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폭력 헤겔의 과 아도르노의 사이의 논쟁은 한국어로 “지양”으로 번역되는 Aufheben이란 개념으로 집중된다. 이 개념을 중심으로 역사에 대한 신뢰의 해석학과 의혹의 해석학은 양방향으로 갈라진다. 역사의 동일성과 부정성 사이의 싸움은 헤겔로부터 시작 되었다. 동일성이 역사의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진행되어 온 역사를 긍정하는 개념이라면 부정성은 타자성의 희생에 근거하여 승리를 거둔 동일성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부정성의 명예를 회복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신의 섭리와 그것에 대한 부정 역시 이 개념 안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이 개념을 보다 쉽게 설명함으로써 그대들의 철학적 사유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헤겔은 에서 역사가 변증법적 운동에 근거하여 발전해 간다고 보았다. 변증법적 운동을 역사 속에서 이끌어가는 것은 바로 기독교신학의 "성령"을 의미하는 절대정신이다. 이로써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성으로서의 절대정신은 역사의 운동과 연관된다. 그렇다면 헤겔의 변증법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사태의 시작을 알리는 즉자의 정(正)과 이 사태를 맞은편의 대상으로 세울 수 있는 대자의 반(反)과 정과 반의 결합을 통하여 부정적인 것은 제거하고 긍정적인 것은 보존하는 즉자와 대자의 합(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하여 하나의 계기가 끝나면 다시 새로운 계기로 넘어가게 되고 새로운 계기는 또다시 이전 계기의 합으로부터 새로운 변증법적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역사는 마지막 종착지인 절대정신의 절대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정-반-합의 진행 속에 시간적 움직임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운동이다. 그런데 Aufheben은 바로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에 움직임의 동력을 제공하는 핵심개념이다. 이 단어는 “위”를 의미하는 auf와 “끌어올리다”를 의미하는 heben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위로 끌어올리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의 단어 안에 “폐기하다”와 “보존하다”를 동시에 가리키는 정반대의 양가적 의미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부정성과 타자성을 폐기하는 동시에 자아성과 동일성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다. 역사의 부정성과 타자성은 전쟁, 살해, 부조리, 고통, 모순, 십자가를 가리키고 동일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멈추지 않고 부정성과 타자성을 지양하면서 신의 나라의 영광을 향하여 계속 진행해 나간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역사의 부정성은 마지막 때에 완성될 신의 나라의 희생양이란 말인가? 신의 나라는 타자성의 희생에 근거하여 세워지는 절대정신의 영광이란 말인가? 여기에 헤겔의 역사철학의 모순이 숨어있다. 이 사유의 핵심에서 신정론의 문제를 제기하는 의심의 해석학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섭리의 궁극적 화해를 받아들이는 신뢰의 해석학이 양방향으로 갈라진다. 실제로 헤겔은 자신의 에서 의 부정성과 동일성에 대한 사유를 대변해주는 말을 한다. “서로 투쟁하며 일부가 멸망되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다. 대립하고 투쟁하며 위험에 빠지는 것은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신이 아니다. 신은 침해받지 않고 손상되지 않은 채 배후에 남아있다. 신의 이념이 자신을 위하여 역사 속에서 열정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은 이성의 간계라고 불리어진다. 대체로 인간의 개별적인 것은 신의 보편적인 것에 비해 지나치게 가치가 없으며 개인들은 희생되고 포기된다. 신은 세계를 지배하며 그의 계획의 성취는 세계사다. 철학은 그의 계획을 파악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섭리 안에서 성취되는 것만이 현실성을 획득하고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그릇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헤겔의 이 말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신의 섭리를 정당화하는 “이성의 간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대들은 신의 섭리를 믿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때에 신이 가져올 궁극적 화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이 세계의 악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깔뱅의 예정론 역시 헤겔의 역사철학적 사유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불가능성을 상징하는 에서로 태어나고 또 다른 사람은 구원을 상징하는 야곱으로 태어난다. 이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것이 신의 섭리이고 뜻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는가?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세계 창조 이전부터 신이 미리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이 부조리한 예정론을 우리는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이런 신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나서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에서 이반의 입술을 통하여 제기하는 신정론의 문제는 마지막 때에 발생할 신의 조화와 화해를 타자성의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전제함으로써 올바른 응답을 얻은 것인가? 여기에 섭리론과 신정론 사이의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아포리아가 숨어있다. 죄 없이 살해당한 어린아이의 영혼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가? 마지막 때에 신이 역사의 부정성을 보상의 긍정성으로 화해시킨다고 하더라도 어린아이의 죽음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선한 신이 행한 것이 아니라 악한 신이 행한 것이다. 곧 악마가 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만족스러운 응답이 얻어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악마의 간계를 허락하는 불완전한 신을 우리는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깔뱅의 예정론은 대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몰트만의 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언제나 타자성을 희생시킨 부정성의 흔적이 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철학에서 욕망의 무의식의 흔적일 수도 있고 타자성의 폭력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드러나는 “이성의 간계”의 흔적일 것이다. 타자성을 희생시킨 역사의 부정성을 동일성으로 정당화시키는 헤겔의 사유! 아도르노의 은 이것에 대한 반기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예도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 선생님. 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붙잡고 씨름하느라 그간 소식을 들려 드리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이제 선생님의 정신현상학 강의를 통해 셸링 , 피히테 , 헤겔사상의 영역 속으로 사유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예도 강의를 잘듣기위해 헤겔 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간단히 예습을 하고 강좌를 듣습니다. 예습의 결과 예도 강의가 좀더 잘들리는 군요 , 철학자 헤겔의 사유의 철저함과 폭과 깊이가 느껴집니다. 헤겔의 철학이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과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러워보입니다. 예도 TV 강의를 자주 듣다보니 좀 더 똑똑해 지는 것 같군요 . 역시 배우지 않으면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모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