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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게놈 분석)으로 밝히는 동북아시아인 한국인의 기원과 형성 - 외국과의 협업을 포함한 국내의 연구들을 중심으로 

History Genome &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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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연구로 한국인집단이 남방혈통과 북방혈통의 혼합으로 생성되었고, 북중국이나 요서의 선사인과 가장 가까운 친연관계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발표에서는 국내와 국내외 협업으로 이루어진 한국인의 기원과 이동에 대한 연구를 분석하여 고고학, 문헌사학과 연결하여 그 의미를 정리하고, 성과 및 한계를 살펴보았다.
#유전학 #분자인류학 #한국인기원 #가야인 #가야인유전자 #Y-염색체 #mtDNA #대성동고분 #김해패총 #삼국시대 #한국인 #한국인집단 #O2b #O2b1 #북방계 #남방계 #악마문동굴 #밧콤노우인 #하플로타입 #하플로그룹 #f4테스트 #PCR #주성분분석 #HUGO #아시아인간게놈연구회 #SNP #동남아인 #동북아인 #북중국인 #한족 #일본인 #요서혈통 #조몬혈통 #아미 #킨 #야쿠트 #코랴크 #온지 #믹스 #요루바 #티엔위엔 #묘자구 #소고 #아무르 #비엔비엔 #요하고스트 #양자강고스트 #황하고스트 #요하문명 #고고학 #문헌사학 #홍익재단 #박종화 #김욱 #진한준 #이홍구 #Martine Robbe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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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окт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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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ментарии : 47   
@네이버블로거.파이코
@네이버블로거.파이코 Месяц назад
고맙습니다 💯 🍉
@정재성-c1l
@정재성-c1l Год назад
북중국한족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한족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제대로 되 한족은 그 시원이 하화족이어야 하는데 북중국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남북조시대 북조권역에 해당되는 선비족등이 해당되는데 이들이 결국 남조를 정복하고 수당을 건국하죠. 그러니 북조사람들은 원래 북방계 민족이었습니다.
@zzangggola943
@zzangggola943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애당초 한족이란 말은 공산당에 의해 20세기에 만들어진 정치적 용어입니다. 19세기까지도 한족이라 칭하는 집단은 없었습니다. 원래는 화족이라고 부르는게 그나마 맞음..유튜브등에서 중공인들보면 태국,베트남과 구분안되는 자들이있는데..그게 원래의 중국인(화족) 생김새죠, 근데 중공한족들이 자꾸 한국인과 똑같이생긴(실제로는 만주족) 북방계 중국인이 원래의 순혈 중국인 이었던것처럼 세계에 속이는 경우가 많음..
@KenC-t4e
@KenC-t4e 11 месяцев назад
중국인은 각지역마다 dna가 다른데 중국인으로 통칭하는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Dna에서 중국인끼리는 북부 남부는 차이가 매우 크겠죠.
@solbarambombi
@solbarambombi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중국의 북방계와 한국인들이 연관이 있다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요서지역이 고조선의 초기의 강역이었으니까요. 이 자료에선 요서를 "중국"이라 하지 않으니 다행입니다. 언어가 다른 것은 그동안 중국을 침략했던 거의 모든 북방계들이 한화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만일 역사적 기록이 없다면, 남미에서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쓰는 것도 수수께끼일 것입니다. 언어가 늘 혈통과 일치하지 않으니까요. 혈통이 비슷한 족속들끼리 싸움은 더 많이 하고 사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귀중한 자료, 해설에 감사드립니다. 언젠가는 북한 동포들도 포함된 민족 전체가 분석될 수 있길 고대해 봅니다.
@정재성-c1l
@정재성-c1l Год наза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떻게 후남방계가 그시기가 대규모로 한반도로 북상할수 있슬까요? 남방에서 유입하려고 한다면 빙하기 시대에 서해가 아직 육지상태였고 그에 따라 장강하류에서 제주도로 육지로 이어진 상황에서라면 남방계의 대거 유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빙하기가 끝난이후부터 각 지역별 인종의 기본베이스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islandtree7577
@islandtree7577 Год наза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남방계가 한반도로 이주하기전 중국 동부 해안을 따라서 이미 북상해 왔었다는 것은 생각 안하나요?
@정재성-c1l
@정재성-c1l Год назад
@@islandtree7577 바로 그러한 이주가 빙하기 시대 적어도 2~3만년전이전에 들어온 이주민들로 봅니다.
@정재성-c1l
@정재성-c1l Год назад
우선 북방계니 남방계니 하는 분류방식 개념에 대해서 재구성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남쪽 동남아 및 중국에서 들어왔스면 남방계이고 시베리아 만주등에서 들어왔스면 북방계라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했는데 그런 구분개념을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islandtree7577
@islandtree7577 Год назад
단순히 이주경로가 아니라, 외형적 ( 키, 몸매, 두개골 형상등 ) 특징으로도 구분됨. 즉 민족,부족의 이동을 세세하게 특정 짓는 것은 어렵지만 큰 집단에 대해서는 유전자 정보 (외모로도 나타나는 특질)로 추적 가능해요. 특정 유전자 집단이 북쪽에 주로 살면 북방계, 특정 유전자 집단이 남쪽에 주로 살면 남방계.. 유전자 분석에는 당연히 현대인 뿐 아니라 고분에서 발견된 고대인들의 유골도 포함됨.
@realsjseng
@realsjseng 2 года назад
국경이 확실하게 생기기전에는 이주가 활발했을것 북방유목민은 태초에 많이 내려왔고 중국에서 대규모 이주도 있었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대규모 이주도 생김새가 한중일 비슷한것도 피가 서로 섞임 일본에 가보면 확실히 남방계라고 할수있는 사람이 많고 그건 그나마 섬나라라서 이주가 적었음 주로 한국에서 이주
@금연하자-g6m
@금연하자-g6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이걸 보면서 느끼는건 일본의 왜는 가야인일거라는 생각에 확신을 주는 영상이군요.
@KJ11-DAFS
@KJ11-DAFS Год назад
한국인이 중국인에서 갈라져 나왔다면...겨우 3900년가지고 말의 어순부터가 다른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어순에서 부터 같습니다. 동남아인들도 우리와 어순이 같은 집단은 소수입니다. 거기다.. 한국인은 암내가 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게 중국인과 일본인보다 비율이 더 적은데.. 이건 또 어떻게 된건지 설명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체형부터가 중국인과 한국인이 다릅니다. 중국인은 여자들의 경우 골반이 큰데 반해.. 한국여자들은 확연히 비교가 될 정도로 중국인에 비해 골반이 작습니다.
@yisewon
@yisewon Год назад
분자인류학의 고대인의 유골샘플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분자인류학은 학설을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하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doom9344
@doom9344 Год назад
한국인의 말은 가야시기 남방계 해양문화 벼농사 문명(인도 타갈로)이 한국에 정착하면서 신라를 거쳐 벼농사가 국가의 근간산업이 되면서 퍼진거임. 벼농사 언어는 타갈로 언어와 같고, 전쟁관련 단어는 북방계와 같음. 가야의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 여왕.
@solbarambombi
@solbarambombi 9 месяцев назад
기사에 한국인이 중국인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말은 없는 것 같은데요. 한중일의 공동조상에서 중국인이 먼저 갈라저 나갔다고 봤고, 그 이후에 한국인, 이리고 다시 일본인이 생겨났다고...
@zzangggola943
@zzangggola943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중국인은 유목민,고대한민족계 인종이 퍼져살다가 동남아 화하족등과 혼합된게 중국북부죠...한국인의 암내나는(조사지역 대구) 유전자는 제로입니다. 제로와 약간이라도 나는것은 하늘과 땅차이 입니다.
@KJ11-DAFS
@KJ11-DAFS 8 месяцев назад
@@doom9344 중국인과 한국인이 공동의 조상이 있다는것 자체가 증명이 된게 없습니다. 애당초 황인종이 언제 어떻게 생겨난건지, 백인종은 어떻게 생겨난건지, 확립된것이 없고, 과연 한,중,일 공동의 조상이 존재하는지도 증거가 없습니다. 중국인과 한국인은 같은 황인종이라는 것 외에는 유전자상 공통점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류전체가 아프리카 기원인 만큼 인류자체가 차이가 적습니다. 그리고 중국인과는 언어와 문화자체가 한국인과 너무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공통의 조상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억지입니다. 중국인이라는 것 자체도 현대 중국에 사는 다민족을 포함한 개념입니다. 중국은 단일 민족도 아니고, 같은 한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서로 언어가 전혀 다릅니다. 이런 다민족 국가 사람들을 혈통으로 엮게 되면, 그 유전적 다양성이 막대해지고, 중국인 안에 만주족, 거란족, 각종 유목민이 섞여 있고, 이들은 한민족과 사촌지간인 민족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한족의 경우는 한국인과 연결점이 없습니다. 이래저래 작은 차이로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둬야 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것은 한국인은 중앙아시아와 만주에 사는 민족들과 DNA가 유사하다는것, 중국 한족과는 DNA가 다르다는 것. 한국인의 DNA로 보건데, 만주일대와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했을 가능성이 크다는것. 그리고 일본인은 한반도에서 2000년전 일본열도로 넘어간 사람들이라는것. 따라서, 일본인과 한국인은 혈통적으로 비슷하고, 현대일본인은 조몬인과 혼혈이라는 것. 이정도이고, 이런 유전자로 인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방법도 갑론을박이 많은 상태입니다. 다만, 중국인과 한국인은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한민족은 5000년전부터 상투와 흰옷을 즐겨입었습니다. 기록이나 유물이 남아있기 때문에 부정은 불가능합니다. 중국은 한민족과 비슷한 문화도 없고, 중국의 문화라는게 다민족의 문화가 섞여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민족처럼 하나로 보기 힘든 문화입니다. 한자만 해도, 한족이 만든게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상족이라는 은나라사람들이 만든것을 한족이 받아들인 겁니다. 상족은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고, 지금의 중국 변발이나 치파오같은 옷은 만주족의 옷인데, 지금 만주족은 죄다 사라져버렸죠. 한족문화와 묘족문화가 다르고, 만주족 문화가 다릅니다. 이들 문화를 가진 중국인은 중국인이 아니란 말입니까?
@freedom-lz7cg
@freedom-lz7cg Год назад
고려시대까지 태행산맥 동쪽에서 한국인이 살았습니다. 거란, 여진=만주족, 몽고인, 돌궐 한국인과 같은 씨족입니다.
@abn-rw5ir
@abn-rw5ir Год назад
감사드립니다 🙏🥤
@scarssiel
@scarssiel 2 года назад
일본으로는 크게 2차례에 걸쳐 한국인(주로 지배계층)의 대규모 이주가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1.고조선(번조선) 멸망시, 2. 백제 멸망시 (물론 근세의 일제 강점기 때는 제외.. 마지막 경우는 주로 피지배 계층이 노동자로 끌려갔겠네요.. 기회를 찾아 자발적으로 떠났거나. 각각 어느 정도 규모일까요?)
@hohngjuhnpahk
@hohngjuhnpahk Год назад
일본이 순혈주의 타령인데 해류 방향으로 보면 죄다 동이족이 조상이겠쥬? 아니면 동이족의 부족 간의 교류가 있던지요. 도래인들이 끊임없이 왔다는 것이 팩트일듯.
@정재성-c1l
@정재성-c1l Год назад
무었보다도 후기신석기시대이후 남방계유입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후기 신석기시대문화와 남방문화와의 연계성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후기신석시시대문화는 한반도는 광의적으로 홍산문화권에 들어갑니다.
@drmtc4948
@drmtc4948 9 месяцев назад
나중에 요서에 놀러나 가봐야겠다 ㅋㅋ
@もっちりゴリラ
@もっちりゴリラ 2 года назад
字幕が…ない…
@Excellentgoodguy
@Excellentgoodguy 6 месяцев назад
북중국이라 명칭을 사용하는것은 문제있다. 요하인이라 해야한다.
@dna1898
@dna1898 6 месяцев назад
한국인집단은 시기적으로 다르게 유입되어 정착하게된 남, 북방 기원의 복합적인 민족(dual origin) 임을 2000년대 초기부터 Y, mDNA 마커를 통하여 유전학적으로 처음 발표한 연구 그룹은 단국대학의 김욱 교수 팀이다. 이후, 국내의 다른 그룹이 전체 게놈 유전적 변이를 통하여 분석한 결과에서도 남, 북방 복합 기원이라는 사실을 검증한 것이다!
@thelibrary5972
@thelibrary5972 4 месяца назад
천신족(하늘의 아들/지배층)+조이족(지배층/귀족/태양신 토템/삼족오)+맥족(곰 토템)+예족(호랑이 토템)+韓족(삼신 할미)=한민족
@jipark_2373
@jipark_2373 Год назад
고대 서요하 지역 농경민들에 대한 유럽 학자들의 연구논문은 동아시아 문명의 형성과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매우 가치있는 시사를 해주었습니다... 약 1만년전 간빙기가 지나 요하유역의 농경민들은 인간이 농경에 집중할수 있을만큼 기온이 온난해진 시기 초원지대를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주하여 살았던 사람들이죠... 그들은 수만년을 살아왔던 중국 내륙의 수렵 토착민들에 비해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bc 3천년~4천년경 요하인들은 조,기장 농사에서 벼농사로의 농업혁명을 통해 더 많은 인구를 가질수 있었고 더 넓은 농경지를 필요로 했죠... 그래서 그들 농경민들이 이동할수 있었던 곳은 .... 1. 인접한 만주평야 2.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연산산맥을 지나 하북평야, 산동반도, 중원내륙 황하유역의 하남평야지대 3.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 서부의 광활한 평야지대...입니다... 그중 기존 토착민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이 있었던 중국내륙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적으로 토착민들과 동화되었고 일부집단은 자신들끼리 뭉쳐서 살게 되었죠... 산동반도의 동이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산동반도와 중원지역의 동이족들도 기존 토착민 화하세력에 밀려 자신들이 살던 발해만 요하유역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로부터 동아시아는 화하와 동이의 세력이 현저히 구분되어지게 되고 언어적으로 완전히 이질적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jipark_2373
@jipark_2373 Год назад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고 밝음을 숭상하는 사람들었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킨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중국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동쪽에서 온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보다 소수의 세력이었으므로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이였지만 화하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불리며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며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하북과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우게 된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된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된다(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에 멸망당하게 된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진한,대부여) 멸망후 정치적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게 된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된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게 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jipark_2373
@jipark_2373 Год назад
북부여는 단군조선(대부여,진조선,진한)을 이어받은 나라였고 동일 지역에 있었으므로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만주의 북부여도 조선이라 본것이다... 발해만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조선 유민들을 모아 쇠퇴해가는 북부여를 대신하여 동명국을 세워 동명성왕이라 불리운 고두막한이 한사군을 몰아내어 얼마못가 한사군은 한나라와 인접한 낙랑군만 남게 된다... 낙랑 지역에 살던 조선유민들은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 최씨의 낙랑국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한사군을 몰아내고 세력을 떨친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단군 해우루를 압박하여 나라를 옮겨갈 것을 요구한다... 고두막한은 자신을 북부여가 멸망시킨 진조선(대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하며 무력에 의한 시위와 더불어 단군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다... 해우루가 얼마후에 죽고 동생 해부루가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우게 된다... 고두막한은 동명국을 동명부여, 홀본부여라 칭하고 단군을 계승한다... 고두막한의 딸 파소는 미혼으로 임신을 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한반도 남부로 가서 박혁거세를 낳고 혁거세는 사로 6촌의 고조선 유민들의 추대로 어린나이에 신라의 왕이 된다... 혁거세가 왕이 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천제 단군의 외손자라는 혈통에 기인한 것이며 박혁거세의 왕호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또는 대부족장의 호칭인 가한(거서간)이라고 칭하게 된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 단군의 딸 소서노는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고주몽과 재혼한다... 고주몽은 정략결혼으로 아들이 없는 고무서의 홀본부여를 소서노의 도움으로 접수하며 어렵지 않게 나라를 세우게 되고 자신은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홀본부여의 정통성을 버리고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세운다 (사생아인 고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제후국인 고리(고죽)국의 가한이었던 고모수이다)... 북부여 해모수의 4세손인 고주몽은 북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 하였으며 단군조선, 진조선, 대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한 홀본부여는 고무서 단군에서 끊어지게 되고 소서노는 홀본부여의 정통을 잇고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요서지역 패대의 땅으로 옮겨가 살다가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으로 다시 옮겨 백제를 세우게 된다... 후에 백제는 홀본부여를 이은 남부여를 칭한다... 백제의 왕들은 동명성왕 고두막한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료 기록이 있다... 5호16국 혼란기에 백제는 요서지역을 경략하여 차지하게 되는데 그곳이 자신들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요서지역 패대의 땅은 지금의 난하 서쪽 중국의 수도권지역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정통성을 자신들에게 두고자 홀본부여를 지우고 북부여를 잇고자 하였다...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가 고구려와 백제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홀본부여가 망하게 되자 신라 혁거세의 손자 3대왕 유리는 가한, 차차웅의 칭호를 버리고 임금을 뜻하는 이사금을 왕호로 삼는다...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예맥과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나라가 되었으나 홀본부여와 북부여라는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에서 역사적 혼란이 발생한다... 훗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역사에 무지한 인간이므로 이런 차이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김부식은 동명성왕 고두막한과 고구려 고주몽을 동일 인물인 것으로 왜곡하였다... 신라는 고조선 유민이 나라를 세우고 천제 단군(밝은임금)의 제후국인 가한의 나라임을 표방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임금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물왕 시기 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속국임을 자처하며 원군을 청하였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속국, 제후국으로 삼고 왜를 물리쳤다... 내물왕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받들어 가한(마립간)의 칭호를 다시 사용한다... 내물왕 이후 신라는 1백년 이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간섭과 비호를 동시에 받으며 내부적으로 골품제를 실시하여 안정적으로 김씨 왕위세습을 유지한다... 그후 고구려가 왕권분쟁으로 쇠퇴함에 따라 신라는 지증왕에 이르러 마립간 칭호를 버리고 '왕'을 칭한다... ... 이로서 만주와 발해만, 한반도의 동이가 세운 국가와 구성원들은 모두 예맥족이 정통이었음을 알수 있다... 단군조선 멸망과 북부여, 홀본부여 등 만주, 한반도의 수십개 크고 작은 열국들은 모두 예맥이 지배층이요 핵심 구성원이었다... 이후 중국 사료에는 동쪽의 이민족을 모두 동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예맥이다 위 내용들은 모두 우리 사료에 근거한 것들이다... 고대역사를 몰라서 신화, 설화만 인용한 삼국사기, 유사보다는 더 신뢰성 있다고 생각한다... 신라의 흉노 김씨왕조는 예맥 부여를 자신들의 선조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로인해 신라는 만주, 한반도의 정통 예맥국가 왕조에 대한 사료를 남기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고대사 은폐와 왜곡의 시작점이다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태고의 태백산(백두산 )은 지금의 대흥안령 남단 황강량 입니다.ㅡ 그 아래 서요하 고대 서압록하 일대는 배달국 神市로 환웅 형제 아홉이 이곳에 모였다 하여 九黎라 했죠.ㅡ 치우천자때 신동성 북동 지역 靑邱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후 속국 唐堯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청구의 유민들은 神人王儉이 계신 평양 지금의 요령성 요양으로 몰려와 王儉을 단군으로 추존하고 도읍을 아사달 즉 遼東 지금의 하북성 조백하 상류와 적봉시 영성지역으로 옮겨 갔고 遼中에 12개의 성을 쌓아 唐堯에 대비하였다. 이후 당요의 2인자인 虞舜과 은밀히 밀약을 맺고 神市의 규칙을 회복하기로 하고 협공으로 唐堯를 공격하여 제압하였다.ㅡ 배달국은 九黎라 했고 조선은 九夷.東夷라 했는데 또 다른 용어로 숙신이라 하다가 춘추시대 산융 전국시대 동호라 했는데 이는 부여를 말하는 것이다.ㅡ 神市의 九黎는 문자가 나오고 문장이 이루어 지자 句麗 또는 高璃라 하다 청구로 옮겨가자 高離라 했다. 그리고 銅을 주조하게 되자 구려는 구리라고도했다. 고리와 구려의 합성어가 고구려이다. 요나라때 임황 일대이다. 고주몽의 고구려 졸본은 남만주 환인현이다.ㅡ
@해달별아리랑OSBA
@해달별아리랑OSBA Год назад
한중역사를 잘 파악하고 계시네요!!!!!!!!!!!!!!!!!!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게 아니고요. 아무르강 하류쪽에서 중류로 이주했다가 요하쪽으로 이주해온것입니다.ㅡ 인류 최초의 토기는 1만 2천년전 일본의 조문토기도 있으나 이 영향인진 몰라도 아무르강 하류의 수추섬을 중심으로 1만 2천년전의 토기는 아무르강 중류지역으로 전파되었고 또 요하의 신락문화로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StoryinDaechi
@StoryinDaechi 12 дней назад
초기 연구계획 단계에서 대조군 분류가 잘못된 연구인듯
@virapasas
@virapasas Год назад
혹시 일본어를 조몬어로 보시는 것인지요?
@youngk4175
@youngk4175 Год назад
고조선은 황하 이북을 중심으로 한 해양 제국 남방으로 진출 하백족성장 과 백제, 고구려와 신라 , 고려로 이어진 새로운 해양제국 / 기마민족으로 시작하여 농경문화와 맞나서 무역국가로 성장하는 화려한 역사.
@Lee-rx3jn
@Lee-rx3jn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중국 북동부 거주민 수억명은 옛 고조선 부여 고구려 대륙백제 발해 유민들이 한족으로 둔갑하거나 동화된 동일족들입니다 한국인 과 일본인은 속된말로 4촌보다 비슷합니다
@youngk4175
@youngk4175 Год назад
백번을 떠들면 뭣하노! 고조선이 바다를 중심으로 한 해양제국 이었음을 인정해야 뭐가 틀이 밝혀지지
@seseh7068
@seseh7068 4 месяца назад
아..왜 조선시대 양반은 10%뿐인지 설명되네..지배층 피지배층 부계혈통이 다르지..
@islandtree7577
@islandtree7577 Год назад
북방계 여자와 남방계 남자의 혼혈.. 북방계 곰 토템 부족 여자와 남방계 발달된 경제, 사회 농경 부족 남자의 만남.. 실제로 한국인 남자의 유전자는 베트남, 대만 원주민들의 그것과 유사하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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