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ㅠ.ㅠ 건강관리 잘 하시구요... ㅠ.ㅠ 인도네시아라... 국제결혼에서 이제는 무슬림에 대한것도 생각을 하는 시대가 왔네요. 감당해야 하는게 참 많아졌습니다. 가끔 여행객들중에 인도네시아 사람들 보긴 하는데 딱히 이쁘다는 생각은 안들었네요. 물론 옷이나 치장을 여성의 볼륨이나 라인에 맞춰서 하진 않았으니... 하지만 중년 아줌마들은 드럼통? 화가 되신 분들이 좀 많았네요. ㄷㄷㄷ 다음 2부도 꼭 기대하겠습니다. ^^;
인도네시아 여성분들 슬랜더에 볼륨감 있는 것 맞습니다. 그리고 보수적인 마인드가 있어요. 그래서 결혼할 여자가 아니라면 안 건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저처럼 결혼을 목적으로 사귀는 것은 괜찮지만요. 그것도 가족(특히 여성의 어머니)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카르타에서 1년 살아봤는데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신것 공감하면서 봤어요^^ 발전하면 참좋겠다 싶은 개도국중에 하나인데 ..나라가 발전을 못하는건 국민성도 큰듯해요.. 교육수준이 낮아서 자기발전보다 하루먹고 살기 바쁜 근데 그이상 욕심도 없는 집안일 도와주는 여러 현지인들을 봐서; 그저 착한거로는 인생이 어려울수도 있다는게 좀 안타깝고 그래요. 실질적으로 상위계층은 화교비율이 많아 좀 안타깝기도하고요
인도네시아가 내수가 탄탄하고 앞으로 발전할 국가인 것은 맞는데, 인도네시아의 주요재벌 리스트를 보면 대부분 내수업종에다가 수출이라해도 나중에 탄소배출권에 발목잡힐 업종이 많음. 이런 경우에 나라지도자가 중요한데 그냥 덩치큰 태국이 될 가능성이 많음.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국가신용은 중국보다 약간 위임. 믿지못할 국가.
어쨌튼 인도네시아는 지구에 있는건 확실해 보입니다. 😆😁 인도가 인구가 많고 땅도 커서 발전잠재력은 크나 신분제의 한계때문에 발전폭이 더딘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듯 합니다. 인도네시아는 그런 족쇄가 별로 없으니 긍정적인 요인이 많아보입니다. 다만 이슬람국가로서의 리스크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잘사는 선진국들은 대개 기독교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신분제언급중 일본에 기득권을 팔아먹었다는 견해에 상당히 공감합니다.원치 않았는데 강압적으로 실행된 것이냐? 아니면 자발적이고 적극적 능동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었느냐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적극적으로 기득권을 일본에 팔아먹는 행위와 동시에 일본측에서도 이러한 조선내부의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이러한 미끼를 던지는 집요한 공작들을 해오고 있는듯 합니다. 미국 의회를 로비로 매수해서 일본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이끌어내고 지금 일본이 하는 핵심전략중 하나가 한국내 이순신미리찾기라고 하네요. 중국은 연개소문에 대한 울렁증이 있듯이 일본은 이순신에 대한 울렁증이 심한듯 합니다. 한국인들의 DNA중 이순신의 DNA가 언제든 튀어나올 확률이 높으니 이런 볼썽푸른 떡잎을 미리 찾아 일본의 적극적인 후원의 성은을 입게해 예비이순신같은 인물들을 미리 친일파로 개조시키는 작업이 지금도 충실히 진행되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어쨌튼 인도네시아 여자들 좋은 점이 많이 있군요. 지금 한국여자들에게 찾아보기힘든 남자를 공경하는 자세라든가 알뜰한 마인드 참 좋은거 같아요. 그리고 들어갈데 들어가고 나올데 나오고 신체적 매력까지 탁월한가 봅니다. 근데 역시 이슬람교국가라서 여자와 사귀고 결혼하려면 한국남자가 이슬람교도로 개종하거나 편입되어야 가능한듯 합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이슬람 관습율법 샤리아에 따라 혼전성교나 혼외동거를 형사처벌시킨다고 해서 서양인들이 인도네시아 가기를 꺼린다고 들었습니다. 외국인도 처벌된다고 했는데 다시 법을 완화시켰는지는 모르겠네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들에게는 인도네시아가 별천지겠네요. 허나 이슬람교도로 입교 개종을 해서 살아야 하니 상당히 큰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듯 합니다. ^^
긴 댓글이 써지지 않으니 나눠서 내용을 달아 드릴께요: ) ((❤하나❤)) 요즘 알려지는 역사적 진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은 이완용이 아니라 고종이었다는 거다. 수 많은 관련 기록과 증거는 너무 명약관화하다. 그럼에도 그 자료들을 공부하고 연구한 학자들은 전부 자신들의 견해를 유보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중고교 시절부터 엉터리 국사를 배운 것이다. 나는 고종이 막판에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었는지 설명을 좀 해 보련다.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부터 하겠다. 우리는 순전히 문학적 표현으로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예를 들면 적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반역을 함으로써 상대방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게 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므로 이완용같은 자가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거나 엄청난 재물을 약속받고 나라가 일본으로 넘어가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대한제국은 일본에 팔린 것이 맞다. 대한제국은 고종의 소유물이었으며, 고종이 돈이 다 떨어지자 계약서에 도장을 꽝하고 찍은 것이었던 것이다. 조선과는 달리 대한제국은 황제의 소유물로 되어 있었다. 1897 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899 년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제국의 "대한국제"를 발표하였다. 헌법인 대한국제는 총 9조로 되어 있고, 모든 것은 다 황제가 결정하며, 모든 것은 다 황제의 소유다 라고 정의해 버렸다. 아무리 다른 국가들이 제국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해도 입헌 군주국조차 황제나 여왕이 나라를 소유하는 형태는 없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대한제국만 황제 개인 소유의 국가였던 것이다. 황제는 무제한 권한과 무오류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누구도 황제를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영일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겠다는 일본에 혐조를 하게 된다. 러시아는 겨울철에 무역을 할 수 없었다. 부동항이 없었다. 한 계절 무역을 못한다는 것은 그 만큼 부를 쌓을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흑해는 터키의 내해나 다름 없었다. 러시아는 청나라가 비실비실한 틈을 타서 연해주를 먹고, 거기다가 동방을 정복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톡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블라디보스톡도 완전 부동항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한반도의 진해같은 도시를 원하고 있었다. 일본은 약삭빠르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 제국에 달라 붙었고, 러시아의 확장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은 일본에 함정을 만들어도 주고 팔아도 주고 해군을 육성시켜준다. 러시아만 막아라. 일본은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는데 골몰하는데, 우리의 고종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에만 기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4 년 일본은 육군이 만주에서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 조선 땅에 육군기지가 필요했는데, 놀랍게도 그 육군 기지는 창덕궁으로 정해진다. 이런 해괴한 일이..... 이것은 한일 의정서에 의한 것인데.. 우리는 이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한일 관련 조약들은 총 4 개가 있다. 1차 조약 (한일의정서) 1904 년, 2차 조약 (을사보호조약, 혹자는 을사늑약이라부름) 1905 년. 3차 조약 (3차 한일의정서) 1907 년 4차 조약 한일합방 조약 1910 년 이다. 1차 조약은 일본군이 러시아를 침공하기 위하는데 대한제국이 제반 사항을 협조한다는 것이고, 2 차 조약은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것이며, 3차 조약은 군사, 사법, 행정인사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조약이다. 사람들은 2차 조약인 을사조약을 가장 강한 조약이라고 치지만, 내가 보기엔 1차 조약이다. 이것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일본 육군 사령부를 왕이 사는 창덕궁에 세울 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추론이 가능한 문서는 영국의 외교 문서 중에 나왔다. 1904 년 이토 히로부미가 갑자기 고종을 만났는데, 왜 만났는지 무슨 일을 논의했는지 실록에는 없다. 실록에는 갑자기 만났다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건에 대하여 당시 영국 공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 30 만원, 대신들에게 50 만원을 나눠 줬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돈의 가치는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각각 300 억, 500 억의 위력이 있는 돈이라는 점. 돈이 쪼들리던 고종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그 돈을 받고 너무나 기분이 좋은 나머지 창덕궁을 내 준 것이다. 놀랍게도 1904 년 봄에 일본 육군은 러시아를 이겨 버린다. 1905 년, 11월 17일은 그 유명한 을사조약이 일어난 날이다. 그 때 역시 고종은 3 만원 정도, 대신들 다 합치면 7 만원 정도 뇌물이 공여된 것으로 근거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을사조약의 액수는 많지 않은 편인데 여기에는 다른 스토리가 있다. 원래 정부의 재무부를 당시에는 탁지원적 진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은 이완용이 아니라 고종이었다는 거다. 수 많은 관련 기록과 증거는 너무 명약관화하다. 그럼에도 그 자료들을 공부하고 연구한 학자들은 전부 자신들의 견해를 유보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중고교 시절부터 엉터리 국사를 배운 것이다. 나는 고종이 막판에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었는지 설명을 좀 해 보련다.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부터 하겠다. 우리는 순전히 문학적 표현으로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예를 들면 적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반역을 함으로써 상대방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게 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므로 이완용같은 자가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거나 엄청난 재물을 약속받고 나라가 일본으로 넘어가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대한제국은 일본에 팔린 것이 맞다. 대한제국은 고종의 소유물이었으며, 고종이 돈이 다 떨어지자 계약서에 도장을 꽝하고 찍은 것이었던 것이다. 조선과는 달리 대한제국은 황제의 소유물로 되어 있었다. 1897 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899 년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제국의 "대한국제"를 발표하였다. 헌법인 대한국제는 총 9조로 되어 있고, 모든 것은 다 황제가 결정하며, 모든 것은 다 황제의 소유다 라고 정의해 버렸다. 아무리 다른 국가들이 제국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해도 입헌 군주국조차 황제나 여왕이 나라를 소유하는 형태는 없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대한제국만 황제 개인 소유의 국가였던 것이다. 황제는 무제한 권한과 무오류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누구도 황제를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영일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겠다는 일본에 혐조를 하게 된다. 러시아는 겨울철에 무역을 할 수 없었다. 부동항이 없었다. 한 계절 무역을 못한다는 것은 그 만큼 부를 쌓을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흑해는 터키의 내해나 다름 없었다. 러시아는 청나라가 비실비실한 틈을 타서 연해주를 먹고, 거기다가 동방을 정복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톡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블라디보스톡도 완전 부동항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한반도의 진해같은 도시를 원하고 있었다. 일본은 약삭빠르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 제국에 달라 붙었고, 러시아의 확장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은 일본에 함정을 만들어도 주고 팔아도 주고 해군을 육성시켜준다. 러시아만 막아라. 일본은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는데 골몰하는데, 우리의 고종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에만 기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4 년 일본은 육군이 만주에서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 조선 땅에 육군기지가 필요했는데, 놀랍게도 그 육군 기지는 창덕궁으로 정해진다. 이런 해괴한 일이..... 이것은 한일 의정서에 의한 것인데.. 우리는 이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둘❤)) 참고로 한일 관련 조약들은 총 4 개가 있다. 1차 조약 (한일의정서) 1904 년, 2차 조약 (을사보호조약, 혹자는 을사늑약이라부름) 1905 년. 3차 조약 (3차 한일의정서) 1907 년 4차 조약 한일합방 조약 1910 년 이다. 1차 조약은 일본군이 러시아를 침공하기 위하는데 대한제국이 제반 사항을 협조한다는 것이고, 2 차 조약은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것이며, 3차 조약은 군사, 사법, 행정인사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조약이다. 사람들은 2차 조약인 을사조약을 가장 강한 조약이라고 치지만, 내가 보기엔 1차 조약이다. 이것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일본 육군 사령부를 왕이 사는 창덕궁에 세울 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추론이 가능한 문서는 영국의 외교 문서 중에 나왔다. 1904 년 이토 히로부미가 갑자기 고종을 만났는데, 왜 만났는지 무슨 일을 논의했는지 실록에는 없다. 실록에는 갑자기 만났다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건에 대하여 당시 영국 공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 30 만원, 대신들에게 50 만원을 나눠 줬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돈의 가치는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각각 300 억, 500 억의 위력이 있는 돈이라는 점. 돈이 쪼들리던 고종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그 돈을 받고 너무나 기분이 좋은 나머지 창덕궁을 내 준 것이다. 놀랍게도 1904 년 봄에 일본 육군은 러시아를 이겨 버린다. 1905 년, 11월 17일은 그 유명한 을사조약이 일어난 날이다. 그 때 역시 고종은 3 만원 정도, 대신들 다 합치면 7 만원 정도 뇌물이 공여된 것으로 근거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을사조약의 액수는 많지 않은 편인데 여기에는 다른 스토리가 있다. 원래 정부의 재무부를 당시에는 탁지부로 불렀고, 황실의 재무는 내탕금이라 부르는데, 이게 통합되어 있었다. 고종은 정부 예산을 전부 돌려서 황실에서 썼다. 백성들은 피고름 나면서 살고 있었다. 정부뿐 아니라 황실도 조세를 거두고 있고..... 별 희한한 나라인데 얼마나 사치를 하는지 돈이 모자랐던 것이다. 이 때 일본인 재력가가 고종에게 150 만원 차관을 빌릴 방법을 제시한다. 물론 차관은 일본 정부에서 주는 것인데, 돈이 다 떨어진 고종의 황실에서 볼 때 눈이 번쩍 띄었던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와서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은 얼마 있으면 들어올 150 만원 (지금으로 치면 1500 억 쯤)이 눈에 아른 거린 것이다. 고종은 반대하는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잘 처리하라. 이토 히로부미가 말한다. 황제가 승인한 것이다라고... 150 만원은 간교한 꾀였다. 일본 공사는 12월 16 일 차관 공여 프로세스를 중단해 버리고 만다. 을사 조약을 한 날 밤 (다음 날 새벽 두시에도 궁궐은 환했고, 일본 병사들이 바글바글했는데 이는 고종이 어느 나라 공사관으로 튈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공사는 미리 우리에게는 오지 말아달라고 통지 하였다. (정말 쪽 팔린다.) 3차 조약은 뇌물을 줄 필요가 없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고종에게 화풀이 조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헤이그 밀사도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내용이었다. 헤이그 밀사 대표격은 20 살에 불과한 이위종이었다. 그는 외국어로 언론에 발표하기를 일본은 우리를 어떻게 해주기로 약속했는데 약속한 바대로 이행하지 않고 내용이 달라졌다. 뭐 이런 내용이다. 을사 조약이 부당함을 주장하는 밀사가 아니었던 셈이다. 마지막 한일합방 조약은 1910 년에 이뤄졌다. 고종은 이 계약서에 싸인 하면서 조선 총독부 1 년 예산의 10 %에 해당하는 연봉을 영원히 죽을 때까지 받기로 하였다. 그제서야 궁핍하던 생활은 펴졌고 안정되고 넉넉한(?) 생활이 가능해졌다. 나라를 매각함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