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이후 시대를 모티브로한 붉은단심에서 독을마시고 자살한 이태의 어머니가 짧지만 기억에 남아서 단경왕후가 주인공인 7일의왕비를 최근봤음. 연산군과 진성대군(중종)은 라이벌이고 단경왕후와 삼각관계라는 설정 역사와 너무나 다르지만 붉은단심에 이어 봤기에 여운은 길게남음 물론 드라마에서만요.. . 내기준 조선시대 왕의여인중 가장 불운한여인은 단경왕후같음 남편과 7년을 함께살고 남편은왕이되고 본인은 7일만에 폐비가되어 유배되다니..ㅠ . 드라마에선 중종과 단경왕후는 서로 너무 사랑했고 결말또한 슬프고 아름다웠지만(새피엔딩)... . 실제론 3명의 왕비교체를 제외하더라도 후궁도 많았고 경빈박씨가 찐첫사랑인게 너무 충격적임.. 신하들때문에 처음엔 못데려왔도 짬이찼을때는 두번째 계비의 아들때문에 세자책봉에 문제있을거라며 자기가막음 야사에서는 비구니가된 단경왕후 몰래 데려왔다고하는데 말이안됨 세번째 계비가 있고 수많은후궁과 아들만 15명ㅠ . 대군시절 연산군으로부터 지켜줄 가문이라 정략결혼했다해도 7년을 함께한 조강지처를 신하들의 반대때문에 헤어질순있지만 후에는 거부했음 정치를 잘했냐 그것도 아님 조광조 뽑아놓구 지보다 너무 우월하니 다시 왕자리 뺏길까봐 버린 임금 어차피 바지사장왕이니까 이렇게 무능력치에 팔랑귀 의리없는왕이 또있을지 인왕산 치마바위전설로 순정파이미지 단경왕후는 생이별후 50년을 그리워하며 혼자산게 너무슬픔 드라마는 너무 예쁘고 슬펐지만 그래서 배신감이 큰게 중종임 연산군에 가려 쩌리여서 몰랐던게 나았을꺼같음😭
근데 조선사 비운의 왕비 따지면 오히려 안억울할 왕비찾는게 더 힘들 듯. 이성계 마누라: 전처 사망 후 재혼한 후처가 조선건국도 돕고 지원도 빵빵하게 해줬는데 자기가 낳은 막내형제 왕 시키려다 자긴 후궁으로 강등되고 두 막내 왕자는 킬방원한테 살해당함. 킬방원 마누라: 왕자의 난 때 남편 걱정해서 칼들고 나서려고까지 했다는 여장부이심. 근데 정작 왕된 남편이 친정 노비 임신시키고 멋대로 임신시키고 방치하다가 용종잉태한 여자 부려먹었다고 친정 남자들 줄초상보냄. 헌신했더니 헌신짝으로 갚는 남의 편새끼. 아빠도 남동생도 다 죽었는데 심지어 허구언날 딴년끼고 다니면서 마누라가 바가지 긁어 못살겠네 폐위하자 징징댐. 어이는 지랄옆차기 헥토파스칼킥으로 날려버림. 세종마누라: 시애비라는 놈이 친정집 박살내서 조져버림. 남편은 여자 겁나 좋아함. 유순해서 후궁들과 잘 지냈다곤 하지만...... 문종 마누라: 아들 단종이 죄인으로 몰려 죽고 본인도 죽어서 수모를 겪음. 그래서 세조 꿈에 저주퍼부어서 병걸리게 했다고. 단종 마누라: 남편이 죄인됐으니 더 할 말이...? 성종 마누라: 남자가 여자 탐하는 건 당연한 것, 여자가 남자 탐하면 대역죄인 ㅅㅂ 더 할 말이 필요한가? 연산 마누라: 남편이 허구언날 여자끼고 다니면서 에베베벱하는 지거리를 봄. 그러다 쿠데타로 단체로 배드엔딩. 그나마 성격이 좋아 나쁜 평도 없고 연산이 그리워했다지만... 숙종 마누라: 야, 너 찐사랑 아니지? 마누라 둘 싸움붙여서 신하들 모가지 뎅겅하고 다니면서 막판에 후처(장희빈)는 악녀몰이함. 그리고 자기 마누라한테 사약 먹이기까지하면서 손수 죽음에 일조함.(심지어 그 마누라가 낳은 아들은 갈굼받고 자람. 킬방원은 적어도 자식한텐 좋은 아버지였다는데. 퉷) 영조 마누라: 중전이 죽을 때까지 처녀면 말 다했다. 개샹럼같으니! 마누라 생일잔치 때 쌍욕 퍼붓고 세자 앞에서 중전 패드립치는 불꽃유교 클라스 개오지고 지리고 조까시고~ 장례식 치루는 날에 사위 장례상 가고 지 엄마 신분 떨어지는거 갖고 남 괴롭히는데 평생을 다 바쳐서 사람이 산 거 같지도 않게 만드는 미친놈과 사느라 ㄹㅇ 죽을 때까지 고생하다 감. 심지어 마누라 죽고 지 아들보다 어린 애기를 후처라고 데려옴. 마누라한테도 자식한테도 손주한테도 해악만 끼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노답클라스~~~ 순정효황후: 조선의 마지막 중전. 그래도 나라 지키겠다고 남녀성차별 지엄하던 시절에 치마 폭 속에 옥새를 숨겨둠. 설마 큰아버지라는 새끼가 국모인 조카치마를 아이스께끼해버릴 줄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모두가 상상조차 못했을거다. 선대 중전 모가지 땄던 왜구놈들을 얼마나 빨아재꼈으면 선비의 나라에서 그딴 짓을 할 수 있었는지 그저 머단할 뿐. 아무튼 나라 망함. 태어나자마자 동학농민운동부터 겪었다하니 왜놈들 떼짓에 한국전쟁에 민주항쟁까지 진짜 별의별 망조 다 보고 살았을 듯.
중종의 부인을 보면 중전이 3명입니다.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이들은 본인이 원해서 들였다기보다는 당시 사회상상 혼인하지 않을 수 없던 이들이고요. 그렇기는 하지만 후궁이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귀인 한씨, 숙의 나씨, 숙의 이씨, 숙의 홍씨, 숙의 김씨, 숙원 이씨, 숙원 권씨, 이렇게 10명이네요. 이들에게서 13남 11녀를 보았고요. 아무리 반정으로 왕이 되어 일부 반정공신의 딸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들였다고는 하나 그건 정말 일부고 중종도 참 여자 좋아했네요;;; 저게 후궁에 간택된 사람들인 거고 여자 좋아했던 성향을 놓고볼 때 승은상궁들도 꽤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24명이나 보다니 정말 정력가고요. 이런데도 단경왕후와 1499년, 단경왕후 만 12세의 나이에 혼인해서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혼인 기간이 7년이었는데 임신한 적도 없는 걸 보면 단경왕후가 난임 체질이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합궁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부부 관계를 가진 기간이 2~3년은 될 것 같거든요. 기록을 보면 치마바위 야사가 전할 정도로 혼인 기간 중 사이가 좋았고 아직 젊은 중종이 당시에는 첩도 들이지 않고 부인이 단경왕후뿐이었어요. 위에서 보시는 것처럼 중종은 엄청난 정력가에 호색한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 옆에 사이 좋은 부인을 두고 그 부인을 안고 곱게 잠만 잤을 리 없습니다;;; 오히려 밤마다 밤마다 부부 관계를 가졌겠죠.
@@USER-han3namkill 아들이었다면 100% 폐위되지 않았을 테고요. 임신 중인데 단경왕후를 폐위했다 아들을 낳으면 온 나라가 왕손이 있다는 걸 아는데 이런저런 일에 이용될 가능성이 커요. 딸이었거나 당시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으니 사산/일찍 죽음이었으면 끊임없이 역적 집안의 딸이라며 탄핵당했을 겁니다. 이걸 당시로서는 사이가 좋기는 했으나 경빈 박씨, 희빈 홍씨에게 점점 마음이 가기 시작한 중종이 얼마나 감싸주었을지도 미지수고요. 뭐 역사에 만약은 존재하지 않죠^^
단경왕후의 능은 온릉으로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호국로 255-41 위치해 있습니다.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 있어 그동안 공개가 되지 않았는데 2019년 11월부터 시험 개방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 1557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인 거창 신씨 선산에 모시게 되고 1739년 왕비로 복위되면서 능의 이름을 온릉이라고 정했으며 격식에 맞게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경왕후가 복위되지 못한 이유가 하나 있는데 .... 만약 복위되었다가 아들을 낳게 되면 종법상 그 아이가 현재 원자를 제치고 장남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러면 또다시 피바람이 불 것은 뻔하고 .... 게다가 그 원자가 신동이었으니 대신들 입장에서도 난감하기 그지 없었을 것입니다. 중종도 그걸 모를리 없고요. 그래서 아예 문제가 없는 처녀 간택을 한 것입니다. 경빈 박씨가 왕비가 되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장경왕후가 딸만 둘인 채로 죽었다면, 단경왕후가 복위되었거나, 왕의 총애를 입은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경빈 박씨보다는 희빈 홍씨가 중전이 되었을 거에요. 경빈 박씨는 박원종의 수양딸로 들어가 신분 세탁한 거고 실제로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습니다. 반면에 희빈 홍씨는 반정 공신 홍경주의 친딸이죠. 중종이 가장 총애한 두 여성 중 고르라면 명문가 출신 수양딸보다는 명문가 출신 친딸을 선택했겠죠. 인종보다 형인 중종의 자식을 보면 1. 복성군: 1509년생- 경빈 박씨 소생 2. 해안군: 1511년생-숙의 홍씨 소생 3. 금원군: 1513년생-희빈 홍씨 소생 4. 인종: 1513년생-장경왕후 소생 이렇습니다. 희빈 홍씨를 중전으로 올리면 금원군이 금원대군이 되어 후계구도가 꼬여요. 그래서 많이 총애한 여성에 명문가 출신임에도 희빈 홍씨를 중전으로 올리지 않고 새 장가를 간 것 같네요. 단경왕후를 복위시키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요. 무엇보다 이미 헤어진지 10년입니다. 역적 집안으로 몰린 집안 딸이고요. 이미 남자로서 마음 가는 경빈 박씨, 희빈 홍씨 등 후궁들도 여럿 생겼어요. 중종이 단경왕후를 복위시키지 않은 것이 이해가 갑니다. 정치적인 상황도 그렇고 남자로서의 마음도 그렇고... 단경왕후 입장에서는 매정하게 느껴졌겠지만 제가 중종이었어도 이렇게 했을 겁니다. 이게 훨씬 현실적이죠.
@@이도형-x9x 문정왕후~ ㅋㅋ 차라리 인종이 태종 같은 성격이었다면 서모랑 치열하게 싸웠을 테고 명종을 죽였을 텐데 말이죠~ 아니면 자기가 아이를 못 낳는 몸이라는 걸 알고 경종처럼 후계구도를 걱정해서 살려줬으려나요? 인종이 아이를 "못" 낳은 건 문정왕후를 생각해서라는 건 완전 멍멍이소리라고 생각하고요. 이 시대에 아이를 못 낳는다는 건 엄청난 치부였어요. 더군다나 후계를 꼭 봐야 하는 왕인 인종은 그랬다가는 종묘사직 전체에 불충을 저지르는 일이었어요. 중전 외 후궁들도 몇몇 있었던 걸 볼 때 아무리 봐도 인종이 성생활까지 힘든 건 아니어도 아이를 못 낳는 체질이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참여했다면 애초에 폐비도 안됐고 장경왕후도 역사에 없었고 인종도 없었고 인종이랑 단경왕후 소생이랑 싸울일도 없었겠죠ㅡㅡ 아빠가 반정공신인데 폐비가 왜 됩니까.. 신수근은 자기 죽을거 알고 함구하고 그 자리 지켰던듯.. 어찌보면 연산군의 충신이네요 누이도 딸도 누구하나 버릴수도없고 자신이 모시는 왕도 배신할수없어서 역모를 꾸미는줄 알면서도 함구한.. 참 안타깝네요
오늘 단경왕후 신씨가 있는 온릉에 다녀왔습니다. 조선시대 왕릉을 기억하며 다니진 않았지만 무언가 쓸쓸함이 느껴져 유투브스토리를 찾게 됐네요. 그런 의미에선지 영조때 복위된 신씨의 능호를 온릉이라 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왕산 치마 바위스토리도 흥미로웠는데, 중전이 죽고나서 복위를 택할 수 있었던 종중이 다른 치맛바람에 후궁도 10명도 두었단 사실에 놀랍네요. 역시 남자는...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가 조선시대 왕이었다면 후궁30명은 두었을 겁니다. 에브리데이 뉴데이. 잘 보았습니다.
비운의 왕비 중 최고봉은 단연 인현왕후가 원탑이라 봄. 숙종한테 평생을 시달리다 34에 죽었으니 15살에 왕비가 되어 19년 내내 불행했고 와병중에도 편히 쉬지 못하고 취선당의 궁녀들에게 수시로 감시당하며 살다 고통스럽게 죽었으니 가장 불행한 왕비라고 봅니다. 숙종이 인현왕후보고 죽으라고 식량을 몇년동안 지급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단경왕후나 정순왕후 송씨는 남편이 괴롭히거나 죽이려고 들지도 않았고 정치에 배제되서 오히려 천수를 누리고 살았으니 인현왕후보단 훨씬 나았죠
중간에 생략이 되어서 오해의 여지가 있었네요. 9월 10일에 간택령을 내리며 중전을 맞을 준비를 했고 9월 17일 날 중종의 모후인 왕대비 정현왕후가 먼저 두세 명의 후궁을 들이고 천천히 봐서 결정하자는 판단을 내렸기에 후궁들을 먼저들이고 다음 해에 그 후궁들 중 장경왕후가 선택되어 왕비에 오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