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진짜 사랑스럽네요 ❤ 물론 저 어린 나이때는 그럴수 있지만ㅋㅋㅋㅋㅋㅋㅋ 자식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고 자라기 때문에 영상만으로도 화목한 가정인걸 알수 있는거 같네요 ㅎㅎ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고,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이 영상은 흑역사로 남을수도 있을겁니다 😂👏👏
그냥 너무너무 귀여운 영상이네요 오빠는 이미 좀 크고서 이런 애정 가득한 동생의 행동에 부끄러워서 동생이 우는데도 쿨하게 아무말도 안하고 있는 것도 웃기고 그냥 변한 오빠에게 서운해서 울고불고 하는 동생도 너무 귀엽네요 너무 사랑스러워요 아마 몇년 뒤면 동생도 표현이 점점 줄테니 오빠가 오히려 더 서운해하는거 아닌가 몰라요~
저도 8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동생은 매번 저한테만 안기길 원했고 제가 업어 주길 바라고 잘때도 매번 같이 자길 원했죠. 항상 저만 졸졸 따라다니고요. 제가 공부, 시험공부던 수능 공부를 할때도 항상 제 방에 들어와 제 품에 있으려고 했죠. 부모님이 말려도 요지부동, 억지로 띠어내면 눈물 바다, 영상이 여자 아이처럼 울며 "오빠랑 있고 싶어, 오빠가 좋아 ' 하곤 했죠. 하는수 없이 동생 안고 공부하곤 했습니다. 저랑 떨어지는걸 엄청 싫어했습니다. 부모님보다도 제 품에 있길 더 원했고요. 유일한 동생이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보니 저도 어릴때지만 엄청 좋아했고 아기때부터 제가 항상 돌봐주고 같이 있어줬거든요. 한참 수능 시험이 가까워 질때도 집중해서 늦게까지 공부해야하는데 동생이 제 옆에 의자를 나란히 붙히고 같이 있으려고 했죠. 문제는 항상 제 팔에 기대서 있다는거. 이때 동생은 11살 이였지만 여전히 저랑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죠. 형편이 좋지 않아 밤늦게까지 맞벌이 하시던 부모님 사정상 아기때 부터 항상 제가 돌봐주고 업어주고 놀아주고 밥도 안고 먹여주고 해서 아마 제 품이 참 편안한듯합니다. 고2 때까지도 친구들과 시간 보낸 적은 별로 없고 항상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와서 동생을 돌봐주고 같이 놀곤 했죠. 항상 단둘이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거죠. 수능 시험 전날 밤 부모님이 오빠 내일 중요한 시험이니 오빠 방해안되게 혼자 자게 두자고 해도 고집 피워서 결국 제 팔배개를 비고 같이 잤죠. 이랬던 동생이 중학교 올라가면서부터는 좀 변하더군요. 그래도 중1 1학기까지는 저랑 분식집도 가고 같이 티비도 보고 산책도 가자고 하곤 했는데 2학기 쯤 부터는 저랑 함께 하자고 하지 않더라고요. 이야기도 거의 안하고. 저보다는 친구들과 노는게 더 재밋고 즐거워 졌던거죠. 가끔식 나만 바라보던 동생이 생각나 가까이 다가가면 옆에 붙혀주지도 않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23살 대학교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갔습니다. imf 영향으로 집안 형편이 여유 있지 않은 상황에 그전까지 받던 전액 장학금을 학교 정책 바껴 받기 어려워져 휴학을 하고 자원 입대를 신청해서 가게되었죠. 그당시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건 그게 최선이였죠. 입도 하나 줄이고 하면 집 사정은 좀더 나아 질거 같아서 입영 통지서를 받고 군대 갈 날짜가 정해졌을때도 동생은 군대가 뭔지 잘 몰랐었던지 그냥 그런가보다 했고 입대 당일날 아침 등교 하려는 동생에게 오빠 오늘 군대 간다 하니 "응 잘다녀와 "하곤 집앞에서 기다리던 친구에게 뛰어가더군요. 그 뒷모습에 걱정이 많이 되더군요. 부모님과 떨어지는건 걱정이 안되었지만 동생을 혼자 두고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입대후 자대 배치를 남해 섬으로 감시장비병으로 갔습니다. 서울에서 너무 멀어 오고 가기도 힘들고 한번 왔다갔다 하는데 차비등 많이 들고해서 100일 휴가는 물론 정기 휴가 외박 모두 반납하였습니다. 부대장님께 사정 부탁드려서, 한번도 군생활 동안 휴가를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모님 면회도 오시지 말라고 했고요. 비용도 들고 또 오시려면 일을 쉬고 오셔야해서 걱정 말라고 하고는 오시지 말라 했습니다. 연락은 보통 편지를 통해서 했고. 통화는 딱 자대 배치 받은날 1번 그리고 명절때 당일날 한번씩만 정도 했죠. 이상하게 매번 전화하면 여동생은 저랑은 통화를 하지 않았죠. 편지도 한통도 안보내고. 왜 전화도 못하냐 하시겠지만 당시 제 월급이 야간특수수당까지 해서 홀수달 2만4천원, 짝수달 3만7천 몇백원 정도였습니다. 저는 첫 월급부터 이돈 하나도 안쓰고 매번 편지봉투에 담아 동생에게 보내줬죠. 먹고 싶은것도 많고 사고 싶은것도 많은 나이일텐데 용돈도 충분하지 않은 동생이 걱정되어 매달 월급을 받으면 바로 보냈죠. 우표 살 돈만 빼고. 그렇게 3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군생활 하고 제대후 집에가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여는데 여동생이 현관 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제품에 안기더군요. 그리고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하염없이 큰소리로 울더라고요. 계속 한참을. 동생을 달래고 집안으로 들어가 부모님께 전역 신고를 하고 절을 하고나니 동생이 방에서 라면박스 하나를 가져오더군요. 뭐냐고 하니 오빠 꺼라며 주길래 열어보니 그동안 제가 동생에게 보낸 제 월급 편지 봉투가 돈은 다 그대로인체 있더구요. "오빠 군대가는 날 배웅도 못해서 미안해. 나는 오빠가 군대가도 자주 볼수 있을줄 알았어 오빠가 월급 안쓰고 나 준거 알아. 이거 오빠 복학할때 등록금 낼때 써" 이러면서 주더군요. 마냥 아기 같던 동생이 오빠 없이도 여전히 착하게 잘 자라 줘서 너무 고맙더군요. 그렇게 우린 예전처럼 다시 다정한 오누이 사이가 되었고. 졸업하고 취업해서 여동생 대학도 보내고 시집갈때는 내가 해주고 싶은 만큼 혼수도 해줘서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에미국ㅇ서 참 뿌듯한 일들이였습니다. 쓰다보니 엄청 긴 글이 되었네요. 위영상에 여동생 생각 많이나서 저도모르게....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가서 자주는 못 만나지만 매일 같이 하루에 한번씩은 꼭 영상통화로 내 안부를 묻는 내 여동생. 혹시라도 이 글을 볼지 모르지만. 오빠가 하루 빨리 건강 회복해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동생 만나러 갈테니 걱정말고 조금만 기다리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