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가 어찌 샤셨을까 생각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울 부자집 딸래미를 덩치크고 얼굴 반반한 촌놈이 대려가서 처가 덕에 사업을 했는데 두번이나 말아먹고, 첫째딸이 귀했던 장인이 아파트 사줄랬더니 그돈도 들고 텨서 지 형제들한테 주고, 결국 지지리 못살고 지 고향에서 미안한 마음은 있어서, 그 어여뻣던 서울 아가씨 할머니되서 병든 옆을 남에집 남에땅 일구면서 지키고있는 우리아버지 .....어머니만 아니었음 인연을 끊는다.
확실히 70년대 초기부터 우리나라 많은 개발이 이루어진듯합니다... 1960년대는 이전세대와는 다른, 뭔가 활발해지려는 그런 사회모습이었고요... 1950년대는 지금과는 아주 이질적인 조선시대의 그림자가 좀 보이는듯했던 시기였고요... 지하철도 이때 1971년 착공을 했네요... 1974년에 개통된걸로 기억하는데.. 암튼 전국 모든 부문에 여기저기 공사를 한걸로 기억함. 어렸을적 어딜가나 온통 주위에는 공사현장이었음. 경부고속도로도... 남산 어린이회관도... 소양강댐도 모두 이시기에 완공된걸로 기억..... 현대차의 포니가 이 무렵 만들어졌어요.1974년. 양희은의 고운노래 '아침이슬'이나,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도 이때 발표된 노래였어요.. 좋은시대에 살아봤다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아직 1970년무렵... 이때는 북한보다는 약간 못살때였을거에요... 그정도로 가난했었지요. 나라가 활발히 커가는 때였다고 봅니다. 이거 뭐 정치적 의도는 없는데.... 이때가 박정희시대의 전성기라 볼수 있습니다...
나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60년대 십년을 돌아본다. 60년대 초반까지도 적어도 중년에 이른 남자들은 대부분 외출시 중절모를 썼었고 특히 한 국가의 대통령이라면 더더욱 그랬었다. 그러다가 솔선수범으로 모자를 벗어던지고 맨 머리로 나타난 케네디 대통령은 온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중절모를 벗어던지게 했다. 그러자 텁수룩한 장발로 나타난 사나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비틀즈라는 이름의 팝송가수팀이었다. 당시 십대 이십대는 물론이고 중년 여자들까지도 오줌을 지리게 만들어서 뭇 남성들에게 시샘을 받았었던 비틀즈는 단숨에 온 세계에 장발을 유행시켰고 동 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젊은이들도 다들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자 이것은 한국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정부는 70년대에 들어서서 부터 경찰들을 동원하여 길거리에서 장발단속을 시작했고 남자들이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다가 마구잡이로 단속을 하는 예비군 훈련교관들의 개판 가위질로 쥐뜯어먹은 모습이 되어서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해지자 마침내 한 주부가 용기를 내어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직접 공개서한을 보내 항의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장발단속은 유신독재가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었다. 어쨌든 머리를 길게 길르는 장발 스타일이 유행하게 된데는 비틀즈의 영향이 전부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의 영향이 컸었음을 무시하기는 힘들지 않나 생각된다. 60년대는 한마디로 격동의 십년이었으며 장기간 미국 각지에서 발생하던 흑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산발적으로 항의시위를 하는 형식으로 지속되어오던 민권운동이 마침내 버스 안에서 한 흑인 여성이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 점화제가 되어 온 미국으로 번져가면서 결실을 거두어 인종차별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오던 미국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 인종, 종교, 국적, 성별 여부에 관계 없이 일체의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통과된 시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차별철폐는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데와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흑인 민권 운동가이던 말틴 루터 킹 주니어(MLK) 목사와 미국에 검은 회교도 운동을 시작한 맬컴X 등이 이끌었다. 이것에 대한 백인 보수단체의 저항이 없을 수 없어서 앞서 언급된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케네디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한사람씩 의문의 총격에 의한 암살을 당하게 되고 그 배후는 지금도 비밀에 싸여있다. 그 외에 흑인 운동선수들의 활약 역시 민권운동에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권투선수 알리로 시작해서 죠 프레이지어, 죠지 포먼등 세 사람이 링위에서 곰의 괴력과 사자의 용맹과 나비의 날렵함과 벌의 날카로움을 겸하여 펼치는 예술같은 경기광경은 많은 백인들에게 참기 어려운 열등감을 안겨 주었고 그 광경에 필자 역시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은근히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외에 농구, 미식축구, 육상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흑인들이 백인들을 제치고 단연 두각을 나타내자 이에 좌절을 느낀 백인들이, 흑인들이 아직 따라오지 못한 빙상경기종목을 따로 떼내어 동계 올림픽을 새로 창설하는 일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들 흑인 스포츠맨들은 서로 서 있는 위치는 달랐더라도 모두들 하나같이 억 눌린자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누구 못지 않게 잘 이해하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켜주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 컴 앞에 앉아서 한가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필자 역시 다른 상황에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새삼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60년대는 또한 월남전등 전쟁과 이것에 대해 항의하는 반전운동으로 점철된 시기이기도 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가면서 죽어라고 일하지 않아도 세끼밥은 먹을 수 있는 현상으로 나타난 부작용으로 휴식의 가치를 내세우며 게으름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나타난 것이 있으니 바로 히피문화였다. 대부분 중산층 가정 출신의 백인 아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히피족은 집시들 마냥 떼를 지어 유랑을 하면서 때마침 나타난 LSD나 메타 암페타민같은 값싼 합성마약과 마리화나 같은 것들에 취해 집단 난교를 즐겼었다. 또 이들은 하나같이 월남전에 반대했으며 전쟁없는 세계의 실현과 일체의 보수적인 기존 가치의 해체를 원했었다. 이러한 히피들의 문화는 젊은이들의 사회에 깊이 파고들었으며 미국의 보수정치인들에게 대항하는 민주당에게 대단히 좋은 무기가 되었고 민주당의 이러한 경향은 공산주의자들이 민주당에 파고들 수 있는 아주 좋은 은폐막을 제공해서 현재의 미국의 민주당은 과거 케네디나 MLK등이 몸담았던 그러한 오리지날한 민주당의 정신이 아니라 한국의 빨갱이나 다름없는 걸레같이 지저분한 멘탈리티가 점하고 보아야 하겠다. 어쨌든 현재 한국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있는 운동권 정치인들이나 이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민노총이나 전교조나 언론계 인간들의 성문화가 이들 히피들의 성문화와 완전 짝퉁임은 이들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과거에 소위 촛불문화제니 의식화 학습이니 하는 행사에 참여할때에 단체생활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를 알면 반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비틀즈의 리더이고 매우 보수적이었던 죤 레넌이 오늘의 잘난체하는 운동권 쓰레기들을 보면 무엇이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분명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너희가 진보를 아느냐?" 당연히 예상되었던 일이긴 하지만, 히피문화는 사회적 실패자들인 루저들에게 파고들어가면서 부작용을 낳기 시작했는데 성공해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Celebrity에 대한 증오심이나 열등의식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바로 1969년에 일어났던 끔찍한 찰스 맨슨 사건이 그 대표적인 한 예이다. 말로 표현하기 너무 끔찍한 이 사건의 주범 찰스맨슨은 체포되어 종신징역을 살다가 얼마 전 옥중에서 죽었는데, 하나같이 루저들인 맨슨 추종자들은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맨슨이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의 배후인물을 찰스맨슨에 비유 한다면 이 인간의 시키는데로 따라하는 한국의 빨갱이들과 수구꼴통 사탄파들이 바로 그 찰스맨슨의 추종자들이라 하겠으며 찰스맨슨 사건의 희생자 샤론 테이트 양은 박근혜 대통령에, 통일 대한민국은 그 샤론테이트 양이 임신하고 있던 아기에 비유할 수 있겠다. 1960년대는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욱일승천하던 십년이기도 하다. 그 여세는 70년대까지 계속되어서 월남, 캄보디아, 라오스 세 나라가 연속으로 공산화가 되었고 그 후 이디오피아등 아프리카의 여러나라 역시 공산국가가 되었으며 1979년엔 이란 역시 친미에서 친쏘로 돌아서게 되었다.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공산침략에 맞서기 위해 더 더욱 철권통치를 강화해야 했고 마침내 1972년에 유신체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지만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겁낸 일본과 일본의 뒷배 미국의 개입가능성이 농후한 "한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한국 대통령 박정희 암살사건"이 발생함으로서 한국은 오늘의 친중종북 체제가 들어서게 되는 운명의 첫 단추를 끼우게되었다. 1979년 10월에 발생한 박정희 암살사건에 지미카터 당시 미국대통령이 깊이 관련되어있음은 공공연연한 비밀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2017년 발생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역시 한반도에 핵을 보유한 통일 경제강국의 출현을 경계한 미국과 일본과 중국, 러시아 유럽등 온 세계 열강들이 남한 내의 수구꼴통들과 빨갱이들을 사주하여 한반도의 자유민주체제하의 통일을 저지한 사건이며 이것은 겉으로는 중국과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남한 내의 빨갱이들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탄핵이 실현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동력을 제공한 자들은 당시의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민주당 측 미국 대선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임은 역시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로 되어있다. 1979년의 미일의 사주에 의한 박정희 암살이 남한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정부가 막을 내리고 반미친중종북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공산주의 체제로 가는 대사변이 일어나는 첫 단추를 끼우는 사건이었다면 2016년 12월의 박근혜 탄핵은 그 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를 끼우는 사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는 반세기 이상 지난 6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출현한 전 세계적인 대혼란의 여진이 아직도 지속중인 곳이며 그 피해를 가장 심하게 보고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댓글에 많은 분들이 당시 여학생의 대학 진학과 가정 형편을 연관지어 말씀하시기에 반론(?)을 달자면,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매우 컸던게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제 부모님 (서울대 58학번, 이대 61학번) 서울 출신 (서대문, 종로) 이시고, 외가는 중산층이었고, 친가는 정말 가난했었음에도 교육에 신경쓰셨구요. (무려 7남2녀 9남매인데, 품앗이처럼 큰고모는 고등학교까지. 나머지는 전부 대학에 보내셨죠) 저희 엄마왈 동네 또래 여자애들 웬만하면 다 고등학교는 진학했고, 대학 동기들중 다수가 서민층, 중산층이었다고 하시더라구요. (끼니 걱정 하는 친구들도, 집과 학교를 걸어서 통학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고, 달동네에 살았던 친구들도 있었다고 하심) 당시 서울은 (한강 이북) 농경사회가 아니었기에 고등 교육만 받으면 남녀 모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고, 교육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대학 졸업 후 저희 어머니는 여고 교사로 일하셨는데, (첫 제자가 40년대 후반생) 60년대 중반에 학생 가정 방문을 청계천 판자촌에도 여러번 가보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월급 쪼개서 아끼는 제자들 수업료 (당시엔 고등학교 수업료가 있었다고 합니다.) 및 대학 입학금도 내주셨다고도 하심. 지방은 제가 솔직히 잘 모르고, 부모님께 여쭈어봐도 자세히는 모르셔서 추측을 하자면,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 이남 지방 대부분은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다보니 한정된 자원으로 자식들을 전부 교육시킬 수 없으니 딸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을 것이고, 교육에 대한 부모님들의 사고방식 및 정보도 매우 제한되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나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60년대 십년을 돌아본다. 60년대 초반까지도 적어도 중년에 이른 남자들은 대부분 외출시 중절모를 썼었고 특히 한 국가의 대통령이라면 더더욱 그랬었다. 그러다가 솔선수범으로 모자를 벗어던지고 맨 머리로 나타난 케네디 대통령은 온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중절모를 벗어던지게 했다. 그러자 텁수룩한 장발로 나타난 사나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비틀즈라는 이름의 팝송가수팀이었다. 당시 십대 이십대는 물론이고 중년 여자들까지도 오줌을 지리게 만들어서 뭇 남성들에게 시샘을 받았었던 비틀즈는 단숨에 온 세계에 장발을 유행시켰고 동 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젊은이들도 다들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자 이것은 한국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정부는 70년대에 들어서서 부터 경찰들을 동원하여 길거리에서 장발단속을 시작했고 남자들이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다가 마구잡이로 단속을 하는 예비군 훈련교관들의 개판 가위질로 쥐뜯어먹은 모습이 되어서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해지자 마침내 한 주부가 용기를 내어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직접 공개서한을 보내 항의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장발단속은 유신독재가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었다. 어쨌든 머리를 길게 길르는 장발 스타일이 유행하게 된데는 비틀즈의 영향이 전부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의 영향이 컸었음을 무시하기는 힘들지 않나 생각된다. 60년대는 한마디로 격동의 십년이었으며 장기간 미국 각지에서 발생하던 흑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산발적으로 항의시위를 하는 형식으로 지속되어오던 민권운동이 마침내 버스 안에서 한 흑인 여성이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 점화제가 되어 온 미국으로 번져가면서 결실을 거두어 인종차별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오던 미국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 인종, 종교, 국적, 성별 여부에 관계 없이 일체의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통과된 시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차별철폐는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데와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흑인 민권 운동가이던 말틴 루터 킹 주니어(MLK) 목사와 미국에 검은 회교도 운동을 시작한 맬컴X 등이 이끌었다. 이것에 대한 백인 보수단체의 저항이 없을 수 없어서 앞서 언급된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케네디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한사람씩 의문의 총격에 의한 암살을 당하게 되고 그 배후는 지금도 비밀에 싸여있다. 그 외에 흑인 운동선수들의 활약 역시 민권운동에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권투선수 알리로 시작해서 죠 프레이지어, 죠지 포먼등 세 사람이 링위에서 곰의 괴력과 사자의 용맹과 나비의 날렵함과 벌의 날카로움을 겸하여 펼치는 예술같은 경기광경은 많은 백인들에게 참기 어려운 열등감을 안겨 주었고 그 광경에 필자 역시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은근히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외에 농구, 미식축구, 육상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흑인들이 백인들을 제치고 단연 두각을 나타내자 이에 좌절을 느낀 백인들이, 흑인들이 아직 따라오지 못한 빙상경기종목을 따로 떼내어 동계 올림픽을 새로 창설하는 일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들 흑인 스포츠맨들은 서로 서 있는 위치는 달랐더라도 모두들 하나같이 억 눌린자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누구 못지 않게 잘 이해하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켜주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 컴 앞에 앉아서 한가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필자 역시 다른 상황에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새삼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60년대는 또한 월남전등 전쟁과 이것에 대해 항의하는 반전운동으로 점철된 시기이기도 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가면서 죽어라고 일하지 않아도 세끼밥은 먹을 수 있는 현상으로 나타난 부작용으로 휴식의 가치를 내세우며 게으름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나타난 것이 있으니 바로 히피문화였다. 대부분 중산층 가정 출신의 백인 아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히피족은 집시들 마냥 떼를 지어 유랑을 하면서 때마침 나타난 LSD나 메타 암페타민같은 값싼 합성마약과 마리화나 같은 것들에 취해 집단 난교를 즐겼었다. 또 이들은 하나같이 월남전에 반대했으며 전쟁없는 세계의 실현과 일체의 보수적인 기존 가치의 해체를 원했었다. 이러한 히피들의 문화는 젊은이들의 사회에 깊이 파고들었으며 미국의 보수정치인들에게 대항하는 민주당에게 대단히 좋은 무기가 되었고 민주당의 이러한 경향은 공산주의자들이 민주당에 파고들 수 있는 아주 좋은 은폐막을 제공해서 현재의 미국의 민주당은 과거 케네디나 MLK등이 몸담았던 그러한 오리지날한 민주당의 정신이 아니라 한국의 빨갱이나 다름없는 걸레같이 지저분한 멘탈리티가 점하고 보아야 하겠다. 어쨌든 현재 한국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있는 운동권 정치인들이나 이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민노총이나 전교조나 언론계 인간들의 성문화가 이들 히피들의 성문화와 완전 짝퉁임은 이들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과거에 소위 촛불문화제니 의식화 학습이니 하는 행사에 참여할때에 단체생활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를 알면 반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비틀즈의 리더이고 매우 보수적이었던 죤 레넌이 오늘의 잘난체하는 운동권 쓰레기들을 보면 무엇이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분명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너희가 진보를 아느냐?" 당연히 예상되었던 일이긴 하지만, 히피문화는 사회적 실패자들인 루저들에게 파고들어가면서 부작용을 낳기 시작했는데 성공해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Celebrity에 대한 증오심이나 열등의식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바로 1969년에 일어났던 끔찍한 찰스 맨슨 사건이 그 대표적인 한 예이다. 말로 표현하기 너무 끔찍한 이 사건의 주범 찰스맨슨은 체포되어 종신징역을 살다가 얼마 전 옥중에서 죽었는데, 하나같이 루저들인 맨슨 추종자들은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맨슨이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의 배후인물을 찰스맨슨에 비유 한다면 이 인간의 시키는데로 따라하는 한국의 빨갱이들과 수구꼴통 사탄파들이 바로 그 찰스맨슨의 추종자들이라 하겠으며 찰스맨슨 사건의 희생자 샤론 테이트 양은 박근혜 대통령에, 통일 대한민국은 그 샤론테이트 양이 임신하고 있던 아기에 비유할 수 있겠다. 1960년대는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욱일승천하던 십년이기도 하다. 그 여세는 70년대까지 계속되어서 월남, 캄보디아, 라오스 세 나라가 연속으로 공산화가 되었고 그 후 이디오피아등 아프리카의 여러나라 역시 공산국가가 되었으며 1979년엔 이란 역시 친미에서 친쏘로 돌아서게 되었다.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공산침략에 맞서기 위해 더 더욱 철권통치를 강화해야 했고 마침내 1972년에 유신체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지만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겁낸 일본과 일본의 뒷배 미국의 개입가능성이 농후한 "한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한국 대통령 박정희 암살사건"이 발생함으로서 한국은 오늘의 친중종북 체제가 들어서게 되는 운명의 첫 단추를 끼우게되었다. 1979년 10월에 발생한 박정희 암살사건에 지미카터 당시 미국대통령이 깊이 관련되어있음은 공공연연한 비밀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2017년 발생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역시 한반도에 핵을 보유한 통일 경제강국의 출현을 경계한 미국과 일본과 중국, 러시아 유럽등 온 세계 열강들이 남한 내의 수구꼴통들과 빨갱이들을 사주하여 한반도의 자유민주체제하의 통일을 저지한 사건이며 이것은 겉으로는 중국과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남한 내의 빨갱이들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탄핵이 실현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동력을 제공한 자들은 당시의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민주당 측 미국 대선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임은 역시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로 되어있다. 1979년의 미일의 사주에 의한 박정희 암살이 남한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정부가 막을 내리고 반미친중종북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공산주의 체제로 가는 대사변이 일어나는 첫 단추를 끼우는 사건이었다면 2016년 12월의 박근혜 탄핵은 그 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를 끼우는 사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는 반세기 이상 지난 6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출현한 전 세계적인 대혼란의 여진이 아직도 지속중인 곳이며 그 피해를 가장 심하게 보고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70년대 이화여대 문과는 정말 좋은 대학이었어요. 사회 분위기상, 서울대 법대도 갈 수 있는 학생이 이대 사학과를 가는 경우도 봤어요. 3공화국과 4공화국(유신헌법 시대)때는 이후 80년대와 또 달랐어요. 그러나 지금도 여대가 존재하는 것은 좀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