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석현-h3l 그 소수는 일본인으로 바뀌었다 일본인에게 지진을 일으켰다고 돌에 맞으며 창에 찔려 죽었다 똥줄에 비비는건 영상만봐도 일본이 더심했다 동아줄 잡다가 핵까지 쳐맞았다 길거리에 똥은 사람의 똥이아니라 소 말의 똥이다 그당시에 사람의 똥은 농사짓는데 사용되었고 사고팔정도의 가치가 있었기에 집에서 싸야하였다 역시 천방지추마골피의 마씨.. 이해가간다
안타깝지만 이게 위안부의 진실임 위안부는 자발적창녀임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지금도 유흥업소나 안마방? 이런 몸 파는 곳에 여자들이 넘쳐나는데 왜 그 시절엔 창녀가 없었을거라고 생각하는거임?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강제로 끌고갔다거나 무슨 일 하는지 속여서 데려갔다거나 이런 건 같은 조선인 포주가 한 짓이고 상식적으로 몇천 몇만명을 이런 방식으로 끌고 올 수 있었겠음? 이건 상식의 문제
-임팔 작전으로 병력 9만 2천 명을 전투도 제대로 않고 1만 3천 명으로 줄여버린 팀킬에 성공하자 무타구치 렌야는 자결하는게 좋겠냐는 상투적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나 수석부관 후지와라 이와이치가 "아무도 없는 데서 하십시오.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 패전의 책임 같으면 장군님이 할복하고도 남습니다."라며 조용히 권총을 내밀었다.
1.상황 대한민국;세계 최빈국 거지국가 하나도 제대로 상대 못함 그래서 세계 초강대국 미국 응딩이 끼고있는 상황 일본제국: 세계 초강대국 미국하고 총력전 다른 한쪽으론 물량빨 중국 말기에는 소련까지 양면전쟁 총력전하는 상황 2.착취 강도 일제 강제징용=>전쟁 끝날쯤 국민 총동원할때 고작 9~11개월 대한민국 강제징용=>군대 2년 예비군 8년 40살 민방위 3.군인 대우 일제시대=당시 순사월급의 3배 대한민국=임금이 올라도 최저시급도 안됨 나라를 이따위로 운영해놓고 반일에 목메고 애국한답시고 징병제를 결사옹호함 일제시대 군대>>>>>좆한민국 군대
@@김서현-o3y9u 진짜 수준 ㅈㄴ 떨어지네; 니가 논문급 연설을 펼치든 말든 니 알아서 하고 1. 진짜 개 병신 논리 이건 진짜 국까 그 자체임 지금 한국 군사력이 6~7위 할텐데 나라 하나도 제대로 상대 못한다? 이건 국뽕이 아니라 중국 일본은 다시는 한국 강점 못함 한국 강점 할려면 자기네 나라도 망하거나 큰 타격 입을 각오 해야 하기 때문임 애초에 일본은 소련 없이도 개쳐발릴 운명이었고 중국은 반병신인 상태였는데 "우리 대일본제국은 무려 소련과 중국 미국 상대로 전쟁하다가 패전하였습니다" 이지랄 떠네 ㅋㅋㅋ 2. 닌 한국이 왜 강제 징용을 하는지부터 알아야함 위에 바로 북한이라는 적이 있기 때문이고 한국이 군사력 계속 올리는 이유도 그거임 일본 반일 때문에 징집령 내리는게 아니라고 ㅋㅋㅋ 3. 군인 월급은 븅신인건 맞음 애초에 니가 말하는데는 주장만 있지 근거가 하~나도 없는 허무맹랑한 니 일반적인 주장일 뿐임 일뽕 새끼야 ㅋㅋ
의외로 임팔 작전이 1g도 옳은 구석이 없는 작전은 아니었습니다. 무타구치 렌야는 대략 2주 남짓한 보급품을 가지고 전투할 것을 지시했는데 임팔 전역을 3개 지역으로 나누면, 최북단의 요충지 임팔과 최남단의 2개 사단이 주둔한 기지, 그리고 임팔과 기지를 잇는 좁은 길이 있었어요. 일본군은 우선 전차를 포함한 1개 사단으로 최남단의 2개 사단을 공격, 후퇴하는 사단을 길목을 끊은 일본군으로 하여금 좌우에서 갈아마시고 북단의 임팔에서 병사를 빼서 남쪽을 지원할때, 임팔 동쪽의 산을 타고 내려온 병사들로 하여금 무주공산을 치겠다...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요. 이 작전은 초반부에 거의 성공했습니다. 남쪽을 공격하는 1개 사단은 영국군 2개 사단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했고 중간지대를 공격하는 부대 또한 임팔과 남부 기지를 잇는 길목을 차단하는데 성공했어요. 심지어 무타구치 렌야의 계획대로 영국군의 대규모 보급기지 둘 중 하나도 점령했고요. 여기까진 계획대로 진행됐습니다. 문제는 남부 기지를 지키던 영국군이 너무나도 빠르게 철수하면서, 1년 걸려 세운 기지를 날려버렸고 임팔에서의 지원군 또한 빠른 속도로 중앙 부대를 압박했으며, 점령당한 보급기지 또한 퇴각하면서 싹 다 못써먹을 물건으로 만들어버리고 퇴각했거든요. 결과적으로 개고생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폐허를 점령한 남부지역 일본군 사단은 보급품도 없는 상황에서 퇴각한 영국군을 쫓아야 했고 중앙 길목을 점거한 일본군 부대는 보급품 탈취에 실패한 와중에 엄폐물 하나 없는 맨땅에서 항공공격을 맞아가며;;; 임팔방면 지원군과 퇴각하는 사단 사이에 껴서 필사적으로 버티다 다시 그들이 왔던 지옥, 아니 고산지대의 정글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부 임팔을 공격하던 부대는 2주 보급품을 가지고 한달 이상을 버텼는데요. 영국군이 지키던 고지를 점령하면서 밀어붙였지만, 임팔을 얼마 안 남긴 지점에서 퇴각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고지 하나를 점령할때마다 엄청난 손실을 봤고 손실이 보충되지 않은 반면 영국군은 손실이 큰 부대를 다른 부대와 교체할 정도로 여유로웠어요. 심지어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점령한 임팔 인근의 고지는... 영국군이 그냥 고지 하나를 놔두고 뒤로 물러난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땅을 점령한 거지 일본군이 영국군을 이겨서 점령한게 아니다보니 준비가 철저하게 된 다음 고지를 공격할 여력은 없었어요. 임팔작전 최대의 문제점은 1. 보급 경시 - 밥이든 총알이든... 뭐든 있어야 병사들이 정신력으로 나머지를 커버할 수 있습니다. 2. 생명 경시 - 2천명 데리고 고지 하나를 점령할때마다 200명이 죽는다면, 일본군은 4개 고지를 점령하고 1200명이 남는다고 계산하는 희대의 얼간이들이었어요. 무타구치 렌야는 그중에서도 한손에 꼽힐 정도로 난장판인 인간이었고요. 3. 안일한 전략 - 작전이 2주 안에 끝나면 얼마나 좋겠냐만... 항상 최악을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누구 하나 단 하나의 실수도 없고, 전황 변화도 생각하지 않은 단일 A플랜의 전략도 문제였습니다.
도조히데키도 작전을 보고 보급문제,현실성,버마의 공백등이 해결 가능하냐고 물었지만 작전을 가져온 대좌는 그거에 대답을 하지 못했고 호통을 쳤지만 결국 한숨을 쉬며 목욕탕에서 결제를 해줬습니다. 그만큼 파벌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봐도 힘든 작전이었으며 히로히토도 이걸 보고는 이게 진짜 가능한 작전이냐며 물엇다고 합니다. 히로히토도 육군군사관학교를 나온만큼 식견이 없는건 아니지만 렌야는 실전경험을 가진 지휘관이고 히로히토는 어디까지나 이론만 아는 수준인걸 생각하면 이건 뭐...
매일은 아니지만 생각날때마다 들러서 올려주신 유익한 영상들 잘 보고있습니다. 혹시 언젠가 기회가 되신다면 고조선때의 역사도 이야기 해주실수 있으신가요?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주요 사건들이나 흐름은 그럭저럭 알고있는데 기원전의 이 땅에 있었던 역사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것이 없어서 문득 궁금해지더라구요.
@에엑따 제가 이런 대화는 크게 싫어하는데 에옉따님 이덕일역사tv를 제대로 보셨나요. 이덕일박사님은 환단고기 외에 삼국사기(이 삼국사기도 설명을 하려니 너무 힘들고 책보고 체널 참고. )외에 중국 사료 등 여러 방대한 역사서를 바탕으로 우리의 왜곡되고 빼앗긴 역사를 바로 찾고자하시는 분인데 강당사학자들의 눈으로 보지마시고 이덕일역사tv 중에 많은 것이 아니라도 몇몆 체널이라도 보시고 이런 댓글 달기바랍니다. 계속 답글 남겨보아야 책 한권 읽은 수준으로 또 답글들 남길게 뻔해서 이번만 답글 남기고 에엑따님과는 더이상 답글 놀이 하지않겠습니다.
참고로 추가 정보를 더 설명하자면 1938년에 우한이 함락되고 나서 중국 전선이 지지부진 한 건 맞았고 떨어지는 돈과 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동남아로 가기로 결정하고 진주만 공습을 하게 되면서 미국을 적으로 끌어들였고 1944년 태평양 전선에서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일본군은 대륙타통작전 (이치고 작전) 을 감행하여 중국 남부의 항구도시를 장악한 일본군과 화북과 화중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군이 중화민국 남부에서 만나서 중국 남부의 중국군들을 대규모로 포위하는 작전이었으며 실제로 성공했습니다. 물론 이미 미군의 압도적인 힘으로 일본제국은 패망의 길이 멀이 않았고 동남아의 깊숙한 골짜기로 일일이 철도를 연결하여 자원을 신속하게 중국전선으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분명 이 작전은 동아시아 역사에 영향을 미쳤고 중국 국민당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줬습니다. 국민당군은 50만의 일본군이 감행한 이치고 작전을 막느라 65만의 병력이 희생되었고 화북에서 팔로군과 국민당 유격대들을 소탕하여 가까스로 후방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성공했지만 치안유지에 필요한 병력들까지 죄다 이치고 작전에 투입시키면서 일본군 점령지는 거의 무주공산 상태가 되었고 그것은 훗날 국민당을 대륙으로 쫓아내고 자신들 공산당이 대륙을 통치하는데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군은 작전에 50만의 병력들과 800대의 전차 10만 마리의 군마 등을 동원하였는데 그 많은 장비들을 다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했을 거고 때문에 1944년에 작전을 시행했을 가능성도 높지만 아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미국이 참전하기 전) 일본군이 작전을 수행했다면 중국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일본군 쪽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1944년에 작전을 시행했을 때도 충칭이 함락위기에 놓이는 등 중국군에게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었고 실제로 작전 기간 중에 중국 장강의 3전구는 아예 일본군에게 포위당하기도 했습니다. 영상에서 일본군 보병들이 임팔의 험준한 산맥들을 무거운 짐을 지고 장거리를 뛰어내는 걸 보고 만약 일본군에게 작전을 수행할 만한 역량이 44전 전에 만들어져 있었고 실제로 임팔작전처럼 동남아와 중국 전선 사이로 보병들을 이용해 자원을 수송했다면...한 번 쯤 궁금하게 생각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임팔작전은 지도상으로는 뛰어난 보병기동과 공격시기를 포착한 괜찮은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차대한 '지피지기'기가 제대로 안되어 제대로 망한 사례입니다. 일본군은 영국을 너무 얕잡아봤고, 청야전술에 대한 대비가 없었습니다. 영국은 이전 전투와 달리 전력이 강화되었고, 특히 청야전술과 공중보급을 통해 일본의 공격을 아주 잘 막아냈습니다. 전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도, 보급과 정보라는 전략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패전을 면치 못한다는 중대한 교훈을 남겼죠.
1.가축을 이용한 보급은 2차대전 일반적임. 독일군도 말을 이용한 보급을 했음. 2차대전 전군 차량화를 처음으로 실시한 국가는 미국이 유일함. 2. 보급 현지징발 및 기습작전은 말레이반도 전투에서 잘 먹혀들어갔었음. 3. 전쟁 계획이라는게 안 될때를 대비해서 차선책이나 백업등의 보완책을 세워야하는데, 이작전은 그런게 없음.. 하긴 안정적인 보급선 없이 고속 행군하여 적진 깊숙히 들어간 아군이 고립된다면,, 선택지는 점령 혹은 전멸 밖에 없음.. 삼국지에서 자오곡 루트를 제갈량이 괜히 반대한게 아닌가봄
상황이 보니까, 상륙 직전에 보급이 끊어져갈 무렵 수송기로 수송해주고 폭탄 채워주고 제대로 전열 가다듬고 돌격했으면 인도까지 밀고 갔을 전략인데 개같은 전략이 운대기가 잘 맞아서 성공할 수 있었던 상황에도, 보급기 수송기 띄어주기 싫어서 버티다가 저 꼬라지가 난 것도 대단하네요. 그것만 잘 됐어도 전황이 뒤집어지고 1~2만명 희생으로 끝냈을 텐데 일본은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그냥 허접한 군대였던 걸로
임팔작전의 문제... 일단 3개 사단의 편제가 부족해서 평군 70%도 체우지 못했다. 그러면서 영국군의 군의 규모를 너무 축소해서 파악하고 영국군 자체를 무시함. 렌야가 전쟁초반 영국군 보급품을 얻어서 달달하게 빨아본 경험으로 부족한 보급품을 영국군에게 취한다였는데 영국군이 퇴각할때 1년동안 세운 기지마져 불태우고 퇴각해서 아무것도 얻은게 없었음. 작전 후반때 상당량의 보급품이 있는 기지를 점령에 성공했지만 지칠대로 지친 일본군들은 영국군의 반격에 버티질 못해 아무것도 얻지 못함. 결론 - 자신들의 군의 정원도 못체우면서 적을 과소평과하였고 오래전 경험에만 의존해 현제 상황 파악도 못하여 강행해서 망함.
1. 조선시대는 수레바퀴를 안쓰고 왜 사람이 직접 가마를 끌었나?? 도로가 정비가 안되었고 산간 지역이 대부분이기에 수레를 달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문제는 가마를 끌고 다닐 인부를 항상 소집해야 했기에 가까운 지역이 아닌 먼 지역같은경우는 인부들이 탈진하거나 호랑이 표범등에 습격을 당해 죽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2. 왜 한강을 배를 타고 다녀야만 하였나?? 한강이남과 이북을 연결하는 다리를 연결할경우 왜적과 오랑캐의 침입에 위험해 질수있다는 생각에 다리 설치를 엄두를 못내었다고함, 임금이 직접 강남으로 움직일 경우 거대한 땟목을 연결해서 다리배를 만들어서 건너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임금이나 관리등도 강남으로 이동이 많지는 안았기에 다리를 놓아서 다니는것보다 배를 타고 다니는걸 선택한거였음 , 물론 한강을 이동시켜주는 뱃사공은 지금으로 치면 전문직에 고소득자 였다는것은 사실 3. 조선은 왜 노비신문에게는 군역을 지게 하지 안았을까?? 조선시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였고 노비나 천민은 일반적인 시민의 계급이 아니였기에 시민으로 인정받을수있는 군역을 지게 하지 안았다. 이는 나중에 임진왜란, 병자호란때 개털리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 노비에게 군역을 안주었던 실질적인 이유는 사실 지방세력이 수백만명에 가까운 노비를 병력 휘하게 둘경우 왕권까지도 위협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였다고 보면됨 4. 조선은 왜 역병에 대단히 취약했을까?? 조선은 전염병이 생기게 되면 해당 지역은 봉쇄를 하고 지역 사람을 모두 매장을 하거나 다 죽였다고 함 문제는 전염병에 대한 걸 마마님 이라고 하면서 주술이나 제사등으로 해결하려 헀다는게 웃긴점이였음 당시 명나라에서도 의학이나 서양의료등을 얼마든지 전수 받을 기회가 많았음에도 성리학에 위배된다는 이유만으로 배우려 하지도 못했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 아닐수없음 5. 조선은 과연 국뽕을 할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 조선은 당시 국가 경제력은 일본의 도쿠가와 가문의 경제력에도 미치지 못하고 ,군사력은 당시 명나라 1개 성의 지방왕의 군대보다도 약하였고, 기술력은 유럽 암흑시대의 기초과학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조선은 어디를 보아도 국뽕을 할수있는 요소는 없다고 보는게 정답임, 다만 조선에 분명히 세계적인 위인이 나온것은 사실임 그러나 훌륭한 위인이나왔다고 해서 그 시대 나라가 좋았다고 보는건 역설적임 마치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등 명장들이 촉나라에서 나왔다고 해서 촉나라가 잘나간게아닌거처럼 말이다 1줄요약 1. 조선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였고 미개함의 극치인 나라였다.
칭기즈칸 몽골 군대 방식 - 바짝 말려 아예 가루로 만들어서 자루에 담은 양or소 한마리분의 육포. 마찬가지로 바짝 말려 가루로 만든 우유. 물과 마유주 예비화살 예비 활. 등등을 몽골병사(기병)개인당 몰고다니는 최소 여러 마리의 말들에다 실어두고 몰면서 달림. 타고다니는 말이 지치면 바로 갈아타고 말위에서 잠도 자고 먹는 것까지 왠만하면 말위에서 달리면서 다함. 그 기동력 덕분에 몽골군이 쳐들어온다! 라는 소식을 듣고 피난할 짐을 싸고 있을 때 벌써 쳐들어옴. 순식간에 털고 불태우고 살아있는건 수레바퀴보다 크면 다죽임.
현대전에서 부대원의 30%만 전사 해도 그 부대는 사실상 전멸 취급임... 이게 30%라고 하면 70%나 남았으니 괜찮은거 아니냐? 할텐데 군대는 모두 각자의 역활이 있고 그중 30%가 짤려 나간거임 제대로 부대가 굴러 갈리 없음 40%만 사망해도 완편 에 비해 화력이 20%까지 줄어든거 특히 소화기 라는게 단순하게 전력비가 1:1로 나오는게 아니니... 그 와중이 90%가 전사 했다? 이건 현대전에 있어서 생각 하기도 힘들 정도의 전멸 사례;;; 란체스터 아저씨 뒷목 잡고 쓰러지는 소리 들린다.
원래 군대끼리 대치중이면 그 적병력이 이 전역에 남아있다는 사실자체가 상대의 진격을 꺼리게함 군대의 진퇴 자체가 엄청나게 정보를 많이 수집하고 결정해야하는일인데 저렇게 버마전역의 병력을 사지에 던져넣고 십만의 병사를 죽게 했으니 연합국 측에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음 적사단은 혼자 증발해버렸지 포로도 없지 해당 전역을 손쉽게 손에 넣었지 평지가 아닌 험준한 산악과 정글이 펼쳐진 지대라 비슷한 지역인 배트남전이 그랬듯 작정하고 싸우려들면 정말 애먹었을건데 임팔작전으로 연합군의 버마전역 예상 작전기간이이 반년가량 단축됬다는 얘기도있음
그런데 전술적인 관점에서 냉정히 보자면 무다구치 렌야의 작전은 상대가 오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곳을 들이치는 것이고 이런 형태의 공격은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고 칭기즈칸의 부대가 텐산 산맥을 넘은 것과 같은 형태로 역사에도 남아 있습니다. 다만 렌야는 칭기즈칸이 아니고 일본군은 몽골군이 아니었죠. 몽골군이 텐산산맥을 넘을 때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양털 안을 발효시켜 그 열기로버텼다고 하는데, 그건 혹독한 몽골 초원의 추위를 견디던 몽골 부족의 지혜였죠. 베어 그릴스도 그런 생존 기법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진짜 렌야가 일본인이 비건이라고 생각했다면 작전 전에 밀림에서 자체적으로 먹을 수 있는 거리가 있는지 연구를 하든가 차라리 풀뿌리와 나무껍데기 캐먹으며 보릿고개를 넘기던 조선인들을 데리고 오는 게 맞았습니다(당연하게도 농담이죠)
그 명언이 안나오네 ㅋㅋㅋㅋ 식량이 없다고 하니깐 렌야 왈 "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다 식량이 없으면 풀을 뜯어 먹으면 된다" 라고 했음 그래서 진짜 일본애들은 풀 뜯어 먹으면서 진군했지만 미얀마가 정글이라서 온갖 독초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식용이 아닌 독초를 많이 먹어서 죽었다고 함
@@Hwan1616 아님. 몽골이 산많은 아프간지역도 중동 사막지역도 다 텀. 몽골이 빠른 기동력을 가지고 보급이 거의 없어도 되는 이유는 말우유와 육포였죠. 육포는 장기간 유통이 가능하고, 물만 데워서 던져놓고 먹기도 햇슴다(샤브샤브 원조). 말도 기병 한명당 3-4마리씩 끌고다녓는데, 말도 지치기에 교대로 타기 위함이엇지만 위급시(보급x) 그 말을 잡아먹엇습니다. 무다구치 렌야가 말한 현지수급(약탈)도 기본이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