절 있던 집이 아직도 그대로 있는것을 봤읍니다 외손자가 지평면 곡수리에서 군복무 중입니다
정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지만 , 이 얘기는 한국전쟁에 관한 얘기이고 이것을 다루고 있는 역전다방에 댓글 안 남길수가 없어서 남기네요. 수원에 출마한 민주당의 김준혁 이라는 인물.. 요즘 온갖 성적인 막말과 비하 언행 논란으로 뉴스에 많이 나오는 김준혁 후보는 오늘 한술 더 떠서 "다부동" 전투는 사실상 국군의 패전이며 실패라고 했으며, 백선엽 장군은 무능해서 전략 전술도 없었고, 미군의 힘으로 겨우 이겼다고 발언해서 또 논란입니다. 그래서 참전용사 단체 등에서도 성명 발표하고 난리네요. 좌우를 떠나서 대체 아직도 이렇게 자유 대한민국과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어떻해서든지 폄하하고 인정을 안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런 인간들은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네요.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재미있고 흥미있게 진행이 되고 있어서 매주 수요일이 기다려집니다. 그런데, 중공군의 개입 이후 한국전쟁 진행과정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1950년 11월 중공군은 개마고원과 낭림산맥 부근 산악지대로 침투해 왔고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군을 상대로 집중공격을 해서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8군이 포진되어 있던 서부전선 전역에서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한국군이 붕괴되면서 전선 전체가 무너지고 유엔군은 전면적인 후퇴를 하게 됩니다. 반면, 동부지역에서는 미 해병사단을 목표로 중공군이 포위공격을 하게 되지만, 미 해병대는 질서있는 후퇴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중공군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 질문은 한국군 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주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한국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이유를 아래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느 것이 맞는지 설명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째 한국군은 미군에 비해 탱크, 야포 등 전투장비가 빈약해서 중공군의 소총과 수류탄 위주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둘째, 한국군은 전투경험이 부족하고 지휘부의 전술지휘능력이 부족해서 중공군의 파상적인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즉, 지휘능력이나 전투능력이 취약했는데, 그에 반해 유엔군 사령부가 과도한 임무를 부여한 측면이 있다. 당시 한국군 역량으로는 보조적인 역할만 수행해야 하는데 과도하게 넒은 지역을 방어하게 하는 바람에 중공군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셋째, 부족한 전투능력을 주변지역 여타 부대와 잘 협조하여 극복해야 하는데 언어적인 한계, 협조체계 미비 등으로 인접한 미군부대 및 공군부대의 도움을 받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넷째, 당시 중공군이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서 한국군에게 엄청난 규모의 숫적 우세로 공격을 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군이 아니라 미군이라도 제대로 대응하기는 어려웠다. 동부전선의 해병대 사례는 해당 부대가 해병사단이었고 스미스 사단장이 제대로 전투지휘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만일 보병사단이었으면 한국군처럼 붕괴될 수도 있었다. 위에서 정리한 사항 중에 어느 것이 더 일리가 있는 건지 알려주시거나 설명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다시한번 역전다방 보면서 정리해봤는데요. 제 생각엔 아무래도 두번째 의견이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 같습니다. 우선 한국군은 미군에 비하면 전투력이 부족했는데 이는 유엔군 뿐만 아니라 중공군도 잘 알고있었습니다. 역전다방 127회 초반에 언급되는 '운산전투 경험에 관한 결론'에 따르면 중공군은 1차 공세 후 한국군의 전투력을 미군의 1/3 이하로 평가했습니다. 아마 이 이후로 한국군을 우선적으로 집중공격하는 전략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합니다. 유엔군도 미군의 주력부대가 중공군을 상대하고 한국군에는 제한적인 임무만 부여하려고 했는데 이조차도 한국군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친 임무부여였다고 생각합니다. 역전다방 127회 초반에 심소령이 한국군이 미군의 우측을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의 국군은 1차 공세에 의한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한국군이 뚤리면 바로 미군의 후방이 노출되어 위험하다, 예비대로 남겨두거나 미군 각각의 군단에 배속했으면 어땠을까?'라고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근본적인 원인으로 유엔군과 중공군의 정보력 차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엔군의 주축이었던 미군은 2차대전 이후로 군축에 의해 정보력이 감소한 상태였고 극동사령부에서 수집한 정보에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역전다방 126회에서 미군의 정보력에 관해서 자세하게 다룹니다.) 반면 중공군은 소련의 지원이나 유엔군 측에서 발행한 신문 등을 통해 적의 작전계획 등의 중요한 정보를 획득하는데 성공합니다.(역전다방 127회 중반에 언론 보도를 통해 작전 계획이 유출되었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은밀한 산악기동 등으로 중공군의 흔적을 지웠고(역전다방 126회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정보력에 대한 차이 때문에 한국군이 중공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빠르게 무너지는 상황이 나오지 않았나 합니다. 결론 : 한국군은 중공군과 정면으로 부딪혔을때 이를 버텨낼 능력이 없었음. 유엔군은 한국군이 중공군을 만나 빠르게 무너지는 상황을 예방 할 능력이 없었음. 중공군은 한국군을 찾아내 집중공격할 능력이 있었음.
한국군 역량자체가 많이 떨어졌었겠죠 당시 침공받을때 기존 병력들 대부분의 다 갈려나갔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장군들이 30대, 장교들 20대초중반이었음 전쟁통에 훈련받아봐야 얼마나 제대로 받았겟어요 그냥 병력모집해서 편성하고 간단한 교육후 전장투입하고 했겠죠 그러다보니 또 갈리고 일반병력뿐 아니라 지회관들도 죽어나가고 또 없는 형편에 지휘관들 새롭게 임명해야하고 악순환의 반복 그러는중에 유엔군의 도움으로 북쪽까지 밀고 갔었고 당시 패잔병수준의 북한군을 밀고 올라갈 정도는 되었지만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잘 조련된 중공군을 감당할 능력은 없었던거죠 화력은 논외로 하더라도 급조되다시피한 당시 국군들이 밀리기 시작할때 조직력을 갖추고 후퇴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거라곤 생각하기 힘듬 그리고 당시 유엔사령부에선 중공군이 참전을 본격적으로 할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능력에 비해 과도한 임무를 부여했다라고하는건 안맞다고 생각함 중공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그대로 통일되고 전쟁은 끝났을 테니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을 했고 직접 부딫히기전까지도 그걸 몰랐었던거고 예상하지 못했던 재난(중공군의 참전)에 의해 그 재난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국군이 지리멸렬했었다고 봄 반면 미군은 그 재난을 감당할 능력이 되었기에 조직적인 후퇴를 할 수가 있었던거였겠죠
짤막하게 답변드리면 한국군은 창설된지 몇년 안되는 신생군대였고, 지휘관들도 대부분 20대중후반에서 30대초반에 연대장, 사단장들을 했습니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도 6.25당시 35세 였고, 일본군 소령출신 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국군 지휘관들은 대대급 이상을 지휘해본 지휘관도 몇명 없었고, 사단 병력도 미군의 1만명 이상 단위가 아니라, 약 7000~8000명 정도 였습니다. 또 국군 사단의 야포를 포함한 장비도 미군 사단의 대략 8~10분의 1 수준이었고, 국군 포병도 미공수부대가 수송기로 낙하할때 사용한 경량의 105mm 곡사포 였습니다. 그리고 국군 병력중 상당수의 베테랑 병사들은 중공군 참전 전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징집병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전선의 급박한 상황때문에 충분한 훈련을 받지못하고 각 사단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중공군이 화력도 미군에 비해 현저히 약하고, 훈련도 안된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던것 입니다. 하지만 모든 국군사단이 형편 없진 않았고, 백선엽 장군의 국군1사단은 미군들과 협조해 미군전차부대와 포병대도 배속받아 그나마 잘 싸웠는데, 이는 백선엽 장군이 영어를 할줄 알아 미군들과 소통이 되었고, 미군들도 백선엽의 국군1사단은 인정하는 사단이었습니다.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고 싶지만 다음 기회에 하겠습니다. 참고로 미군을 제외한 유엔군 중에서는 터키군, 영연방군(특히 호주군), 프랑스군, 에티오피아군의 전투력이 괜찮았고, 특히 에티오피아군은 포로가 한명도 없었고, 영국군은 포탄이 빗발치는 전투중에도 티타임을 꼭 지켰다고 하며, 필리핀군은 엄청 지저분한 포로수용소에서도 타 유엔군 병사들과 달리 잘 적응하며 지냈다고 하며, 터키군 포로들은 공산군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오로지 종교적 신념 하나만으로 이를 다 극복하고 공산측으로 넘어간 병사가 한명도 없었답니다.
야사에는 원형방어 진지 전술을 프리먼 대령이 아닌 몽클라르 장군이 생각해 낸 전술을 프리먼이 받아들였다는 얘기도 있던데.. 방송내용 처럼 미군 장군들도 몽클라르 장군을 어려워해 프랑스 대대에게 위험한 임무를 잘 시키지 않았지만, 장군이 한국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잠시 프랑스에 가 있을때 중령계급의 다른 프랑스 대대장이 잠시 부대를 지휘하면 미군들이 위험하거나 고된 일을 많이 시켰다고 프랑스군 회고록에 나오더군요.. 또 다른 에피소드는 전투 중 프랑스군에게 배치된 글라이더가 있었는데, 이곳에 중공군의 박격포탄이 떨어지니까 프랑스군 병사 들이 목숨을 걸고 그 글라더이를 다른곳으로 옮겼는데, 그 장면을 본 미군 장교들이 기겁을 했답니다. 물자가 풍부했던 미군병사들 같았으면 몸부터 피하는데 프랑스군은 물자가 귀해 그럴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전쟁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특히 2차대전,태평양전쟁을 많이들 알고 있지만 6.25에 많은 헌신과 영웅이 있어 영화,드라마 소재의 블루오션이다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에 호기심이 았었을뿐 625의 아무개 병사,소대장등 의 활약이 더 궁금한데 배달의기수류 같은 단순 공산당을 물리치는 전개가 아닌 전략과 전술 ,정치적인 배경이 펼쳐지고 약간의 영웅담과 저 멀리서 달려온 타국군의 공조내용이 담겨진 드라마가 나와주길 바랍니다~
양평이란..지명이 양동과 지평에서 한글자씩 따서 만들어진 이름인데요. 옛날에는 지평이란 지명이 훨씬 유명했다고 해요. 지평막걸리 다들 아시죠. 거기 양조장이 6.25때도 사령부 로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지평면주민센터에 가면 입구에 수통, 철모 등 상시 전시를 해놓았더라구요. 지평역도 있으니 다들 한번 가보시죠^^
경의중앙선 전철의 동쪽 종점인 지평역이 위치하는 곳이죠~~ 용문과 지평은 서울-홍천 간 국도와 중앙선이 모두 달리고 남서쪽으로 남한강을 끼고 있답니다. 그래서 서쪽으로는 서울, 북동쪽으로는 홍천을 통해 영서북부로, 남동쪽으로는 양동을 거쳐 원주,횡성으로 모두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