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역사적 사실(일본 정부가 개입한 명성왕후 시해) 을 오랜기간에 걸쳐 확인할 수 있도록 제작에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을 진실된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인생을 보내고 계시는 원로 석학분들과 그 당시 중요한 역사적 사실(300여 페이지)을 글로 남겨주신 웨버르님과 이를 보관하신 러시아공사에 감사드립니다.
참 단순무식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평생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산다고요?참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일 뿐입니다 우기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요 똥을 된장이라고 천만년을 우겨본들 똥이 된장이 되는 것 아닙니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대궐을 습격할때 조선군 시위대는 약5백명인데 미국인 퇴역장성 다이장군의 지휘 아래 전원이 미국식 신식 라이플로 무장한 반면 일본낭인들은 고작 30여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일본도 한자루씩만 차고 있었습니다 시해에 가담한 조선군 훈련대 5백여명은 대원군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었구요 그럼에도 조선군 시위대들은 저항은 고사하고 총 한방 쏘지않고 무기도 버린채 다들 도망갔고 다이장군 혼자 자리를 지키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고종의 사전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참 단순무식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분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바람도 못피우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대궐을 습격할때 조선군 시위대는 약5백명인데 미국인 퇴역장성 다이장군의 지휘 아래 전원이 미국식 신식 라이플로 무장한 반면 일본낭인들은 고작 30여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일본도 한자루씩만 차고 있었습니다 시해에 가담한 조선군 훈련대 5백여명은 대원군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었구요 그럼에도 조선군 시위대들은 저항은 고사하고 총 한방 쏘지않고 무기도 버린채 다들 도망갔고 다이장군 혼자 자리를 지키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고종의 사전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아프네요..지금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은 이런 내용을 잘 모르고 있어요... 자세히 세밀하게 조사해서 기록을 남겨 책으로 편찬을 하든..어떤 방법으로든 널리 알려야 합니다 저 박종효교수님.너무 고맙네요..........시간이 많이 지나 살아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모든 문서와 내용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래야 알수있습니다. 처참히 무너진 우리에 역사.. ㅠㅠ가슴이 아픕니다. 역사찾기를 통해 많은 것들을 알려야 할것입니다...우리도 일본왕과 왕비 똑같이 죽여버리고 처참히 밟아버리고 안그랬다 주장해도 되는건지 물어보고싶다..일본아 너넨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거다...영원히....
참 단순무식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평생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산다고요?참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일 뿐입니다 우기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요 똥을 된장이라고 천만년을 우겨본들 똥이 된장이 되는 것 아닙니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국민이 깨어있지 못하고 왕족들이 국민을 아끼지않고 지들만이 사리사욕 물질만능 으로 살아가다 일본에게 돈을받으면서 서서히 나라를 빼앗긴건 아닌지 묻고싶다 지도자가 진심으로 국민을 아껴야 한다그래야 국민도 애국심이 일어나고 충성을 하지 않겠는가 지금 현실도 심히 우려스럽다 돈이너무 난무한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대궐을 습격할때 조선군 시위대는 약5백명인데 미국인 퇴역장성 다이장군의 지휘 아래 전원이 미국식 신식 라이플로 무장한 반면 일본낭인들은 고작 30여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일본도 한자루씩만 차고 있었습니다 시해에 가담한 조선군 훈련대 5백여명은 대원군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었구요 그럼에도 조선군 시위대들은 저항은 고사하고 총 한방 쏘지않고 무기도 버린채 다들 도망갔고 다이장군 혼자 자리를 지키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고종의 사전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싱글맘2일본이 잘못하고 용서할 수없는것은 저도 분노합니다 하지만 백성들 괴롭히고 러시아,청나라,일본 끌어들이고 자기의 이익을 얻고자 나라를 팔아넘긴 민씨를 비판은 해야됩니다 저도 일본이 싫습니다 삼일절이 생일이기도 해서 더더욱 맘에 안듭니다 그리고 첨보는 사람한테 니 라고 합니까?
명성왕후가 나라공권력을 돈으로 사고팔면서 나라꼬라지가 엉망이 되고 백성들의 난으로 목숨이 위태로우니깐 외세를 끌어드려 막아내니 러시아고 일본이고 미국이고 지랄 난거 아냐 외세참견이 괜히 일어났냐? 외교를 병신같이 하니그렇지 1차세계대전에서 미국편에 선게 아니라 고종은 아간파천 하면서 나라 존망된거지 그래서 일본이 미국에 지지를 받아 한국 치게 한거아냐? 문재인처럼 좌파들의 피해망상증의 역사공부란 진짜 지겹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대궐을 습격할때 조선군 시위대는 약5백명인데 미국인 퇴역장성 다이장군의 지휘 아래 전원이 미국식 신식 라이플로 무장한 반면 일본낭인들은 고작 30여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일본도 한자루씩만 차고 있었습니다 시해에 가담한 조선군 훈련대 5백여명은 대원군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었구요 그럼에도 조선군 시위대들은 저항은 고사하고 총 한방 쏘지않고 무기도 버린채 다들 도망갔고 다이장군 혼자 자리를 지키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고종의 사전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대궐을 습격할때 조선군 시위대는 약5백명인데 미국인 퇴역장성 다이장군의 지휘 아래 전원이 미국식 신식 라이플로 무장한 반면 일본낭인들은 고작 30여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일본도 한자루씩만 차고 있었습니다 시해에 가담한 조선군 훈련대 5백여명은 대원군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었구요 그럼에도 조선군 시위대들은 저항은 고사하고 총 한방 쏘지않고 무기도 버린채 다들 도망갔고 다이장군 혼자 자리를 지키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고종의 사전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대궐을 습격할때 조선군 시위대는 약5백명인데 미국인 퇴역장성 다이장군의 지휘 아래 전원이 미국식 신식 라이플로 무장한 반면 일본낭인들은 고작 30여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일본도 한자루씩만 차고 있었습니다 시해에 가담한 조선군 훈련대 5백여명은 대원군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었구요 그럼에도 조선군 시위대들은 저항은 고사하고 총 한방 쏘지않고 무기도 버린채 다들 도망갔고 다이장군 혼자 자리를 지키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고종의 사전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emilychoi934 일본은 애당초 민비시해에는 반대했는데 대원군이 부득부득 우기는 바람에 하는수없이 동의해준 것 뿐인데 뭘 사과를 한단 말인가요 어찌보면 당시 모든 백성이 진작 죽었으면 했던 민비였는데 오히려 감사의 삼천배를 올려도 부족할 판인데 정 사과가 필요하면 대원군 무덤을 파헤치던가 하세요
명성황후? 백성들 수탈과 나라가 개판이 되든말든 자기네 민씨일족만 생각한 민비. 솔직히 백성들에게 돌 로 쳐맞아 죽어야 마땅할 여자가 일본 사무라이한테 살해당했다고 영웅화 하는것은 정말 아니다. 물론 일본놈들이 천인공노할 행동에 우리는 분노하고 잊지말아야 하지만 민비를 영웅시 하는것도 아니다.
우리 나라의 왕과 왕비가 당한 수모를 두고 안타까워하고 역사를 통해 교훈이나 얻고 개인적으로 현명한 인생 살아 나가면 되지(국가적으로 현명한 인생 펼쳐보려면 공직에 진출을 해보시든가), 자기가 왕이나 왕비였음 어떤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을라고(일단 그럴 기회조차가 택도 없는 일이고) 상욕을하는 시람 들 우리 국민 맞는지가 의문이다. 왕과 왕비가 저렇게 될 때에는 우리같은 평범한 국민은 어찌되었을까 더 두려워하고 치를 떨어야지. 민비가 어떤 인물이었네 하며, 저렇게 살해된 걸 일본한테 감사하는 듯 하니 왕비를 저런 식으로 잃은 나라 국민으로서 치욕스러워야 하는거 아님?
질문자분하고, 윗분은 이 동영상 안보셨나요? 동영상 중간에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책임을 대원군과 경복궁 수비병사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일본군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선군 400명을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 죽일때 옆에 병풍처럼 세워놓았고, 대원군도 강제로 끌고와서 옆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낭인들의 신분도 밝혀졌는데, 그놈들은 깡패가 아니라 전부 일본 사회 저명 인사들입니다. 일본인 살인자 집단중에는 내무부장관과 한성 신문 사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와 협력하자 일본이 조선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기위해 명성황후를 죽인 것입니다. 명성황후가 죽은 다음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까지 일어나고, 그후에 고종이 명성황후를 복권하고,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다음에 1890년대에 대한제국을 수립하였습니다. 물론, 그이후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서 러시아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1910년에 일본이 완전히 대한제국을 병합하여서 대한제국은 불과 10년정도밖에 생존하지 못했으나, 명성황후 시해를 당한 고종과 조선이 정신차리고, 명성황후가 죽고 몇년뒤에 대한제국이라는 근대식 국가를 세우는데 성공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의 실패로 결론적으로 일본의 실패로 끝났다고 유인촌이가 설명합니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대궐을 습격할때 조선군 시위대는 약5백명인데 미국인 퇴역장성 다이장군의 지휘 아래 전원이 미국식 신식 라이플로 무장한 반면 일본낭인들은 고작 30여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일본도 한자루씩만 차고 있었습니다 시해에 가담한 조선군 훈련대 5백여명은 대원군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었구요 그럼에도 조선군 시위대들은 저항은 고사하고 총 한방 쏘지않고 무기도 버린채 다들 도망갔고 다이장군 혼자 자리를 지키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고종의 사전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분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thelibrary5972 무슨 구석기시대적 개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각설하고 삼별초는 최씨무신정권에 빌붙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개같은 늠들이 몽고의 지배하에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하다가 뒈진것이다 당시 그들이 정말로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다면 일단 몽고와의 강화를 받아들이는게 옳았다
본인의 안위조차 외세애 전적으로 의존햬야만 했던 고종. 조선이 이미 국가로서의 역량을 상실했다는 것. 일본이 아니라도 누가 먹어도 먹었을 것. 다만 그 시절 왕이 국제정세와 외세를 조금만이라도 실리적으로 이용하려 했더라면 좀 더 조선에 유리한 방법으로의 존속을 획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참 단순무식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우기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요 똥을 된장이라고 천만년을 우겨본들 똥이 된장이 되는 것 아닙니다 민비시해는 대원군의 주도하에 일본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이고 고종의 묵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해사건 당일 고종이 철저히 민비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민비시해 당시 누구보다도 통쾌하고 후련해 한 것은 대원군도 일본도 아니고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 삵괭이같은 할망구 왕비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궁녀들과 연애도 못하고 살았는데 특히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은 표독한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뻔했다가 간신히 궁밖으로 도망을 쳤는데 고종은 자나깨나 엄상궁을 다시만날 날만 학수고대했으나 민비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차에 아버지께서 그 철천지원수 같은 마누라를 해치웠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종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아버님께 미련없이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엄상궁과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영친왕(1897년생)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고종과 민후의 죄이고, 그때 대신들의 죄입니다. 국가간에는 이권이 조금만 어그러져도 당장 일어나는 일입니다. 누가 죗가를 치르게 해 주나요. 지금 또다시 비슷한 일 일어납니다. 공부하고 똑똑해 지십시오. 8월 한미연합훈련 못 하게 하느라고 온갖 좌빨 단체 동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까지 못하면 이 나라는 625 때 사태 당합니다. 여러분들 최고 여론이 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살길입니다. 관련기사 m.jajusibo.com/a.html?uid=56104&sc=sc64 더 이상 미국의 위험한 전쟁놀음을 허용할 수 없다
지입으로 온갖 패악은 다 저지른 민비라고 하면서 죽인건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니 가족이 민비에 의해 희생되고 있어도 그런말할거임?? 민비는 찢어죽여도 분이 안풀리지 ㅋㅋ그래서 여러 농민의 난이나 임오군란처럼 조선인들이 민비 찢어죽이려 했는데 민비가 청나라 불러와서 실패했잖아 ㅋㅋ 죽어 마땅한 민비 스스로 못죽이니 일본이라도 대신 죽여주면 땡큐지 ㅋ 안그려? ㅋㅋ
그러네요. 명성황후의 당시 운영이 불안한거는 부인할수 없겠지만, 우리나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가장 문제가 큰거 같네요. 차라리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 했더라면, 대한제국 내에서 끝나겠지만, 일본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 한거라서 국가 운영을 잘 했건 못했건 간에 그걸 떠나서 대한제국의 침략이면서, 까딱 잘 못 인식하면 일본쪽으로도 긍정적으로 평가가 될수 있는 소지가 있을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