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I: 로마, 유럽 중세시대 동전들은 다 하나같이 동전 옆면이 정상인게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도 꼼수로 동전의 가장자리를 갈아서 금/은을 모왔다. 그래서 뉴턴이 동전 옆면에 홈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더 이상 동전을 갈아네는 짓을 구별하기 시작하니 동전 갈아내는 짓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화폐를 주도적으로 쓴 국가는 중국이랑 로마같은 제국이나 중세 서양 길드 정도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화폐가 의미 있는 건 화폐를 받쳐 줄 충분한 자본력이 있어야 쓰일 수 있는 보증서 같은 건데 그 정도의 보증을 하려면 거대 제국이나 돈의 흐름이 중요한 길드 정도지요. 물론 흉년 한번 들면 돈대신 현물로 거래하는 건 제국도 마찬가지 였고요. 산업혁명 이후 식료품이나 공산품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쌀이나 무명으로 거래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지만 200년 전만 해도 상평통보 보단 쌀이나 면포가 화폐였죠. 남미의 경우 자국 화폐는 똥취급에 달러만 받으려고 하고 90년도 러시아 경제가 무너졌을 때 화폐 대신 물물교환을 했거든요.
오히려 조선은 위조 화폐보단 기껏 화폐를 만들어논 걸 녹여 놋그릇 만들어대던게 더 큰 문제였..... 동이 거의 전량 수입이다 보니 동이 들어가는 놋그릇 자체가 일종의 부의 상징이었는데, 동전을 통해 동을 확보할 수 있다는게 알려져서 놋그릇을 원하던 사람들이 죄다 동전을 녹여서 기껏 유통시킨 동전이 줄어 다시 물물교환을 시작하게 됨....
영상에서 더 이야기 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써봅니다. 당백전이나 당오전 같은 고액화폐를 발행해냄으로써 인플레가 유발된 사례 이후에도, 백동화를 전적으로 발행해서 세수와 상거래에 있어서 유통시키려고 하는 정책을 남발하는 과정에서 대량의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기도 했습니다. (당대에 있어서 연회나 사적인 용도로 재정을 찔끔거리며 쓰지만 않았어도, 만성적인 재정 부족은 나타나지 않았을 터였습니다. 각 부처도 예산을 실정과 현실에 맞지않게 물쓰듯 돈을 요구하고 소모하니 이는 가속화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궁내부가 탁지부의 예산을 마음대로 책정하여 써버리는 사례도 나오곤 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특히 1900년대 들어서부터는 백동화를 위조하는 게 화폐주조비용과 액면가 사이의 차익이 커짐에 따라서 위폐를 남발하는 자들에겐 쏠쏠한 사업으로서 자리메김 했지요. 더군다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대한제국 정부 입장에서 구멍난 재정을 충당하고, 전적으로 백동화를 유통시키기 위해서 은본위제의 기준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백동화를 발행해냈는데, 그 과정에서 관서나 여타 부처들이 폐화를 찍어내 남용하는 건 물론, 화폐주형을 심지어는 다른 사적 집단이나 개인에게 빌려주는 경우도 흔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럼에 따라서 나타나는 백동화의 종류만 해도 그 당시로서는 네 종류 였는데,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1.정부 백동화 2. 2급위조동전 3. 3급위조동전 4.밤에만 통용되는 돈 이에 관해서 여러 국가의 대사들로부터 탄원이나 청원이 단시일 내로 다차례 날아오곤 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위폐를 유통시키는 것을 단속하고, 실형을 선고하는 등의 방식으로 조선내에서 위폐가 남발되는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제일은행을 세운 시부사와 에이이치 남작은 제일 은행 어음을 사용케해보려고도 했으나, 이를 궁내부 대신이었던 이용익이 강제로 틀어막았지요. (물론 이는 당대 조선반도에 진출한 여러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나 사업체들이 있을 터인데, 조선화폐의가치가 겉잡을 수 없이 급락해간다면, 조선내 자국민들의 경제적 소득과 상황을 보전치 못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이는 곧 조선을 우선 정치적으로 지배하기에 앞서 경제적으로 먼저 종속시켜 다루기 쉽게 하려는 계획이 어긋날 수도 있었던 부분입니다.) 이렇듯 대한제국 때의 재정과 그에 따른 통화문제가 심각했으니, 일본은 첫번째로 협약을 체결할 때, 재정고문을 파견했고, 그 길로 화폐정리를 단행할 수 있었지요. 백동화의 교환에 있어서 가치를 달리 설정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 백동화의 위조가 심각한 수준으로 이뤄져 왔기 때문에 차등을 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대한제국의 재정과 통화문제에 대해서는 앵거스 해밀턴이 쓴 (1904), 그리고 얼레인 아일랜드의 (1926)를 보시면 될 듯합니다.
할배들 말 들어보면 70년대까지도 지방은 쌀이나 곡식으로 물물교환도 흔햇어. 이병철 자서전 보면 6070년대엔 은행 대출 받다는 개념 자체가 없엇기에 은행돈을 자기돈 쓰듯 사용햇다고 하고..사실상 화폐, 금융이라는 개념이 일반 시민들에게 까지 본격적으로 인식된건 80년쯤 부터라고 봐야지..
대신 답해드리자면 현대 기술론 반대편까지 파는게 불가능합니다. 지각(우리가 밟는 단단한 땅)을 다 뚫기도 힘들고, 뚫더라도 맨틀부분은 마치 요플레같은 유동성을 가진 고체여서 뚫는다는 개념이 불가능하고, 온도도 매우 높아서(쉽게 생각하시면 마그마같은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맨틀을 뚫는것도 불가능 합니다.
그건 인플레가 갈때까지 가서 생긴 문제인걸로 압니다. 인플레 이전엔 상평통보의 가치가 훨씬 높았는데 어떤 멍청이가 그걸 녹이나요... 그냥 그돈으로 놋그릇을 사지. 인플레가 심해져 화폐의 가치를 상실하니 차라리 물건을 만드는게 낫다고 생각하는거죠. 정부입장에선 어찌됐건 발행한 화폐인데 화폐로서 쓰이질 않으니 골치인거죠.
와, 이 주제는 조선시대에 위조 화폐가 있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일 것 같아요. 역사와 경제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댓글은 조선시대에 화폐의 발행과 위조에 대한 역사적 배경, 그리고 이에 따른 사건들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나눌 것입니다. 댓글에서는 시청자들이 이 주제에 대한 조선시대 화폐의 발전과 위조에 대한 관련 정보,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조선시대의 화폐 시스템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에 대한 토론이 될 것 같아서 읽는 재미가 더해질 것 같아요. 조선시대 화폐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흥미로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동에서 실제 과거 엽전을 파는 곳이 있는데, 그동안엔 늘 상평통보만 한닢씩 사오다가 예전에 우연히 거기서 청나라 동전을(도광제 시기 동전인 도광통보) 발견해서 얼른 사왔던게 생각나네요 ㅋㅋ 청나라 동전이 왜 인사동에서 팔리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봤다가 이 영상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청전의 조선 유통)을 조금 미리 알게 됐었죠...
세금을 쌀로 받아서 화폐경제가 활발하지 못했음. 중국은 장거정 이후 은으로만 받았는데 우리나라는 대동법 정착되고 쌀로만 받음. 그리고 자원적으로 동전을 유통하자니 동이 부족하고 은은 좀 나는데 은 많다고 하면 은본위제 이후로 은에 미친 중국이 조공으로 바치라고 하니까 걍 현물거래 위주로 거래한 거임. 우리나라가 연은분리법 개발해놓고 일본이 돈 벌게 된 이유가 은 만들어봤자 중국한테 삥뜯겨서임....
역사 배워보면 알지만 한반도의 화폐의 도입은 꾸준히 중앙정부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성공한 적이 없음. 대한민국 까지 와서는 애먹지 않고 당연히 화폐가 쓰이는걸 보면 그 이전에는 경제구조 본판 자체가 성공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봐야함. 도입실패한 화폐니까 위조로 인해 얻게 되는 이득도 적고, 위조도 잘 안했을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