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래 고려의 국가적 행사였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성종 때 폐지했다. 유교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다시 부활시켰다. 이는 중국식 유교정치 아래 잃어버릴 뻔 했던 고려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당시 고려인들은 성종의 급격한 중국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hbee3293 적어도 천년간 삼국시대의 근간인 이데올로기를 하루아침에 유교로 바꿔버리니 문제가 생기는거임 천년간 불교를 종교를 넘어 백성들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린걸 니네ㅡ이제부터 우상숭배 금지 유교를 믿어라고 하면 당연히 백성들은 반발이 심해지겠지 엄청난 폐쇄적인 유교의 도입으로 자유롭고 남녀차별이 없던 사회가 유교의 경색적인 문화와 폐쇄적인 문화가 어우러져 역사를 후퇴시켰다는건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현실임
고려시대 자료들을 보면 관리들이 와이프에 등쌀에 못이겨 정사를 의논했다는썰도 있고 과부나 재혼의 허용이나 자유로운 연애 이혼과 재혼이 허물로 여겨지지 않을정도로 여성의 입지가 남성 못지 않았습니다. 특히 제일 큰 부분은 유산상속에 있어서도 첫째가 여성일경우 여성이 더 많이 가져갑니다…장자 승계의 원칙….등등
그만큼 친일파 청산이 없었다는게 대한민국 최대의 한이다. 친일파 청산만 했다면 지금보다 수십배 발전했을것이 바로 우리민족이다. 지금 코로나 정국에서 질서를 지켜나가는 것이며 한데 뭉쳐 위기를 극복해나가는건 그 어떤 민족보다 뛰어나다. 지금이라도 근현대사를 바로 잡아서 발전해나가야 한다...
장점: 한글 패치, 무시받던 의학을 띄워줌, 어느 정도 이루어진 전시 체제(전쟁 안 일어난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이 심해서 망하긴 했지만), 왕권을 붕당을 이용해 강화, 인재 선발에 능했음, 외교력으로 명군 참전, 전후 복구 어느 정도 완료(병자호란 때 논란이 되었던 청군에게 납치당한 여자들을 인간 취급 안 해준 것과 달리 왜란 이후에는 이러한 여자들 구제를 함, 대공 수미법, 훈련도감, 납속책) 몽진(잡혔으면 큰일날 뻔) 단점: 의주에서 안 끝나고 명 영토로 작정하고 도망가려고 함(몽진이 길어지면서 전쟁까지 길어짐, 전쟁 포기 시도, 나라를 버리려고 함, 명측에서 왕이 자기 나라 버리고 남의 땅으로 도망온다고 명측에서 거부함) 백성들의 신뢰를 저버림(밤에 몰래 몽진 감, 배를 타고 건너가는데 그 배를 백성이 타고 몽진 행렬을 따라오지 못하게 불사름) 광해군에게 양위 제스처 밀당 잘 뽑아놓고 이순신 의심;;(칠천량과 명량 해전의 원인이 됨) 명량 해전이라는 불리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순신을 그가 죽을 때까지 의심함;;;;; 그리고 명량 해전 승리를 폄하해버림(명 경리 양호가 이순신 직함을 되돌려달라고 요청, 그리고 조선 왕이 아닌 명 경리가 백금과 고급 물품을 선물로 줬음) 분조로 활동하던 광해군이 일 잘하니까 대견한 자식으로 여기기는커녕 엄청 견제하고 멀리함 인목대비와 영창 대군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도록 만들어버림 자식 교육 제대로 실패
그시대에서 살면서 그들의 세계에서 어울리면서 지켜보지 않았던 이상 머가 진실인지는 알수가 없는 거죠. 후세사람들이 알수 있는 것은 이름과 유적 유물 등 기록에 남은 것을 통해서 아는것 뿐인데 조선시대에서는 그들의 학문이었던 유교를 통해서 보면 엄청 부정적이게 보이는 것이고 표현이 자유로운 오늘날에는 유교를 통해 보인 그런 부정적인 모습을 버리고 다시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거겠죠. 제가 보기에도 좀 미화되는 것도 보이기도하고 조선시대는 너무 사람 부정적으로 나쁜놈으로 보는 경향도 있구...
조선이 정착 되게 하기위해 또한 고려 왕족이 다시 일어설 생각을 못하게 하기위해 불테 애퉈 죽이고 물에 돌매달아 생매장한게 이방원 고려 태종 이방원입니다. 왕씨들에게는 천추의 원수 .전주이씨 왕가들 특히 이방원 고려왕가들의 씨를 말릴려고 한 인간이다. 그러니 조선왕조 왕들이 다 왕씨귀신들의 저주를 받았는지 스스로 마음약해 서 미쳤는지 제명에 죽은 사람은 아니 지나치게 오래 살은 사람은 영조 뿐이다. 그래서 자식을 죽게 만들었네요. 영민하고 예민한 사도세자가 꺼뜪하면 효자인지 시험해볼려고 선위한다 원맨쇼를 8번이나 한 영조비위를 어떻게 맞추었겠나요? 그 때 마다 석고 대죄해서 눈맞고 비맞고 굶고 그러느라 병약해져서 궁권에서 죽음 당한 그 많은 영혼들이 사도세자를 미치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복궁품계 석을 볼 떄마다 얼마나 많은 신하들이 억울하게 죽었을 까 ? 생각한다.
고려 말에 불교가 얼마나 농민의 고혈을 빨았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하실텐데...유학은 그냥 허접하고 고리타분한 학문이 아니라, 당시에는 첨단을 달리는 학문이었습니다. 시대적 맥락을 생각하셔야지, 결과를 이미 아는 지금 입장에서 유학만 까대면 역사를 통찰하는 것 같은 태도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조선이라믄 나라가 대한민국, 한국 직전의 망한 왕조라는, 그리고 일제시대라는 것까지 더해져 가치판다하여 유교는 틀려먹었다는 논리구조는 좀 비약이 지나친게 아닌지, 그렇게 틀려먹은 나라라면 어떻게 500년 동안 유지가 되었을까요? 님 생각처럼 그렇게 허술한 나라가 아니에요. 건국 철학만 봐도 당시 기준으로도 정말 새빨갛고 급진적이며 혁신적인 나라였습니다. 정도전의 경자유전이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100% 실행 못된게 아쉬울 뿐... 나라가 망했다고 그 나라의 근간이 애초부터 글러먹었다는 식으로 비판한다면, 같은 논리로 고려의 토지제도가 글러먹었기 때문에 조선에게 망한거라는 설명도 가능하지요. 땅은 한정되 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수조권 붙여먹는 귀족들이 늘어나니 농민들이 죽어나가지요.
@@kdyu178 역시 유학을 잘못 이해하면 이렇게 됨 고려 말에 불교가 농민의 고혈을 빤게 아니라 권문세족이 나라를 망쳐버린거지 어디서 역사를 배웠는지 몰라도 한참 잘못 배웠네 유학은 중화사상을 견고히 하고 자기들을 황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학문임 유학을 제대로 배웠다면 적어도 자주국 정신을 계속 유지 했다면 유학을 이용할 생각을 해야지 오히려 그것에 빠져들어 나라를 망치는 원인이 된거지
제대로된 대하사극을 만들려면 역사 왜곡부터 좀 바로 잡읍시다. 성종은 고려를 제후국으로 격하시킨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유학을 장려하며 천자국의 여러 제도를 도입한 임금인데, 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날조해서 오명을 뒤집어 씌웁니까? 교서가 어쨌다구요? *교서): 제후(諸侯)의 명령서라 알려져 있으나, 이는 중국의 제도 및 용어들이 고려에서는 내용이나 의미가 서로 다르게 사용됐던 경우를 간과하여 발생한 선입견으로, 고려 전·중기 천자국(天子國) 제도의 교서를 14세기 이후 제후국(諸侯國) 제도의 교서와 혼동한 결과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당대의 사료인 『보한집』에 따르면, 교서의 연원과 관련하여 “원수(元狩) 6년(B.C.127)에 처음으로 고(誥)를 지으면서 대신에게 고시(告示)하기를 교(敎)라 하였는데, 이는 곧 진(秦)나라의 제도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고려 전·중기에 천자(天子)의 명령서였던 교서(敎書)는 제서(制書)·조서(詔書)·칙서(勅書) 등과 함께 정형화되었으니, 『동국이상국집』 권별 표제에서도 권 33 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경효대왕(敬孝大王)이 반원정책 시행 후 구제(舊制)를 복구한 시점에서 작성된 를 살펴보면, 서두에 선지(宣旨)라 하였으며 본문에 거론된 인물들에게 칙서(勅書)·선시(宣示)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