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일본과는 달리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은 유독 복층건물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일부 학자들은 조선의 건축기술이 부족했다는 견해도 있는데요. 조선시대 사람들이 복층건물을 짓지 않았던 진짜 이유가 궁금합니다. * 참고문헌 및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 국가유산청 구들문화원 / 조선사진풍경 조선왕조실록 / 고려도경 풍속화첩 / 대한주택공사20년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식 #역사 #상식 # 조선시대
우리 문화 우수한 점이 많지만 건축은 솔직히 서양이나 이슬람, 중국 일본 태국보다 후달리는게 사실임. 비단 고층건물만 없는게 아님. 다른 나라 절경을 보면 절벽이나 높은 고지대에 마을을 짓는게 매력임. 우리는 평지나 골짜기에만 짓는 습성이 있는데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함. 이전 시대는 모르겠는데 조선 시대 건축물은 유교조선의 정서 때문이 아닐까 싶음. 보수적이고 표현을 자제하고 도전의식이 없음. 그래서 옆나라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조선은 상업에도 소극적. 아마도 토지 중심의 농경 양반 사회가 너무 지배적이어서 그런거 같음.
온돌 때문이라는 건 선후관계가 잘못됐음. 조선에 2층 건물이 없는 건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그 시작은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던 유교 성리학적 가치관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임. 2층 건물을 올리려면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서민층은 해당사항이 없고. 재력을 갖춘 기득권층이나 가능했음. 이들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을 배운 유학자들임. 근데 대놓고 크고 화려한 2층 집을 짓는다는 건 유교적 사회에서 평판에 악영향을 줌. 재력이 되는 중인계층의 상인들도 큰 집 못짓고 살던 당시 사회분위기를 기억해야 함. 성리학적 가치관이 자리잡기 이전의 조선초기에는 생각보다 2층건물이 많았음. 이게 양란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됐고 새로 재건을 할 때는 이미 성리학적 가치관이 조선에 깊게 자리잡을 때임. 심지어 전란을 겪고 서민층은 경제가 궁핍하던 때인데 이때 기득권자들이 크고 화려한 2층집은 짓기에는 성리학적 가치관과 상충됨. 온돌문화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조선에 전반적으로 보급된 건 의외로 조선후기임. 양란을 겪고 전후재건이 끝난 이후에야 소빙기가 온 거임. 즉 온돌 때문에 2층집이 없었다기 보다는 이미 이전에 단층집이 지어지던 와중에 온돌이 여기에 보급됐다고 해석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거임.
그놈의 국뽕 ㅋㅋ 성지학 주자학 유교 모두 중국에서 들어왓는데 중국은 왜? 2층집이나, 높은 담장의 기와집이 존재하나? 중국은 산림이 풍부해서 기와집 벽돌집을 많이 지었고 일본은 곧은 나무가 풍부해서 목조건축이 발달햇지만 한국은 국토가 좁고 곧은 나무가 적어서 중국처럼 벽돌집을 지을수 없었고 일본처럼 목조건축물도 지을수 없엇지 그래서 구가가 법으로 산림의 나무를 함부로 벨수 없엇고 나뭇꾼도 국가가 허락해준 사람만 나무를 햇어 +@로신분제국가라 양반이외에는 기와집을 가질수가 없었지 말이 기와집이지 기와를 구을려면 집한체짓는 나무보다 더많은 땔감이 필요함 지금 갑어치로하면 강남의 20~40억 아파트야 조선시대 양반이 인구 20%인데 그중에서도 10%의 잘사는 양반집이나 기와집에서 살았어 전제 2%정도지 +@로 옹기,도자기를 만들엇는데 ㅄ들처럼 외형에 흠집잇으면 그걸 싸게파는게 아니라, 모두 때려 부셔버렸지 병자호란이후에 청나라로 끌려갓다가 돌아온 사도세자가 한탄한게 있어 중국은 서민들도 기와집, 벽돌집에 사는데, 조선은 초가집 흙집에서살고, 그 초가지붕과 흙집을 보수하니라 백성들의 삶이 힘들다고 햇지, 그리고 벽돌 기와 같은걸 권장하려했만 실패햇어 그런데 사도세자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거야 위에서 말한대로 기와장+벽돌을 구을려면 엄청난 나무가 필요해 그래서 반대한거야 그리고 옥저에서 개발된 온돌 문화는 17세기 소빙하기때 경신기근으로 인구가 30%이상이 죽엇는데 굶주림+질병+동사로 죽지만,, 기후변화에서 인간이 할 수잇는건 얼어죽지 않는 것이라 온돌이 다시퍼진거야, 지금의 온돌과도 다르고 쪽구들 강(중국식 온돌)문화에서, 중국처럼 건물을 높게 지을수도없어서 연기배출위해 아궁이는 부엌으로 빼는 식으로 발전했지 본격적인 온돌의 역사는 350년가량 뿐이안되 그 이전에는 고려시대만해도 서민들은 땅파고 움집+ 낙동강 하류 가야지방 경남은 동남아처럼 바닥에 고상집 + 산간은 귀틀집 같은곳에서 살앗어 아니 한옥집 기둥보면 보통 지름 30CM도 안되는게 그런 나무로, 2층 기와집을 지어? 삼국 시대부터 산림을 국가가 관리해서 나뭇꾼외에는 벌목 금지이며 그 나무꾼도 아무 나무나 못베엇는데 무슨수로 집을짓어? 나무꾼도 허가받고 집짓는 용도외엔 쓰러진 나무같은 거나 베엇지 온돌이 퍼지니까 기와집 벽돌집은 커녕 대한제국시대엔 이미 마을 근처의 산은 완전 벌거벗은 민둥산이 되어버렷지 기와+도자기+항아리+숯+ 소금 만드는 기술도 없어서 자염(바닷물 끓인것) + 요리할때 + 난방,,등등등으로 민둥산 됨,, 땅도 좁고 나무도 빨리 크지 않는데 그많은 나무를 어디서 구해? 민둥산이던걸 박정희때 산림녹화 사업 시작해서 성공한 이유가 그냥 나무만 심어서 그런게 아니고, 일제에게 전수받은 광산기술로 석탄을 캐서 연탄 보급으로 난방하고, 곤로를 들여와서 등유 보급으로 찌게같은건 끓여먹어서 성공 한거지 한옥은 지붕이 너무 무거워서 방도 커봣자 2평인데, 대체 2층한옥이 어떤거야?ㅋㅋㅋ 그좋은 한옥을, 2층으로 지어서 살면 되는데,, 요즘 사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버러지들이;라서,,그좋은걸 포기하나?ㅋㅋ
저도 공감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떻게든 기를 써서 2층을 짓거나 2층에 온돌을 올릴 방안을 강구할수도 있었겠죠. 소위 '합리적 추론'이라는 착각 속에 단순한 인과관계로 모든 현상을 이해한 것처럼 설명하는 부류가 있는데,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깊은 이해를 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도 많이 있죠. 온돌 때문에 2층을 못만들었고, 때문에 상업도시가 발달하지 못해 조선시대 국가 발전을 저해했다는 논리는 유현준 교수가 유튜브로 널리 퍼뜨린 얘긴데 이것도 문제가 많습니다.
온돌 때문도 있지만 외침으로 인한 소실도 큰 이유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복층 건물이 여럿 있었는데 삼국시대, 고려시대 건물들이 제법 남아있었고 조선 사람들도 복층 건물을 지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물에서도 신라시대 건축양식을 간직한 건축물들이 존재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죠. 그러나 임진왜란이 벌어지면서 얘기가 달라지는데 일본이 사찰에 승병이 있다는 이유로 불태웠고 전국토가 황폐화 됐습니다. 일본군이 불태운 건축물들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중건됐는데 나라가 전쟁으로 피폐해졌는데 예전만큼의 규모로 짓는 건 무리가 있었죠. 불탄 건물들은 과거에 비해 작은 규모로 중건됐고 여기에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1. 온돌 보급 2. 기존 건축물들 소실 3. 성리학 사상 으로 단층 건물이 많아졌습니다. 아 그리고 조선 후기에 단층 건물만 있다고 하면 오류인데, 진경산수화 중에는 양반 소유의 다층 누각을 묘사한 그림들이 존재합니다. 이것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소실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죠. 결정적으로 현재에도 2층 한옥 건물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참고로 온돌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인들도 사용했습니다. 온돌의 보편화는 소빙하기 이후 더욱 추워진 한반도의 환경에 맞게 변화한 건축양식이고, 이것에 열등감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DoJM-y사대부들에게는 예라는 것이 있어서 생활의 여러분야에 걸쳐서 그들 나름의 규제가 있었습니다. 셀프규제도 있고 국가 차원의 규제도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국가 차원의 건축물에 대한 규제는 신분과 직분에 따라 건물의 칸수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왕은 100칸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있고, 양반은 100칸 넘는 건물을 지으면 안된다‘ 따위의 규제가 있었는데 원댓글의 내용으로 추측해보자면 임진왜란 이후로 복층 건물은 사치로 여겨져 국가 차원에서 규제를 했나봅니다.
@@DoJM-y 사실 제가 말한 이유는 3가지로 그 중에서 크게 비중을 둔 건 온돌 보급과 건물 소실입니다. 댓글을 보니 사람들이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2층을 짓지 않았다고 말해서 "실제로는 2층 집이 존재했고 단층이 선호된 건 여러가지 복합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한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자 3가지 이유를 든 거예요. 성리학보다는 다른 것의 이유를 강조한거죠. 그리고 건축문화에는 성리학적 이념도 일정부분은 영향을 줬습니다. 송나라와 조선 모두 성리학이라는 같은 학문을 공유해했지만 송나라와 조선의 국가 시스템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은 구한말의 혼란이 강조돼서 잊혀지는 부분인데 그 전까지는 정도전이 삼봉집에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라는 말을 박아넣을 정도로 동시대 국가 중 민본주의를 꽤 강조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게 잠깐 반짝하고 끝난 것도 아니고 영조정조의 시기까지도 왕들은 사치를 지양하고 백성의 삶을 우선시하는 것을 덕목으로 여겼죠. 또한 일례로 세종 때 과한 사치는 백성에게 고통이 된다는 점을 들어 궁궐의 사치스러운 부분을 개선한 적이 있습니다. 왕이 솔선수범하니 다른 사람들도 대놓고 사치하진 않고 어느정도 자중하는 분위기를 보였죠. 물론 꾸미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 다들 가능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긴 했지만요 ㅎㅎ 다만 이와 별개로 성리학으로 인해 조선에 2층 집을 모두 없앴거나, 짓지 못하게 해서 단층만이 존재했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첫 댓글에서 말했듯이 조선시대에 다층 건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많은 자료들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미숫가루찌개 조선시대는 도성이나 읍락 같이 큰 거주지 뿐만 아니라, 시골 촌구석에서도 여럿이 촌락을 이루고 모여서 살았어요. 농사일 하는 사람이면 산속에서 1,2 가구씩 못 살아요 그러니 사람 모여 사는데는 땔감 구하기 힘들고, 더구다나 땔감용으로 쓸만한 크기와 수종이 있습니다. 지리산 골짜기 같이 험한 산중에는 나무꾼이나 숯 장인, 사냥꾼 그런 사람들이나 숲속에서 동종업자끼리 모여사는거죠 또 과거엔 대다수가 농부에요
일단 2층 건물 못지은설을 보면 1. 온돌특성 2. 성리학적 관점 3. 중국 4. 나무 등이 있는 거 같은데 장영실같은 공돌이를 보유하고있던 조선에서 2층이라고 온돌을 못하는 건 말이 안되는 거 같고, 중국이 못짓게 했다가 일리가 있어보입니다. 영화 천문만 보더라도 외압으로 인해서 결국 장영실이 내쳐지죠. 그만큼 눈치를 보고 살았으니까요. 성리학적으로 겸손을 운운하기엔 중국은 2층 3층 지었고, 좌식문화라하면 일본도 만만치 않은데 건물 잘만올렸죠. 나무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당시 초가집들도 있고, 황토나 돌로 벽을 세우는데...역시 외압설에 한표입니다!
신라시대 부터 고려시대까지 복층이 존재합니다. 고려도경을 쓴 서긍의 기록에는 심지어 대식국 아랍사람들이 건설한 모스크에 대한 얘기도 나올정도인데 황제국에서 제후국으로 떨어져버린 시점에 복층구조를 할 수 없던게 아닐까? 하는 설도 존재 합니다. 조선이 왜곡한 고려를 제대로 볼 수 없는게 아쉽군요.
@@ai-ll5yb 일단 무역은 운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했습니다. 중동이랑 무역했으니까 고려가 조선보다 뛰어난 나라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중동사람들이 고려로 와준거지 고려인들이 정기적으로 중동으로 직접 가서 무역한거 아니잖아요. 중동사람들의 메인은 중국이지 고려는 서브적인 요소입니다.
@@SuperWonder님 말대로 절대적으로 고려 때보다 조선이 무역과 상업이 더 발달한 사실은 동의합니다. 다만 경제성장이란 것은 타국과 비교가 핵심입니다. 조선은 그런 것을 천대한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은 고려보다 발전했지만 타국에 비교해 느린 경제성장에 의해 국방력 강화에 느렸습니다. 한번 당할 때는 실수라 할 수 있지만 두 번이나 당했다는 것은 실력이라 할 수 있죠
우리 문화 우수한 점이 많지만 건축은 솔직히 서양이나 이슬람, 중국 일본 태국보다 후달리는게 사실임. 비단 고층건물만 없는게 아님. 다른 나라 절경을 보면 절벽이나 높은 고지대에 마을을 짓는게 매력임. 우리는 평지나 골짜기에만 짓는 습성이 있는데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함. 이전 시대는 모르겠는데 조선 시대 건축물은 유교조선의 정서 때문이 아닐까 싶음. 보수적이고 표현을 자제하고 도전의식이 없음. 그래서 옆나라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조선은 상업에도 소극적. 아마도 토지 중심의 농경 양반 사회가 너무 지배적이어서 그런거 같음.
현대에 박정희가 무슨 나무심기해서 산림화 이뤄진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당시 기름 및 연탄 보일러의 보급으로 죽어라 나무 캐는 일이 싹 없어졌음...나무 하는게 거의 중노동이였고 나무 난방이 즉시성이 없어서 불편해 재빠르게 도태됐음...조선시대에 황폐화가 된게 아니고 조선시대에 "인구가 증가"했기때문입니다 고려시대에 온돌이 없었던것도 아니고 삼국시대부터 있엇던건데
@@SuperWonder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그런데 왜국은 몇 개의 도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기사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
우선 고려시대의 기온과 조선시대의 기온이 다름. 1) 조선실록으로 조선초 기온을 유추 하면 연평균 기온 6~7도임 현재 13도 근방과 7도 정도 차이 나는데 이건 조선 초 기온이 엄청나게 추웠다 이렇게 볼 수 있음. 2) 고려초중기 기록을 보자면 산동반도는 섬이었고 천진은 평야지대가 아닌 나루터였음. 황궁에 귤을 재배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현재와 기온이 상당히 달랐을 거라 유추 함. 즉 해수면 라인이 5m 이상 상승 할만한 기온이고 귤나무가 죽지 않을 정도라면 연평균기온 16도 이상은 되야 하지 않아야 생각함. 그러니 온돌문화가 아님.
@@rovins-xv3yl 현대의 온돌은 바닥에 금속관이 설치되고 그 관속에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 바닥이 따듯해지는 원리 입니다. 하지만 천장에 금속관을 설치하고 물을 흘려보내면 무게가 엄청나게 무거워져 천장이 그 무게를 못버텨 서서히 내려 앉을겁니다. 그리고 이 역시 효율이 엄청 떨어집니다. 물을 순환시킬때 계속 차갑게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럴빠에 에어컨 하나로 찬공기를 만들어 내는게 효과가 더 좋거든요.
아무리 핑계 대봐야 가난해서 입니다. ㅋㅋㅋ 삼국시대때는 한국도 2층집이 있었고요. 조선때도 사치건물들은 2층으로 지었지요. 당시 2층집의 건물가치는 10배가 넘었습니다. 얼마나 사치로 봤는지 알수 있음. 당시 사진 자료 보면 한양에 2층집이 아예 없다는게 증명되어 있지요. 일제 핑계 대는 역사 왜곡도 사진 증거가 있어서 소용없습니다.
건축전공자임 조선시대때 좀 더 생각을 했더라면 충분히 2층으로 온돌을 올릴 수 있음. '조금만 더 생각하면' 가능한데 그걸 안한 거임.... 특히 연도, 연통, 굴뚝이 그 키포인트. 문제는 자재가 너무많이 들어가고 하중도 심해져서 감히 세울 염두를 못했을 수도 있음. 아님 심벽이라도 두껍게 쳐서 단열이라도 높히던지...조상의 지혜는 맞는데 좀 모자른 느낌이 있지 않나 싶음.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을 할려면 댓글이 많이 길어지니 궁금하면 500원) 하지만 목구조의 한계가 좀 있는 지라 아마 이 부분도 구현하는데 많은 장애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함. 만약, 어차피 돈 많은 나랏님이라면 가능한 금액이니 2층까지 온돌을 했더라면 그 목수는 궁정목수가 되서 대대손손 영광을 누리게 되지 않았을까....
@@사초-n4c 자기의 주장이나 생각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따르고 섬기는 태도입니다 우리나라의 위치 상 사대주의가 많은 건 사실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지배하는 양반 집안의 가치관에 따라 노비들도 움직일 정도였으니까요 각 나라마다 위치에 따라 국민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많이 끼친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일제강점기때 한반도로 넘어온 일본인들이 멋모르고 일본식 2층집을 지었다가 된통 후회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겨울에 얼어죽을뻔하고 조선인들에게 한옥집을 구매해서 한옥에서 온돌 때면서 살았다고 하죠 ㅋㅋ 그래서 사실 아이러니긴하지만 조선총독부에서 온돌의 현대화에 많은 노력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조선인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2층에도 올릴 수 있는지 기술자문을 구해보고 아궁이에 철문을 붙여서 열효율을 높이거나 삼림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 나무가 아닌 대체연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죠. 지들 생각에는 앞으로 계속 자기네들이 백년만년 살땅이라고 생각해서 온돌을 어떻게든 2층집에 올려서 만들어보거나 효율을 높여보려고 한 것 같습니다. 또한 만주로 진출해야하는데 거긴 한반도 보다 더 추우니 온돌을 만주에도 보급하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이때 만들어진 근대식 온돌이 한국전쟁 이후 보급되는 연탄식 보일러의 기초가 됐습니다.
조선 시대에 건축 기술이 없어서는 당연히 아님 그것보단 정책적인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함 가령 조선시대엔 바퀴가 거의 없었는데 이유가 ‘도로를 닦아 놓으면 적이 쳐들어오기 편해진다’라는 터무니 없는 말이 조선 초에 받아 들여져서였음 19세기 초에 사진이 남아 있는데 바퀴를 제대로 사용 못해서 인력거에 사용된 바퀴는 외발이었음
@@SuperWonder 대동여지도 만든 김정호사 처형 당한 이유가 외적에게 조선 지리를 알린다. 즉 간첩행위를 했다.. 도로를 딱아놓으면 그길로 외적이 처들어온다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큰 도로를 안만들었다고 봐도 될겁니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복이 많은 지역은 산골짜기 외부로 부터 차단된곳 입니다. 경북북부에 양반이 많은것도 그런 이유일거라 봅니다.
한 겨울에 보일러 고장 한번 겪어 보니까. 왜 바닥난방이 아니면 좌식 생활이 불가능한 줄 뼈져리게 알겠더군요. 온풍기를 틀어봐야 방에서 슬리퍼로도 안되고 그냥 외부에서 신는 제대로 된 신발을 두툼한 양말 포함해서 신어야 했음. 발바닥이 얼음장이면 공기 온도가 따뜻한 거 다 소용없었음. 어떤게 더 선진적이고 뭐고가 아니라... 그 환경에서는 그게 최선이니까 그렇게 된 거더라는.. 바닥난방이 되면 내가 미쳤다고 깝깝하게 방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을까.. 바닥 난방 안되면 겨울에 맨발로 있다가는 골병들어요.
@@Location_vacances 유럽에 있는 아파트들은 우리나라 아파트와는 아예 다른 생활공간입니다. 당연히 불편하고 추운데 개인주택을 선호할 수 밖에 없죠. 심지어 일본조차도 우리나라 아파트처럼 온돌 깔려있는 맨션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선수촌 와보고 선수들이 환장하는 겁니다.
이건 영상을 안봐도 온돌 때문인게 너무나 명백함, 고려때만 해도 남쪽 지역은 온돌이 필수가 아닐 수도 있으나 조선으로 오면서 정체성이 더 다듬어졌다고 볼 수 있음, 실제로 조선 말기 까지 지구온도는 계속 하락중 이였고 지금 지구 온도는 하락을 찍고 올라가는중, 베리사유 궁전을 지었으면 얼어 죽었다고 생각함
그 당시에 건물을 지탱하는 자재는 목재였기 때문에 한반도에는 대들보 처럼 넓은 스판을 지지하는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다. 속리산 법주사에 다층 목조탑을 가보아도 내부에 들어가면 짧은 스판에 기둥이 촘촘하게 들어차있어 내부 공간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 단단하고 균일한 최고의 목재는 황장목인데 강원도 대관령, 오대산, 울진 등에 분포했는데 나라에서 산지기를 두어 벌목을 막았을뿐만 아니라 궁궐의 큰 건물을 짓는데 독점하였다. 벌목을 했다해도 그 큰 자재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수단도 마땅치 않은 시대였다. 오늘 날에도 지어지는 큰 사찰 대웅전에 큰 건축물의 넓은 공간을 지탱하는 구간에는 큰 구경의 수입목을 쓴다. 그런 지름이 큰 규격의 나무를 국내에서 조달하지 못한다. 기둥류는 국내산 소나무를 사용하는데 질기고 단단하기 때문이다. 조선에 큰 건축물이 드믄 이유이기도 하다. 다층 구조의 건축물이 온돌 때문에 많이 없다는 것도 이해되는 이야기이고 이러한 자재 조달면에서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것도 일리있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원래부터 조선에도 다층 건물은 존재했는데, 구한말, 일제 치하에 이르러서는 노후된 다층 건물을 계속 유지한 게 아니라 1층만 남겨 놓고 날린 걸로 들었습니다. 그 때는 2층, 3층까지 유지할 여력이 없던가 혹은 그걸 그렇게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없던가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죠...
조선 전기 주택들,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는 아직도 임란 이전의 대규모 저택들이 생각보다 꽤 많이 남아있는데 2층의 누각을 비롯해서 중층의 구조가 비교적 많습니다. 온돌을 설치하기 힘들어서 중층의 주택이 많이 지어지지 않은 것도 일부는 사실이지만 지금 덕수궁에 석어당만 보더라도 궁궐에는 19세기만 해도 2층 전각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습니다. 17세기에 지어진 한옥들(사대부가를 말하는 겁니다)에도 생각보다 누각형식의 중층 구조인 한옥이 많이 남아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 후기 한옥에서도 상점이나 혹은 대규모 저택의 경우 다락을 비롯해서 중층의 요소가 많습니다.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와 창덕궁,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도 18-19세기만 봐도 생활 공간으로 중층인 건물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고요.
조선시대 후반에도 3층건물 많았어요...... 금산사, 수향루, 안동김씨 태장대사, 경회루, 석어당도 있고 경복궁의 징광루, 제주의 망경루랑 서울 인사동의 관훈재, 담양의 김선재 가옥, 상주의 대산루 등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조선시대 때가 유독 많이 안만들었던거지 여말선초까지 3층 이상 건물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리고 추운 날씨때문에 온돌 온돌이 많아져서 단층이 많아졌다곤 하지만 고려에는 수혈주거같은 원시의 주거형태도 많았고 복층의 기와건물들은 지방향주나 호족, 관리의 시설이였습니다. 사실상 지금 북한지역에 3층이상의 건물들이 더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논리에 맞지 않죠 ..... 최대규모는 당연 절이 많았구요 .... 실상은 온돌 하나때문이 아니라 명나라의 제한때문에 고층을 짓기 어려웠습니다 모르면 찾아보면 될것을 연구된적도 없는 어줍잖은 커뮤니티글을 그대로 복사해오면 어떡합니까....
중국 일본은 사실 조선이 부럽다 ㅋㅋㅋㅋㅋ 어마무시한 역사와 문화적 향유를 이뤄낸 반만년의 역사에서 자신들의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ㅋㅋㅋㅋ중국일본은 직지도 없고 한글도없고 세종도 없고 이순신도 없고 김구도없고 홍범도도 없고 온돌도 없고 유물도없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중국역사는 꼴랑 한나라 송나라 수백년이 전부 ㅋㅋㅋㅋ 일본은 기원전의 역사가없음 ㅋㅋㅋㅋ 일본뿌리자체가 조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마나 비참할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네 ㅋㅋㅋㅋ
@@mangwonfish 소빙하기라 하더라도 일본은 해양성 기후라 완충이 된 것이라 차원이 다르죠. 북위 37도인 서울의 1월달 평균기온이 -2.4인데 북위 52도인 런던은 +5.2도이고, 북위 35도인 도쿄도 +5.2이죠. 런던과 도쿄의 1월달 기온이 서울 3월달 평균기온과 비슷합니다. 서울 3월달에는 난방없이 생존이 가능하지만 1월달은 사망하죠. 지구에 소빙하기가 오더라도 지역별 편차가 심했어요. 마지막 간빙기에 거대포유류를 멸종시켰던 영거드라이아스기도 북반구 특정지역이 추웠고 적도와 남반구는 오히려 기온이 올라갔어요.
그건 조선의 난방방식인 특징때문에 구지 2층으로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 단 연회라던가 오락 용이 목적인 건축물들은 복층건물로 지어지는경우가 있음... 건축 기술이 떨어져서가 아님 구지 필요성이 없기 때문임....때문에 조선은 멋보단 실용성 위주로 건축물이 발전했다고 보면됨.
이 영상은 진짜 추측일 뿐인 주장 같습니다! 온돌은 겨울과 북쪽지역에 한정되는 근거일 뿐이죠. 제 생각에는 조선이 충분히 잘 살고 기술력이 있었다면 1층에 온돌 2층에 마룻바닥으로 1층에서 따뜻한 겨울을 나고 지열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2층에서 시원한 여름을 날 것 같은데 조정에서 착취도 심하고 농사 이외에 상공기술을 천대시 하니까 건축기술이 이전 신라, 고려, 삼국 시대에 비해 퇴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또 온돌 때문에 목자재의 소비가 심해서 2층으로 올릴만한 충분한 건축 자재의 부재도 한 몫 했을 것 같네요. 온돌이라는 것이 그렇게 고급 기술도 아닌데(만들기도 쉬운데) 그것이 그렇게 좋았다면 왜 문화 교류가 많았던 한중일 모두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DoJM-y 불국사, 석굴암만 봐도 알 수 있죠. 단단한 화강암을 자유자재로 깍아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으로 만든 조형물이 조선 유물에는 없습니다. 또한 삼국, 고려시대 유물을 원형이 보존된 것이 거의 없으나 당시 건출물 터에서 발굴 된 기와 부품(치미나 막새 등)을 보면 조선의 건축 규모를 훨씬 뛰어 넘는다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일본 성의 치미와 사이즈가 비슷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 건축된 건물들 중에서 그나마 수원 화성정도 체계적으로 지었다고 볼 수 있지만 삼국시대의 건축 규모와 화려함에는 비교할만한 것이 못된다고 봅니다. 건축 뿐만이 아니라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는 신라, 백제의 의복, 왕가 귀족의 장신구만 보더라도 세공 기술이 조선과 비교 불가죠. 그런걸 보며 조선시대 사람들을 소박한걸 좋아하고 여백의 미를 안다고 자위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냥 기술이 없어서 못 한 것일 뿐입니다.
@@DoJM-y 제 댓글에 발끈하셨다면 어투를 제가 잘못선택한것 같아 죄송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조선이전의 유물은 남아 있는게 거의 없어요! 그래서 기록과 남아있는 부분을 보고 유추하는 것입니다! 건축물의 땅넓이는 건축기술과는 아무 연관이 없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건축기술이 발달했다라고 하면 안에 들어가는 장식이나 건축구조 등을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죠! 황룡사 9층 목탑은 80미터높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그 어떤 구조물도 비슷한 높이로 만든 것이 없죠. 또 고려나 삼국시대의 유물중에 남아 있는 기와 조각들을 보면 당시의 기술이 조선시대보다 더 우월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여요. 무지성으로 조선을 비판한적은 없고 조선의 기술은 이전의 한반도 국가에 비해서 퇴보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댓글이 너무 감정적이신것 같아 좀 아쉽네요!!
이씨조선이 거지나라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일본은 서민 가옥도 2층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 그림을 보면, 일본의 거리는 나름 깨끗이 단장이 잘돼 있는 모습과 2층 가옥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하여 조선통신사들의 경비일체를 일본이 부담하였다고 하니, 경제력이 비교되는 대묵 입니다(우리는 이를 미화하여 일본이 요청하 였다고 하는 데, 일본측의 실상은 거지새끼들 을 대접할려니 정신적 고통이었다 합니다) .
조선의 경비를 일본이 부담하는것 자체가 우리가 정치/외교 측면에서 대접받는다는 뜻인데 뭔 이상한 소리입니까? 걔들이 진짜 호구도 아니고 우리가 거지라서 불쌍해서 해줬다는게 국제관계에서 말이 되는 소리라 보십니까? 전쟁 직후 기유약조 맺으며 우리와 다시 외교 관계를 맺는게 자기들 국익에 도움이 되니까 본인들이 사신 대접비용 대면서 대려오는거지 어떻게 저런시선으로 평가할수 있는거지
@@josericky1488 네. 맞습니다. 이 나라가 근대에까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위정자들의 무능도 있었습니다만, 긍극적으로 삼국이후 대륙의 영토를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수당과 맞장뜰 정도로 강성했던 이유도 물자가 풍부한 산서성의 분지지역과 하북성의 하북평야에 기반한 농업생산력과 함께 상당한 인구력에 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하고 산서성과 하북성을 잃어버렸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요녕성지역을 상실하였으며, 왕씨고려시대에는 요동반도까지 상실하였습니다. 허나 영토회복도 잠시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기회는 요원하게 되면서, 반도에 갖히게 되고 80%의 산지로 형성된 반도에는 사람도 없고 물자도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자 외세에 대항할 힘조차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민족이 약화된 역사적 루틴입니다.
@@Am-Tigro-gp4dd 온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보일러는 뜨거운 물이 돌고돌아서 방을 데운다.. 이런 시스템은 미국인이 개발했고. 우리 온돌은 그저 부억에서 밥할때 불을떼는데 거기에서 뜨거운 연기로 바닥을 데우는 방식.. 뜨거울까? 지금 시멘트 바닥에선 잘안되지.
高麗의 麗는 마을이름인 경우 려 이고 국가이름일경우 리 라고 불러야됨 꼬우면 백과사전 욕하셈 6070년대 사람들도 고리 라고 불렀음 참고 조선시대 수준의 집에서 살았던 분 말들으면 온돌 때워도 겁나 춥다함 바닥을 댑혀도 방의 난방이 열을 가두지 못해서 밖하고 온도가 거의 차이 안났다 함 그래서 방바닥은 뜨거운데 방온도는 차가운경우도 있었다 했음 가장 따뜻한 곳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곳이였다 했고 참고로 조선초까지만 해도 2층건물은 양반들도 있었음 그러나 모종의 사건으로 1층으로 바뀐거임 그리고 집전채를 깔아버리는 온돌은 빠르면 고리때 나타난것임 그리고 가장 큰 원인이 조선이 경제를 나락으로 보내버리는 경제체제를 선택해서임 그당시 오죽하면 로마 교황청도 고리를 알고있었음 그러나 조선을 몰랐고 구한말때 접했고 그래서 조롱겸 해서 조선을 고요한 나라 아침의 나라 라고 불렀던거임 경제는 고리가 최강이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