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가 몽골군에 의해 파괴당하고 불타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면, 정말 그 모습이 웅대하고 화려했을 것이다. 특히나 황룡사 9층탑은 국보중의 국보로 인정되었을 것.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다. 침략전쟁을 통해 너무나도 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니, 마음이 아프다.
어떻거든 모형을 만들었네요. 황료사터에 흔적은 어릴 때 직접 보았지요. 허물어진 모습과 안압지 흔적 지금은 안압지는 복원이 조금은 된 것으로 알아요. 우리 시대에 목탄도 정성이니 최대한도로 주춧돌에 올려 보는 것도 의미 있지요. 꼭 우리끼리 아니어도 정성이 확실하면 괜찮을듯 한데요.
9층 목탑은 곡 국내에서 생산되는 금강송을 쓰지 않고 히말라야에 있는 좋은 목재 많아요. 그걸 쓰면 안되나요. 또한 기술도 네팔에 목수들 요즈음 국내 사찰 잘 보수하고 있다고 알아요. 국내 우리만 주장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복원에 재료는 좋은 재료라면 더 좋지 않아요. 또한 신라 지배층이 우리 한반도 분들이 아니라는 사료도 많은데. 금관 황금보검 화랑 성골 진골.등 골품제도도 밖에서 들어온 제도로 보던데. 넓찍하게 히말라야 고산에 마무 좋은 것 많아요. 몇 백년된 금강송은 존재가치가 없는 이 땅에서 무슨 수로 재료를 구할 수가 없는데. 편의가 아니리 신라 지배층이 밖에 분들이라고 하는데. 이 방법도 생각해 볼만 해요.
1000년 수도 경주 황룡사지 9층 목탑이 남아있었다면 국보 1호는 숭례문이 아니라 세계 최대규모 목탑 황롱사지 9층 목탑이었겠지. 비용도 많이들고 자료도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황룡사지 9층 목탑은 복원했으면 좋겠다. 한반도 역사의 대표적 건축물인데 여러가지 이유로 복원이 어렵다면 홀로그램으로라도 복원했으면 좋겠네
이밖에도 고구려 청알리 사지 목탑(80~90미터 이상?), 고구려 정릉사 목탑(60~70미터), 고려 보제사 목탑(60~70미터?). 백제 미륵사(60~70미터?), 백제 능사 5층목탑(38미터)신라 실상사 목탑(80~90미터?) 백제 왕궁리사 목탑(70~80미터?)등등 우리나라도 중국 못지 않게 마천루에 준하는 목탑 많았습니다. 현재 중국은 60~70미터 높이의 목탑을 3채나 보존하고 있는게 부러울 따름이네요. 하지만 황룡사는 그 규모와 외형을 거의 정확히 알고있고, 유구한 유적과 객관적인 자료들도 많이 발견되었으며 그 가치와 사실성도 인정되었고, 조금만 더 정확히 보완한다면 복원 가능하다 봅니다. 원래 목탑은 옛날에도 수리하거나 재건하는경우 많았습니다. 오늘날이라고 불가능한건 아니죠. 저도 언젠간 황룡사 목탑도 우리곁에 돌아와주실 기원합니다
저도 제발 황룡사와 황룡사9층목탑의 복원된 모습을 다시 볼수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황룡사 역사문화관 전화해서 물어보니 문이랑 회랑(벽)은 그나마 복원가능한데 금당이나 9층목탑은 정확한 자료가 없으니 힘들다네요..... 100퍼 정확한 자료가 없으면 문화재복원은 할수가 없다면서.....
그래도 대충~~이정도 하지않을까? 하고 모형내놓은거지 석학이나 교수진도 황룡사는 자료가 더 복구되기 전까진 도면도 없거니와 자료도 남아있질 않아 지금 복원하게 되면 완전 잘못된 복원할 가능성이있어 현재까지 불가 그냥 국민들이 원하기도하고 이슈가 많이되고 마케팅적인 홍보도 해야하는 판이라 보라는 용도에서 짜집기로 어떻게든 모델링 나온거지 정확한 모델은 학계에서도 알수가 없어서 복원을 한다면 사기행각이나 마찬가지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 여러자료가 돌아오고 단서가 될만한 제대로된 고증이 찾아지면 차후에 제대로 복원해야할 사업
@@이관호-f7t그도 그럴게 조선은 중국명나라를 찬양하다못해 신처럼 섬기며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명나라의 제후국임. 그러니까 궁궐을 지어도 상국으로 섬기던 중국궁궐만큼 크게 지으려안하죠. 신라는 일단 중국당나라에게 조공도 바치고 눈치도 보긴봤지만 정식적인 제후국까지 아니었던지라. 나중에 당나라가 뒤통수치고 한반도땅 다 먹으려하자 지켜내려고 당나라와 맞서싸운거보면 알다시피 당나라에게 조선만큼 도가 지나친 사대를 한 나라는 아님. 그러니 당연한거죠. 사실 황룡사도 원래는 사찰이 아닌 전성기시절 신라의 궁궐이 되야했던 건물인지라 사대주의에 찌든 제후속국이었던 조선궁궐보다 큰게 당연한거에요.
1976년부터 10년간 황룡사지 발굴조사가 진행된 과정에서 이 목탑지도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목탑지는 발굴 이전부터 금당지(金堂址)와 같이 기단 상면에 초석이 드러나 있어 규모와 초석의 배치형식을 알 수 있었다. 이 탑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593년 동안 여섯 차례 중수되는 등 호국성보(護國聖寶)로 숭앙을 받아왔다. 또한, 이 탑은 우리 나라 최초의 목탑양식을 알 수 있는 것으로, 황룡사지와 더불어 사찰 및 목탑의 규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앞면과 옆면은 모두 7칸의 평면형식이었고, 건물내부는 외진주(外陣柱 : 겉에 내보이지 않게 된 기둥)초석 배치와 같은 주열상(柱列上)에 모두 초석이 배치되어 있어, 심초석(心礎石)을 중심으로 4천주(四天柱)초석ㆍ제1내진초석ㆍ제2내진초석ㆍ외진주초석의 순으로 초석들이 놓여 있었다. 현재 외두리기둥 초석은 모두 28개이고, 안두리기둥 초석은 모두 36개로, 기단상에는 총 64개의 초석과 하나의 심초석이 놓여 있다. 평면 4각형의 탑 자리에는 기둥이 놓였던 주춧돌만 남아 있다. 14년(서기 553) 봄 2월, 임금이 담당관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 빛 용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절로 고쳐 짓고서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황룡사는 1238년 몽골제국이 침공했을 때(제3차 여몽전쟁) 불탔다. 고려 문인 김극기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서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다. 9층탑은 절반 이상의 높이가 7보(42자), 그 이하가 30보 3자(183자)이다. 총 225자다. "층계로 된 사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강과 일천 산이 한눈에 바라보이네. 내 몸은 노오가 오르내린 바깥에 나왔고, 내 눈은 수해가 오가던 가운데를 삼키네. 성사의 그림자는 처마 앞에 비처럼 떨어지고, 월계수 향기는 난간 밑 바람에 나부끼네. 굽어보니 동도(東都)에 수없이 많은 집들,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삼국유사'에서 설명한 '칠처가람지허'는 다음과 같다.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흥륜사(興輪寺) 삼천기(三川歧): 영흥사(永興寺) 용궁(龍宮) 남쪽: 황룡사(皇龍寺) 용궁 북쪽: 분황사(芬皇寺) 사천미(沙川尾): 영묘사(靈妙寺) 신유림(神遊林): 사천왕사(四天王寺) 서청전(婿請田): 담엄사(曇嚴寺)
황룡사 구층 목탑 재건 하면 될텐데요ㆍ어차피 멋있고 높은 탑 더 지어야지 한국 다른 아시아 국 탑이나 성 에비해 잘못 하면 너무 뒤진다는 소리 들을듯 하게 규모가 작아요ㆍ 너무기술좋아 잘짓는 한국인이 멋있고 근사한 건축물 더 지어야 합니다ㆍ좀 더 웅장하고 예쁘고 새롭게요ㅡ한국은 그런데 멋있고예쁜 성이 없잖아요ㆍ옛돌궐 오스만ㆍ흉노ㆍ가 유라시아에서 멋진 건축 지었는데 한국은 얼마 없다는게 한탄스럽구 디자인 색ㆍ다양하게 충분히 더 지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ㆍ경복궁도 더 멋있게 증축하구요ㅡ베르사유궁전 처럼요ㆍ크렘린궁이나요ㆍ대조선 이화원같은 하얀궁전도 예쁘구요ㆍ
전세계 사람들이 볼수 있게 영어 자막 좀 달아요. 말로만 한국 문화 세계화 외치지 말고 외국인들이 볼수 있게 해야 세계화가 되지 않겠어요? 아직도 이러니 외국 나가면 북한 밖에 모르는 사람 천지. KBS. 국영 방송 답게 일 제대로 좀 해봐요. 국민들 한테 수신료 삥 그만 뜯고. 수신료에 광고에 뭐 하는 건지. 국민들이 봉이야 ?
말도 안됩니다... 당나라힘 안빌리고서 자기들 힘만가지곤 겨우 백제 하나 막지못해서 하루아침에 낙동강변에 40개성 다 따먹히고 수도까지 유린당할뻔했던 신라가 어떻게 세계를 정복할뻔했던 원나라(몽고)를 이김... 백제랑 고구려 멸망후 한반도 다 삼키려는 7세기아시아최강국 중국당나라상대로 신라가 이길수 있던것도, 당나라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한 토번상대로 고전중이었기때문에, 당나라가 토번에 전력을 투입해야해서 운좋게 이길수있던거임. 신라가 강해서 당나라 이긴게 아녜요.
미륵사나 흥왕사의 예를보면 그건 맞는듯요. 백제에서 신라의 황룡사 위치에 있던 미륵사랑 고려에서 신라의 황룡사 위치에 있던 흥왕사 모두 몽고의 침입때 파괴당하지 않았지만 결국 조선시대때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재산도 다 뺏기고 나라에서 돈도 안대주니... 목조건물은 유지하는데 돈이 많이들어서 계속 보수공사해줘야하는데 숭유억불 정책으로 그렇게되서 결국 건물유지할 돈도 없으니 미륵사도 흥왕사도 모두 조선시대때 폐사되고 말았고 황룡사처럼 터만 남아있죠. 황룡사가 그때 불타지않고 남았어도 조선시대때 지독한 숭유억불 시대에서 무사하긴 힘들었을거같아요.
현재 시점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전 그시대 시점으로 생각해보자 (소)반도 땅에 드넓은 초원이 있냐 평야가 있냐 지금도 70%이상이 삼림지대인데 당시엔 훨씬 열악해서 인구도 얼마 없을 터인데 뭐 먹을게 있다고 수당때 백만 병력이 쳐들어왔을까 애초에 소반도 땅에서은 나라가 형성될 조건이 안됐다 전부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