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과 희망의 사다리
1,500명의 학생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는 타슈켄트 내의 한 한글 교육원. 아들의 첫 수업에 따라온 어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 따라 강남에 가듯, 그들은 잘 된 친구를 따라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 그 시절 우리가 성공을 위해 영어를 배웠던 것처럼,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한글을 택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 국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모습은 본인들이 이루고 싶어 하는 기적의 가장 가까운 사례다.
성균한글백일장은 이런 학생들을 위해 시작되었다. 오로지 ‘한글’을 배워 ‘한국’으로 유학 가겠다는 꿈을 꾸는 학생들. 제대로 된 교재도, 제대로 된 수업 환경도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고 싶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여러 이유로 한글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 공부를 심도 있게 지속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고민하던 학생들에게 ‘성균한글백일장’은 새로운 계기이자 원동력이었다.
2007년 중국 대회를 시작으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2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성균한글백일장을 거쳐 갔다. 백일장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꿈꾸게 된 그들은 한국에 와 박사도 되고, 외교관도 되고, 한국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도 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희망의 사다리가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시작했던 성균한글백일장. 이제는 단순한 글쓰기 경연 대회를 넘어 한국과 세계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교량이 되었다.
■ 너의 의미
한글을 인생의 새로운 기회로 삼겠다는 마음은 모두 같지만 처음 한글을 시작한 이유는 모두 다르다.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한글’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살면서 어느 하나 재밌는 게 없던 소년은 아버지가 우연히 권유한 한글을 통해 난생처음 흥미 있는 일을 찾았고, K-POP에 열광하던 소녀는 그 노랫말이 궁금해 한글을 배웠다가 이제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완전히 매료돼버렸다.
이렇듯 한글을 배우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고려인 3세인 나제즈다에게 한글은 더욱이 특별한 의미다. 1937년, 한인들의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기차에 실린 사람들. 그 속에 나제즈다의 조부모님이 있었다. 척박한 땅에 떨어진 사람들은 정말 ‘먹고 살기’ 위해 살았다. 땅을 파서 집을 지었고,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만들었다. 지내고 먹는 모든 일이 곧 전쟁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내 뿌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이었다.
우즈베키스탄 땅에서 벌어 먹고살면서 한글을 말한다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억압, 그리고 폭언. 살아야 했기에 내 고향, 우리 말을 잊어야 했다. 참으로 모질었던 세월. 살아야 했기에 모국어를 배우고 가르칠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게 고려인들은 자신들을 숨긴 채, 자신들을 지운 채 낯선 땅에 적응해갔다.
조상들의 희생 덕분에 우즈베키스탄 땅에서 조금씩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살아온 고려인들. 하지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한국 사람도, 우즈베키스탄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아닌 그들. 나제즈다는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말과 글을 알아야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다는 믿음. 그녀에게 한글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 그 날의 이야기
다양한 이유로 모인 59명의 성균한글백일장 참가자들. 설렘을 안은 채 비행기를 타고 6시간을 넘게 달려온 참가자들부터,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한 채 혼자 기차를 타고 5시간이나 걸리는 타슈켄트를 찾아온 참가자까지. 다양한 국가, 다양한 도시에서 모인 청춘들의 얼굴엔 설렘과 긴장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대회 걱정은 뒤로한 채 ‘한글’과 ‘한국’이라는 두 가지 공통점으로 하나가 된 학생들. 한국 드라마와 한국 노래, 한국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한글’과 ‘한국’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다. 생김새도, 모국어도 다른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는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써낼 글이 어떤 내용일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대회가 시작되고, 전날 보여준 환한 미소 대신 사뭇 진지한 태도로 글을 써 내려가는 학생들. 곳곳에서 들려오는 탄식과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보니 학생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렇게 대회가 끝나고 찾아온 수상자 발표의 시간. 희비가 교차한다.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지만,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함께, 같은 길을 걷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든다고. 수상자는 수상자대로,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또 그런 사람대로, 모두가 행복했던 하루가 끝났다. 소중한 기억 하나 가슴에 품은 오늘, 그들에겐 내일을 기약할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다큐멘터리 3일 [한글날 특집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72시간 '장원이오!'] 20191011
#한글날 #도전 #우즈베키스탄
30 сен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