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북한이 쌀 보낸이유는 순수한 구호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 되게 여유롭다~ 이런거 보여줄 목적이었고 남한은 자존심 부리면서 안받을 줄 알고 허세좀 부려본건데 땡큐 하고 받아버림ㅋㅋㅋㅋㅋ 북한은 이때 일성이형 뻘짓에 고난의행군 들어가기 바로 직전, 국고 바닥나고 있을 시기라 지들 먹을 쌀도 없을 시기였는데 그래도 먼저 준다 해놓고 안주기엔 또 모양빠지니 중국한테 쌀 얻어다가 보내줬다고합니다.
저 국민학교 2학년때로 기억 합니다 서울 사는데 비가 얼마나 일주일 넘게 오던지...지금 목동 아파트 있기전에 거기 전부 논 밭이었고 저는 목동 근처 주택에 살았어요 오목교 범람 한다고 대피 싸이렌도 울리고...한강 인도교 범람 직전 까지 실시간 뉴스에 나오고 저희도 짐싸고 아버지가 회사에서 가져오신 큰 트럭 타고 대피 하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다행이 비가 멈춰 대피는 안했지만 지금 목동 오거리 물차서 사람들 스티로폼 연결해 배타고 다니고 친구들 물놀이 했던 기억이나요 ㅋㅋㅋ........아버지는 작년에 돌아 가셨네요 ㅠㅠ
국민학교 6학년때 인데 비가 엄청나게 와서 집 안방 벽 약1m까지 물이 찾었죠... 가전제품 이 문제가 아니라 새벽에 부랴 부랴 당시 태어난지 백일 막 되가는 막내동생 옷가지랑 우유병 챙겨서 지대가 높은 작은집으로 피난갔었죠... 다음날 와보니 당시 현대식 주택이었던 우리집과 우리동네는 반쯤 잠겨있었고 물빠지는데 며칠 걸렸었는데 그와중에 친구들과 동네를 삼킨 물속에서 수영도 하고 다라타고 잠수도 하며 별짖을 다했죠... 당시는 수세식 변기와 정화조가 없고 집집마다 푸세식 덩통?화장실 이었는데 그물이 이집덩 저집덩 다 합쳐진 덩물이란걸 잊은채 놀고있었으니 참 철이 없었네요...ㅋ~ 그래도 피부병 전염병 하나없이 잘 컷어요... 저도 그때 북한에서 지원한 쌀로 지은 밥을 먹어보았는데 자세한건 모르겠고 엄마들 말씀하시던건 쌀이 푸석하고 윤기가 없다 압력밥솥아닌 일반 솥에 밥하면 밥맛이 없다... 라는 말씀을 하시던게 기억이납니다... 여담으로 당시 당연히 쌀준다면 우리측이 안받을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우리가 받는다고 하여 북한 김일성이 똥씹은 얼굴로 인민들에게 줄쌀도 부족한데 어쩔수 없이 남한에 쌀지원해줘서 몇날 며칠 밤잠을 못잦다고 하며 그 제안한 북측 적십자사 대표단들 죄다 아오지로 보넸다고 하더군요... ㅂㅅ들이 가오잡으려다 지들 목아지 잡았네요~~~^-^
춘천 사람인데요 이때생각 납니다 할머니댁이 샘밭이라 당시 할머니랑 소양댐에서 내려오는 거대한물을 보러갔지요 무서운기억 , 그리고 서있는 바로앞의 흙이 떨어져나가는데 그리고 소양댐은 인제 양구 등 상류지역에 비가 오는 유입량을 착공시 잘못계산하여 현재의 수문크기로는 84년도의 비처럼 조금만더 온다면 소양댐위로 물이 넘친다는거죠 그래서 그때문에 얼마전 방송에서 수문외의 수문을 더 만들었다는거죠
비슷한 시기에 군생활 같이 하셨네요. 저희 부대(31연대 3대대)도 야외종합훈련으로 그 해 7월 한 달간 오대산에서 숙영했었습니다. 그 훈련 후, 31연대 4대대(2사단 신병 교육대대)에서 하사관후보생으로 교육 중이었는데(교육중 퇴교하여 남들보다 일찍 병장 달고 다음해 7월 병장 제대), 그 때 큰 비로 부대 근처 도랑이 한순간 무너져 쓸려 내려간 것을 보았습니다. 교육중이라 그 때 비가 그렇게 많이 내려 큰 위협이 되었는지 몰랐네요.
생각납니다 우리나라가 수해로 피해를 크게 입자, 북한이 우리가 의향이 있다면 식량과 보급품을 지원해 줄수 있다고 말을 했는데, 훗날 그건 그냥 하는 말이었고, 우리정부가 당연히 거절을 할꺼라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하다고 받겠다고 하니 부랴부랴 전국에서 쌀을 수급해서 보냈는데, 그쌀의 질이 좋지가 않아서 사람이 먹기에도 미달되어 가축사료등으로 썼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쌀이 햇쌀부터 2년, 3년차쌀까지는 먹고 이후부터는 정부미라고 해서 군인들이 먹고 나면 나머지 몇년차부터는 가축사료나 과자등의 재료료 쓰이거든요
소양강댐은 1984년 호우 1990년 호우때 계획홍수위 198미터 까지 근접한 197미터까지 올라 갔습니다. 소양댐이 만수위에 근접한 시기가 1984년 1990년 딱 두번 밖에 없지만 사력댐이라 월류 했다면 강원 경기 서울 인천도 피해가 갔을겁니다. 현재 보조 여수로가 있지만 초 극한 강우가 들이닥치면 이것도 무용지물 일지도 모릅니다. 충주댐도 1990년 2006년에 만수위에 근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1969년 강원도 춘천국민학교1학년2학기에 전학왔었는대, 담임여선생이 한살어린 본인 아들을 같은반에 불법으로 다니게 하면서 수업을하고, 아들놈은 엄마가 담임선생이라 학생들한테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담임여선생 역씨 폭력을 무자비하게 자행하던 악덕선생이였습니다...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그당시 다 어렵게 생활할때인대, 반장을 시켜서 애들이 싸온 과일, 과자같은것을 교묘하게 빼았아서 큰 시장바구니에 챙겨서 들고, 소풍끝나고 갈때 무거우니까 남학생들이 나눠가면서 들고 갔었다... 저도 사과를 아껴서 집에가서 먹으려다가 빼았긴게 기억납니다.. 아들놈은 다음해(1970년) 다시 1학년 입학해서 다니는걸 확인했고,, 나는 다른학교로 전학했다,,어릴때 일이지만 너무 또렷이 기억나서 그 이후로 강원도, 초등학교선생들에 대해 아주 안좋은 기억이 떠나지 않는다~~~ 그여생년은 지금은 나이도 많고 죄 받아서 돌아가셨을것으로 생각됩니다. ""1970년대 강원 두메산골 부부교사 이야기"" 이걸보나 상반된 삶이지만 ,,지나간 악몽이 떠오릅니다...
1981년 9월1일 토요일 아침에 이장님이 마을 방송으로 소양강댐이 위험하다고 젊은 청년들의 참세을 권해서 홍천터미널에 가서 대한통운 트럭타고 소양강댐 밑에 가니 경찰, 군인, 공무원, 예비군 등등이 도착해 있었음. 댐이 사력댐이라 물이 넘치면 댐이 붕괴된다하여 작은 마대를 댐위에 쌓기로 결정했는데 물이 너무 가끼이 올라와서 다들 너무 쫄아서.., 결국 군인이 제일 안쪽에 그다음이 경찰, 공무원순으로 서고 나는 예비군과 같이 마대에 모레 넣는 임무를 수행함. 저녁에 참가증 받고 귀가함. (참가증으로 다음년도 예비군훈련 면제 받음) 참고로 수해끝나고 북한에서 쌀, 시멘트, 옷감을 밭았는데 쌀은 밥을하니 너무 맛이 없어서 떡을 해서 나눠 먹고 옷감은 너무 허접해서 걸레로, 시멘트는 마을 공동으로 사용했던 기억이~~
아무리 4대강 사업을 했어도 전세계 기후변화 때문에 안심할순 없습니다. 하루에 내리는 비의 양을 상향시켜 그것을 처리할수 있는 방재시설을 확보해야합니다 지역 중간 중간에 유수지 건설은 필수로 설치하여 평상시에는 밭으로 쓰면 됩니다. 물론 수해 방지용 이기 때문에 일년 농사를 망칠수 있기에 3~4개월에 수확이 가능한 작물로 경작하면 됩니다
소양호 주변산 깎아내고 담수량 5배 더 늘리면 안되냐? 집중호우 때 피해도 피해지만 아까운 수자원 바다로 흘러 보내는게 너무 아까워! 건설 불황일 때 전국 굴삭기, 덤프트럭 모두 동원하면 좋을 듯 하다. 그 산더미 같은 흙 한중접경 수역에 여의도 10배 크기 인공섬 만들면 좋을듯 하다.
정말 소양강댐 이 없었으면 ~~ 박정희 대통령 미래를 보고 소양강댐을 건설 하셨지 ㆍ춘천댐의암댐청평댐ㆍ팔당댐 ㆍ이댐들 때문에 서울사람들 물걱정 없이 평온하게 살수있지ㆍ없었다면 ㆍ수도권사람들 해마다 물난리ㆍ식수문제 ㆍ정말 끔찍한 상상ㆍ박정희대통령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ㆍ특히서울사람들 ㆍ 고층아파트에서 수돗물이 잘안나온다? 특히 화장실은 어떻게 할뻔 ㅎㅎ
당시 근무했던 회사 사내식당에 북한쌀로 지은 밥이 나왔는데, 밥 맛이 엄청 좋았음. 왜냐면 이전에는 정부미로 지은 밥을 배식했는데 먹어본 사람들은 알 것임. 냄새나고 펄펄 날라다니는 밥알들.. ㅎㅎㅎ 즉, 3년 저장된 쌀로 지은 밥보다는 북한쌀로 지은 밥이 맛이 있었다라는 것임. 북쌀에 대한 또하나의 기억은 쌀알들이 푸른기가 남았있었다는 것. 아마 일찍 수확해서 그런것 같음.
수령님의 은덕을 입은 사람이 여기 있었네. 그 당시 남한에 보낸쌀들이 오래된 치장 군량미라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몇년 묵은 쌀을 받아서 밥을 지으면 맛없다고 떡해먹으면서 흉봤는 데 댁은 맛있는 수령님의 잇밥을 얻어 먹었다고 거짓말하고 계시네. 하기야 자발적 간첩도 수만명이라니 탓해봐야 뭐하겠나
저 당시 장실운동장 근처 우성아파트, 그리고 풍남동 지금의 아산병원 근처 아파트 3층까지 물이 차오르고 풍납동은 스티로폼이 이동 수단 이었지요. 그때 수해물자 갖고 판문점에 온 북한트럭운전수들, 우리가 준 워커힐 도시락에 전자제품, 의류 받아가며 어리둥절 마지못해 받아가던 모습이 선합니다.
2010 몇 년에 어떤 다큐프로에서 이 홍수에 대해 다룬 적 있었는데... 63빌딩 45층까지는 ㅎㅎㅎ 모르겠고, 당시의(201??년) 연구 결과로는 사력댐인 소양강댐이 범람으로 인해 붕괴되면, 북한강 수계의 모든 댐과 팔당댐은 모두 작살나고 서울 여의도는 사라지며 한강의 모양이 일부 바뀐다는 결과가 있었죠. 사실 춘천에서 시작된 홍수가 서울데 도달하가까지의 지형을 볼 때, 강 양 옆의 산들이 자연적 제방의 역할을 하여 그 막대한 수량이 다른 곳으로 퍼지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서울에 단시간 내에 그것도 일시에 도착한다니...
지원받는거 반대도 많았는데,남북 화합 차원에서 수용했었지요..북 김일성이가 대대적 선전했지만,결과적으로 북한인민들만 더 굶주리게 됬고,저때 이후 남한에서 식량 및 생필품을 북으로 정식으로 보낸 계기가 된 것입니다..저희 집도 쌀을 소량 받았는데,부친은 당장 내다 버려라 하셨고 모친은 쌀은 국적이 없다며 가래떡 만드셨드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