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조선에 도입한 문물과 재도 하애서 조선인들이 개인의 노력, 능력, 의지를 발휘하여 더 나은 삶을 산다고 하신 것은 매우 심도있는 관점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그들을 친일파, 매국노라 하는 이분법성과 정체성의 늪에 빠지지 않고 개인의 초점에 맞춰 그들을 '위대한' 개인이라 하신 것에 깊게 감명 받았습니다.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저희 외할아버지가 겪으신 일입니다.외할아버지는 10살즈음 일본에서 광부일을 할 사람을 모집하는데 인원 할당재여서 외할아버지의 형님이 뽑혔습니다.그런데 형님께서 다리가 부러져서 못가게 되셨고 외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였지만 강제로 가시게 되었습니다.일본 도착후 낮선 환경에 울고 있으니 일본 책임자가 와서 자기집에 데려가서 잔심부름을 시켰습니다.지금으로 따지면 파출소 소장정도의 일본인이었다고 하더군요.말도 잘 안통하고 부모님이 보고싶어서 울고 있으면 걱정하지마라 기회가 되면 꼭 집으로 보내주마라고 했답니다.그리고 몇개월뒤 고국행 배에 태워서 차비하라고 돈까지 쥐어주며 보내주엇다고 참 고마웠다고 했습니다.이걸듣던 광복절 특집으로 취재했던 기자가 어린나이에 집안일 하느냐고 얼마나 힘드셨어요 여쭤보니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힘든거 하나도 없었어.마당 쓸고 담배 심부름이 다였고 밥도 맛있었어라고 해서 기자를 당황하게 만드셨습니다.물론 기사에는 잘해준거 빼고 나머지들만 썼더군요 그냥 직접들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했습니다.일본의 수탈은 맞고 우리나라와 사람들을 이용한 악인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거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람 사는곳은 다 똑같음. 개개인끼리 지내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게돼는거고 실제로 그당시에 한일결혼도있었음. 그리고 실제로 한국에온 일본인들 대다수가 일본에서 밀려난 약자들도 많아서 약자에 배려하는 사람들도있었음. 그리고 실제 일본에서 군국시대에대한 불만도엄청 많았음.
1919.3.1일 3.1운동후에 국내외에 8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생기고, 이중에 6개의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추대했음. 상해임정 도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이었고, 해방후 1948년까지 김구와 이승만은 노선이 자유민주주로 같았고, 한길을 같이 가게됨. 1919~1921년에 조선의 독립군은 주로 만주에 흩어져서 활동하였는데, 러시아의 자유시로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전부 만주에서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홍범도와 이동휘와 여운영과 러시아계무장단체가 합동작전으로 조선 독립군을 거의다 몰살시킴. 그리고, 죽이지 못한 독립군은 재판을 열고 여운영이가 배심원을 하고 홍범도가 재판장을 하면서 모조리 총살시킴. 이것을 자유시 참변이라고 함.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800명이 총살되고, 1000여명이 소련공산당에 강제편입되고, 김좌진장군과 소수만이 탈출하여 다시 만주로 오게 됨. 홍범도가 대장격으로 있던 고려혁명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정신의 함양, 즉 공산화를 위한 혁명교육에 앞장섯고, 홍범도는 레닌으로 부터 소련혁명정권에 협조한 대가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음. 홍범도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원이 되고, 소련군 대위가 됨. 이후 홍범도는 1937년 9월 레닌과 사이가 안좋았던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되고 그곳에서 극장 경비 등의 일을 하다가 사망한다. 홍범도.이동휘. 여운형. 소련공산당이 합작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은 완전히 괴멸되고, 조선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종료되어 1921~1939년까지의 조선 독립군의 활동이 끝나게 됨. 그후 1940년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과 중경에 임시정부 김구가 함께 새롭게 광복군을 만들게 되는 것임. --유튜브 글 인용--
우리나라가 총이 있긴 있었나요? 다들 구소련제 아니면 일제총이었을듯... 제대로 사격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한다... 정말 웃기는 얘기죠. 그래서 영화를 보고 역사를 배우면 바보가 되는 법. 히로시마원폭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일제치하면 오히려 김일성체제보다는 100배 낳았겠죠) 6.25때도 군함1척 없었던 나라이거늘...유엔군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자유는 있었을까요?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김정은이 밑에서 개고생 하면서 살았을터....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그것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괜찮은 교육을 받지 못한 인간에 대해 너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국인이 이렇게 사고력이 낮다니 실망이다. 일본에서 극우활동하고 있는 이집트 출신인 피피는 동아시아 중에서 독해력이 가장 낮은 것이 한국이라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국을 공격하고 있다. 당신이 그것의 간증이 되어 버린 것 같다.
@@leehyangje 일제시대가 되면서 은행업이 본격 시작되었죠 위안부, 강제징용 등의 왜곡과 오해가 당시 은행업의 하나인 고리대금을 당시의 범죄자들이 악용해서 생겼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한국인은 같은 한국인에게 지독하게 악랄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한국인의 국내 국외 범죄 기록들을 보며 그 당시 격동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그 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했던 범죄자들 얼마든지 가면을 쓰고 3자만 없다면 얼마든지 악랄한 짓을 해도 거리낄게 없는 범죄자들의 시대였죠
계몽자님의 시각에 깊은 공감을 표현하며 정말 이 모든 왜곡된 시선들을 변화시킬 문화계 특히 영화, 드라마, TV전문직 분야에 대한 보수 우파적 그리고 요즘 한창 사회적 이슈인 뉴라이트적 사고방식의 확산이 필요합니다. 그저 반일과 분노와 저주만이 가득한 편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계몽해 주십시오. 더 이상 한풀이적 '미스터 선샤인'이 아닌 올바른 시선에서 바라본 대일문제 해결에 한 발씩 내딛는 참민중 지식인들이 보다 많이 활동해주시기를 기대해봅니다.
일제는 물론 다른 침략국도 마름제도를 두고 통치햇다. 직접 지주가 통치하는게 아닌 소작농 중에 중간 관리자를 뽑아 간접 수탈. 군산에 잇엇던 하야시인가 하는 원숭이는, 조선인 마름 1백명을 두고 수탈, 이 원숭이가 논을 보러 다닐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녓을 정도의 넓이. 꼬딱지 만한 나라에서,비행기로 돌아볼 정도의 논 규모라면 그 밑에 소작농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앗을까? 일단,소작료가 수확의 50퍼센트,거기에 물사용료,종자값,비료값,그리고 보릿고개때 꿔준 고율의 고리대금업. 추수끝나면 다시 제로, 또 꾸어서 생활, 그래도 안되면 유랑 또는 만주행, 전라도 농민들이 가장 만주로 마니갓다. 옥토를 놔두고, 그 쌀을 수출이라고 일본으로 보낸 자가 바로 일본원숭이들, 니들 원숭이 똥구멍 빠는 것들은 모두 마름의 후손들, 일본이 전쟁일으킨 미국은 잉여농산물을 바다에 빠뜨릴 정도의 수확, 일본이 뭘 믿고 전쟁을 일으켯을까? 지들 원숭이 농민들? 정부 잡아다 공장에 배치하고 기어다니는것 빼고는 전 국민 군수용품 생산에 동원햇던 원숭이들이, 뭘 먹고 살앗을까나? 침략국과 식민지 사이에 수출이란 단어를 쓰는 일부 마름 자손들, 식민지가 무슨 말인 줄 모르냐? 침략국gnp상승을 위해 자비심없이 탈취해 가는 자원수탈처.인력수탈처.다. 위생상향???? 부려먹으려면 안 죽게 해야지, 미국도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 마구마구 공급될때는, 쓰다 버리게 막 쓰다가 공급이 줄자 영양도 챙기고 위생도 챙기고 결혼도 시키고 해서 계속 노동력 공급받앗다. 원숭이들도 마찬가지.
조선인들의 정체를 없애고 일본인으로 만들겠다는게 문제였다 라고 보시면 더 알기 쉽습니다. 쌀 팔아서 돈 많이 벌면 뭐해요? 다른 뭔가 배우지 못한 백성들이 인식못하는 곳에서 다 갈취해가는데? 지금 정부랑 똑같애요~ 월급은 쥐뿔만큼 올려주고 물가를 대폭 상승하고. 그래도 노예가 아닙니까? 그냥 시대의 발전과 흐름에따라 조금 업그레이드된 현대판 노예죠 ㅋㅋㅋ 아님?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우리가 독립운동 힘없이 한건 인정.우리는 약자였죠.근데 와..저때 일본은 세계정복이라는 도박을 하기위해 영끌 중이고 우리나라는 그들의 만만한 식민지였는데 진짜 일본이 우리가 수탈의 대상이 아니었을까?약한자는 약한만큼 짓밟히는것이 역사의 통일적 흐름..노예맞았음.진짜 유튜브 조회수올리려고..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구독 취소. 여태한말도 다 거짓말이네
@@보리차-p4c그런 미국에의해 현재 한국은 (유대 글로벌 자본)미제치하에 살고 있습니다.차라리 미국보단 같은 혈족인 일본이 낫습니다.저놈의 미국이 일본이 못 기어오르게할려고 원자폭탄 투하하면서까지 짓밟아놓았죠..조선 왕조가 폭탄을 쳐맞았어야했어요.실제 일제 시대가 조선 시대보다 몇 백배 더 행복하고 살기좋았다고 합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해 사라진 것은 분노하지만, 당시 우리 민중의 입장과 처지를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역사인식과 국제관계의 올바른 출발이 된다. 북한 간 첩 민주당놈들과 주사파 간 첩놈들 처럼, 한민족을 내세우며, 반일 선동질을 해, 미래한국의 경제와 국방, 외교를 망치려는 반 한국세력의 거짓말과 왜곡 선동질에 더이상 속아서는 안된다. 과거 일본제국의 악행을 과장 선동해, 미래 일본과의 협력을 막으려는 북한 간 첩들의 세뇌공작을 과감히 몰아내야 한다...
저희 돌아가신 할머니가 1920년대 생이신데 약주한잔하시고 기분 좋아지시면 일본 민요를 부르시곤 하셨습니다 저희 부모님 께선 타박을 하셨는데 그럴때마다 할머니께선 '일본놈들은 나쁜놈들이라'라고 기계적으로 되뇌이셨죠 그런데 매해 노인대학에서 일본 여행을 가는건 아주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가셨습니다. 노인대학에서 가는 것이니 당연히 할머니 수십명이 다같이 갑니다. 저희 할머니는 일찍이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젊어서 부터 혼자 5남매를 키우시느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돈한푼 허투로 안쓰셨는데요 유일하게 일본만 가시면 손톱깎이, 부채,가끔은 작은 가전제품 등등 을 사오시곤 했습니다 이런 저희 할머니가 혹시 친일파,친일부역자,혹은 일제시대에 고통받은 피해자 이실까요? 할머니께선 고생을 워낙 많이 하셔서 젊었을때 고생한 이야기를 입버릇 처럼 하셨는데 일제 시대때 고생한 이야기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전쟁때 너그 애비 퍼뜩 낳고 갓난 애기 들고 뛰어서 도망 다녔어' 라고 6.25 전쟁때 이야기, 전후에 고생한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오래전 여행사 근무했던 사람말로는 실제 할머니들 손에 종이에 일본 주소 적힌걸 들고 있어서 나중에 알고보니 학교다닐때 학교 선생님 찾으러 많이 일본간다고 했어요 ... 일본인 교사들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학생들 지도 해서 일제시대 학교다닌 학생들이 죽기전에 학창시절 은사 찾으러 간다고
그 당시 살았던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그 시절은 어쩌면 낭만적이기도 하고 또는 절망적이기도 했던 시절이었죠. 조선이란 닫힌 세상에 갑자기 세계열강의 손길이 다가오는 시절... 그건 두려움이자 기회이기도 했죠. 다만 지금같이 개개인의 인권이 소중하단 생각이 통영되던 시절이 아닌, 제국주의적이기도 했고 또는 인종차별과 계층이 나눠진 시절이기도 했고요.
저는 과거 20년간 일본 최대 회사의 한국지사(나중에 현지법인을 설립)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습니다. 일본인 상사들의 업무지시가 무조건적으로 싫어서 노조를 통해서 항상 회사와 부딪치며 근무했었습니다. 당시 삼성이나 현대보다 더 많은 급여와 근무조건 등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냥 일본이 싫어서 그렇게 삐딱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한국와 일본 간의 왜곡된 역사와 의식이 슬슬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맞아 죽을까봐 어디가서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오늘은 얘기하고자 합니다. 단순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에 대했던 행태가 “수탈”이 맞다고 하더라도, 해방 이후에 본의 아니게 일본이 한국에 남기고 간 많은 자산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를 이루는데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일제 강점기 이전의 조선은 왕조시대였고, 국민들은 상투를 틀고 짚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아마도 일제가 강점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시대가 몇십년은 더 흘렀을 것입니다. 즉 한국의 근대화가 몇십년은 더 뒤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1948년에 해방이 되고 불과 2년 뒤인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한국은 전국토가 초토화되었습니다. 휴전 이후 미국은 한국에게 많은 원조를 해주었습니다. 병원, 학교, 교회, 고아원을 짓고 식량 원조를 해주는 등 주로 복지적인 면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해방되기 전까지 그들의 이익, “수탈'을 위해 도로, 교량, 터널, 항만, 철도건설, 광산개발, 공장설립 등 주로 인프라 구축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 갑자기 해방이 되면서 일본은 그 많은 인프라들을 모두 포기한 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살던 집(적산가옥)들도 모두 눈치빠른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1990년대 초반에 지방의 작은 공장의 어떤 늙은 사장님으로부터 일본산 기계 구매에 대한 의뢰를 받고 상담차 그 공장을 방문했을 때,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많은 담당자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계에 대한 설명을 그 늙은 사장님은 잘 이해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유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던 그 늙은 사장님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에 제가 설명하는 자료의 일본어를 다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디서 굴러다니는 기계 관련 카타로그 쪼가리만 보고도 직접 기계를 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당시 대부분의 한국 제조사들은 일본의 기술을 무상으로 습득하고 기계는 물론 각종 제품의 제조에 활용(도용)을 했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수십년간 일본의 특허를 침해한 것에 대해 일본의 제조사들로부터 소송을 당하면 “한국을 다 팔아도 충당할 수 없을 정도의 천문학적 규모” 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한국이 언제까지 피해의식만 가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일본으로부터도 배울 점은 배우자” 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의 GDP도 일본을 추월했고, 교통질서, 질서의식 등 일부 의식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슬슬 일본을 추월하고 있습니다. 향후 수십년간은 한국과 일본과의 차이가 더 벌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정확하게 기억은 해야 합니다. 지금도 과거에 일본인들이 만든 도로, 철로, 교량, 터널, 항만이 한국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 일산대교 붕괴, 원효대교 교각 부식 등 한강의 교랑들에 문제가 있었지만 최초로 한강에 건설된 교랑인 일본인들이 건설한 한강철교에서는 아직까지 단 한번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과거 20년간, 그리고 그후로도 지금까지 겪어 보고 있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선한 사람들입니다. 남에게 폐끼치기 싫어하고 약속을 중시하는 매너있는 사람들입니다. 일본이 욕을 먹고 있는 것은 우익단체와 일부 혐한론자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후원과 지원을 받기 위해서 가식적으로 혐한을 외치는 일부 정치인들 때문입니다. 이제는 한국사람들도 일본에 대해 정확하게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도 문제가 많습니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배상이요? 그 수천배에 해당하는 보상을 이미 간접적으로 받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한 나라나 다름없습니다. 일본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가는 것보다 한국이 가깝습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는 비행기로 50분,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입니다. 솔직히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일본의 헌법이고, 모든 규정, 제도들의 초기 버전이 모두 일본으로부터 벤치마킹한 것들 입니다. 무조건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참고하려고 보다보니 너무 우리 실정에 맞아서 그대로 응용하게된 것입니다. 심지어 과거 서울대학교 입학시험 수학문제 3항목 중 하나가 일본 동경대학교 입학시험에 출제되었던 것도 있었습니다. 해마다 수학 과외방에서 동경대학교 입학시험 수학 기출문제를 풀어주던 곳도 있었는데, 그때 그 과외방에 다녔던 사람들은 대박이었겠죠. 인정할 것은 인정합시다. 지금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입니다. 삼성그룹의 초기 주요 기업인 삼성물산(三星)은 일본의 미쯔비시(삼릉/三菱)상사와 미쯔이(삼정/三井)물산을 벤치마킹한 것입니다.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은 해마다 12월 한달간은 일본에서 지내면서 사업계획수립 및 신규사업을 구상했었습니다. 그때마다 일본의 모 기업인으로부터 자문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지금 세계 5위의 자동차 제조사인 현대자동차의 그랜저 초기 모델은 과거 일본 미쯔비시자동차의 데보니아를 그대로 한국에서 제조한 것이고, 현대자동차 초기 모델에는 미쯔비시자동차의 엔진이 장착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자동차가 세계 5위의 자동차 제조사가 되기까지에 초기에는 미쯔비시자동차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잊지는 말되, 잠시 접어둘 수는 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강점기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입니다. 서로 잘하는 것을 지원하며 협력하면 한국과 일본이 세계무대에서 상생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우국지사인척 과거사만 되풀이하며 상생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까? 서로 발목을 잡는 사이 서로 국제무대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안보이나요? 사도광산이 유네스코에 등재될 때, 강제징용 얘기가 빠지면 어떻습니까? 역사는 역사로 평가될텐데, 그게 외교참사라고 정부를 압박하며 민생을 돌보지도 못하게 하면 국익에 뭐가 도움이 되나요? 율곡 이이의 십만대군 양병설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부정해서 결국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초토화가 되지않았나요? 정치인들도 이제는 제발 “일본만 조지면 중간은 간다”는 낡아빠진 생각은 버리기 바랍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수동적인 노예가 아니였습니다. 출신과 환경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개척자 였습니다. 저는 이 말이 너무나 와 닿았습니다. 맞습니다. 조선매국노 왕실의 노예가 아닌 일제 식민지 노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위대한 개인!! 이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그 자체 입니다. 이번 영상 감사합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해 사라진 것은 분노하지만, 당시 우리 민중의 입장과 처지를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역사인식과 국제관계의 올바른 출발이 된다.. 북한 간 첩 민주당놈들과 주사파 간 첩놈들 처럼, 한민족을 내세우며, 반일 선동질을 해, 미래한국의 경제와 국방, 외교를 망치려는 반 한국세력의 거짓말과 왜곡 선동질에 더이상 속아서는 안된다. 과거 일본제국의 악행을 과장 선동해, 미래 일본과의 협력을 막으려는 북한 간 첩들의 세뇌공작을 과감히 몰아내야 한다.
그럼 일본에 나라를 뺏겼는데. 그 나라의 순경이 되고 싶지 않을까? 그래야 가족도 지키고 돈도 버는데. 아니면 놀아? 노냐고. 그리고 일본이 백프로 다 뺏어가면, 그거야 말로 조선인 전부가 들고 일어날 빌미가 되는 건데. 쌀 수출한 돈 줬다고 그걸 가지고 합리화를 해? ㅁ ㅐ ㄱ ㅜㄱ 노 이상.
근데 오해하면 알될 게 자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하나의 개인들은 당시 조선에서 극소수였습니다. 조선인 대부분이 농부였거든요 그것도 소작농. 영상에도 나왔듯이 당시 소작농들의 생활은 빈곤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전국적인 소작쟁의가 발생했거든요. 열심히 자기 삶을 개척하신 분들 응원하고 존경하면서도 시대적 상황 때문에 그러지 못한 대부분의 조선민중들의 힘든 삶도 알아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jaekim906 소작은 일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땅이 없는 사람들이 지주와 소작계약을 해서 농사를 짓는 겁니다. 사회주의 정권처럼 조선시대 토지소유자들의 토지를 마음대로 강탈해서 재분배할 수는 없는 것이죠. 일본도 1945년 11월 기준으로 전체 농지 중 소작지가 46%였고, 일본 전체 농가 600만호 중에 72%에 해당하는 430만호가 소작농가였습니다. 조선인을 차별해서 지주소작관계를 유지시킨 게 아닙니다. 일본 본토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35년 동안 인구가 약 900만명이나 증가했습니다.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60%나 더 증가했으니, 소작지 쪼개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지주소작관계에 의한 소작농의 빈곤함이 빈농 출신 일본 청년 장교들의 분노를 불러와 쿠데타를 여러 차례 일으키고, 후일 군국주의 정권이 들어서 청년 장교들이 소작농을 위한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서, 조선총독부도 일제 말기에 농지개혁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이승만의 농지개혁까지 이어지는 것이고요.
저도 친구 할머니나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일제시대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항일 영화들에 묘사가 많이 과장됫다는 생각은 많이 했었습니다. 현대 고 정주영 회장이 불법(...)으로 차량수리사업소를 차려서 신고를 당했는데 일본인 경찰서 서장에게 찾아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지금 상황이 절박하니 봐달라고 비니깐 그럼 신고안당하게 천막으로 가리고 하라고 하면서 학을 때면서 가라고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순사들이 미디어가 묘사하는거만큼 잔혹했다면 법을 어기고도 저렇게 찾아가서 봐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 상상이나 할수있을까 의문이 들더군요.. 물론 어느정도 멸시나 차별이 있었지만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차량사업소 차리기전에 정미소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기도 했는데요 전쟁이 심화되면서 쌀을 탈탈털어가면서 정미소 사업을 접어야하긴했습니다만.. 이땐 일본 본토고 조선이고 전쟁이다 해서 쌀이며 집안에 쇠로된 도구며 다털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보며 일본인 주인공이 징집전 빵집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온갖 기자제를 전쟁 자원에 쓴다며 다털어가서 빵집 문닫고 허탈해하는 과거 회상씬도 잇지요. 순사보다 좀더 고압적이었던 일본 헌병들이 협조를 안한다고 평민들을 개패듯이 패는 장면은 일본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묘사됩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도시한복판에서 어린아이를 총으로 쏜다라.. 말도 안됩니다. 17세기 센코쿠 시대라면 가능할수도있겠네요.. 저는 일본을 미화하거나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을 미화하는게 아닙니다. 그당시 일본 평민들의 삶만 보아도 인권유린과 무사도니 황국신민이니 하면서 개인의 존엄을 자근자근 밟아대던 시절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면서까지 일본을 악마화하는건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역사를 가르킬때 과장없이 좀더 객관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다루면 좋겠습니다.
@@AdeZbv 일제가 들어오면서 조선의 양반 신분제도를 폐지시켰지. 일제가 들어오기전까지만해도 양반놈들은 조선의 일반서민들을 노비로 부리며 노비들이 힘들게 농사지은 쌀을 지들 곶간에 짱박아놓고 지들 배만 채웠었지. 그런데 일제가 들어오면서 신분제도가 폐지됐어. 악랄했던 양반놈들은 신분제 폐지되는날 자기 노비들한테 붙잡혀 맞아죽은 인간들도 수두룩할 정도였어. 그렇게 몰락해서 수모를 겪고 살아남은 몰락양반들이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게 누구였을까? 당연히일본이지. 그게 니들 대깨민주당찍들이 '독립운동'이라고 알고있었던 '테러행위'들의 진실이야.
@@AdeZbv 일제가 들어오면서 조선의 양반 신분제도를 폐지시켰지. 일제가 들어오기전까지만해도 양반들은 조선의 일반서민들을 노비로 부리며 노비들이 힘들게 농사지은 쌀을 지들 곶간에 짱박아놓고 지들 배만 채웠었지. 그런데 일제가 들어오면서 신분제도가 폐지됐어. 악랄했던 양반들은 신분제 폐지되는날 자기 노비들한테 붙잡혀 맞아죽은 인간들도 수두룩할 정도였어. 그렇게 몰락해서 수모를 겪고 살아남은 몰락양반들이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게 누구였을까? 당연히일본이지. 그게 니들 대깨민주당찍들이 '독립운동'이라고 알고있었던 '테러행위'들의 진실이야.
한 10년 전 쯤 일제 강점기 때 살던 어르신들(지금 모두 돌아가심)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오히려 관점에 따라선 지금의 한국인들보다 일본에 대한 증오가 덜 하단 느낌이었네요. 심지어 3.1 운동 때 학생 시절이라 참여했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한 때 잠깐 뿐이었고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일본이나 독립을 신경 쓰기보다 자기 살기 바빴다는 느낌이었고요. 당시 인생 역전을 노려보려면 (?) 외국에 유학 가야 했다고 하죠. 미국까지 가려면 훨씬 돈이 많이 드니 현실적 선택이 일본이었다고 하고요. 사람 사는 것이 어느 시대든 비슷하다 싶었는데, 지금와서는 그렇게 유학간 사람들도 모두 친일파라고 하는 집단도 있고... 뭔가 감정이 너무 과열되었다는 느낌이더군요. 실제로 그 시절을 살던 분들보다도 말이죠.(물론 죽을 날이 내일 모레 였으니 묵은 감정이 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일이 있었다 식으로 너무 담담하게 말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제가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변인선-d2m 그니까요..해석부분만 빼고 자료만 보면.. 살기 괜찮았던 시대 같은데.. 특히 일제때 인구수 늘어난것, 6.25는 수만명이 죽은것 비교해봐도.. 일부 사람들의 죽음(피해)을 가지고 너무 필요에 따라서 확대,과장하는 경향이 큰것 같아요.. 죽고살고, 살기좋고 나쁘고만 본다면 유교땜에 머리도 안자르고, 씻지도않고,길거리에 똥싸던 조선시대보다 훨씬 근대화되고 잘 살게됬는데 말이죠..
잘 짚어주셨네요 일제 강점기는 3가지로 나눠야 합니다. 3.1 운동전, 20~40년대, 40~45년대 태평양전쟁 말기 우선 3.1 운동전 1대 총독 데라우치는 군인출신으로 딱 꼰대 군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규율을 억지로 지키게 하고 마당 앞 청결같은 사소한것만 안지켜도 순경들이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조선인들의 불만이 쌓이다 폭발했죠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난 겁니다. 일본본국에선 깜짝 놀랐죠 대륙진출의 발판인 조선에서 문제가 생기면 안되니까요 바로 데라우치 갈아치운 다음부턴 문화통치를 시작했고 이때부턴 오히려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일제치하에서 조선인들의 권리를 일본인 수준으로 올리는것을 중점으로 노력합니다. 솔직히 무력투쟁으론 답이 안보였으니까요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많이 발전했고 조선시대 보다 일반 시민이 더 좋은 삶을 누렸던건 팩트입니다. 마지막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패색이 짙어지자 만주국, 조선, 일본본국 할거없이 쥐어짜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지옥이었죠 발악을 하는데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고 고통을 느꼈겠죠 결국 일제시대내에서도 시대별로 흐름이라는게 있었던겁니다 35년 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니까요 한국사에선 너무 왜곡된 교육을 해서 마치 35년 자체가 무슨 태평양전쟁 말기 당했던 피해를 계속 당해온걸로 왜곡하니까 문제인거죠
@@polisleo8892 그래도 일본이 살기가 더 나으니까 조선인들이 일본에 남으려고 발악을 한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아직도 일본을 안떠나고 있고. 해방 이전이나, 해방이후나, 일본에서 조선인에 대한 대우는 크게 바뀌지 않았는데도, 왜 일본에 남으려 했을까요?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일제 친일파 양반이 많았습니다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박정현-w1b이 중 일부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는데, 일본 반출량 대부분은 본토 양 부족에 의해 높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그러다 본토에 풍년이 들어 반출량이 줄면 지주들이 총독부 찾아가서 그 양을 늘려달라고 청원했죠. 그리고 소작농이 늘어난 이유 중 상당수는 공업화 전의 식량 수입에 의한 인구붐이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한 결과입니다. 생활수준의 악화가 있었다면 대규모 기근사태로 인해 인구감소가 나타나야 하지만 어땠죠? 실제로 소작농의 증가와 소작료 증가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화전민/도적떼라는 대안에도 불구하고 소작농이 유지된 건 그만큼 생산성의 향상이 됐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죠. 그리고 생활악화 지표라고 들어주신 것의 시점도 춘궁기가 지나 한일합방 된 1910년과, 전시였던 1939/1943년인 것도 체리피킹 아닌가 싶네요. 또한 인구가 바뀐 모수 변화나 행정력으로 인한 암수 감소 같은 요인도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고요. 또한 자살은 여러 요인이 있고, 오히려 쭉 어려웠으면 못 하는 경우도 있죠.
대동아 전쟁나고 일제말은 구한말과 비교할 수 없는 지옥 이었다. 역사가 뭔지 알고 씨부려라. 구한말을 초래한 것은 외세의존 하려든 썩은 대표적 친일 쓰레기 들 이고 지금 설치는 친일 뉴라이트들이 나라를 구한말 처럼 일본에 갖다 바치고 있다는 거 명심하거라 아무 논리없이 일본 공작금 받고 대한민국 팔아먹지 말고 !!!
일제의 어두운 면도 분명 존재했겠지만, 당시 일제시대에 사셨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들 중에는 당시 친하게 지낸 일본 이웃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간간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일제를 드라마와 역사교과서로 배워와서 일본얘기만 하면 분노하고 그게 애국인줄로만 알았는데, 우리 입장만이 정답일까?란 생각에 직접 그 당시 자료들을 찾아보니 제가 배운 것과는 다르더군요.. 근데 이러한 사실들을 주변에 암만 얘기해줘도 되려, 그런 얘기하지마라 일제 만행을 옹호하려는거냐? 너가 역사학자도 아니면서 니 근거가 진정 맞다고 생각하냐? 한국사에서는 그렇게 안나오던데? 라는 반응이더라구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의구심을 갖지 않는 이상 반일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user-ne7bc7sv1p 미화도 왜곡도 과장도 하지말고 팩트로 역사를 받아들여야 그역사가 교훈이 되는 겁니다. 일제 36년의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요? 지도자의 탐욕과 무능, 관료들의 탐욕과 이기심이 파당짓고 싸우다가 결국 나라를 허약체질을 만들어 나라를 갖다 바치고 황제와 고관들은 호의호식하고 영화를 누렸지만 결국 역사의 오점을 남기고 나라를 짓밟히고 자신들도 영원히 매국노로 낙인 찍혔지요. 지도자들이 능력과 세계의 흐름을 읽는 혜안이 있어 미래를 준비하고 국가의 힘을 키우지 못하고 개싸움만 하다가는 반드시 망국이라는 것. 지도자의 통찰력과 애국애민하는 정신. 전문적이고 능력있고 양심적인 참모들과 국가미래를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이 있다면 우리국민들의 근면함과 학문수준 명석한 두뇌 인내심이 탁월하니 무한한 희망이 있으련만 개싸움에 능한 국회의원 나리들과 그들의 정치적 프레임에 선동되고 좌우로 갈라져 갈등하는 우리 국민들의 객관성과 논리와 이성을 잃은 진영 싸움에 너무 낙심이 됩니다.
지금은 참 어려우시겠지만 여러분이 직접 일제 시대를 사셨던 집안 어르신들께 여쭈어 보세요. 친 조부모, 처가 조부모, 사돈 네 조부모님 등께 술한잔 대접해 드리며 당시 말씀들을 들어 보세요. 영화와 얼마나 다른지... 과장이나 허풍이 심하신 분은 말고요. 이삼십년 전부터 수집한 저의 7~8건의 사례로는 호밀밭님 말씀에 적극 공감합니다.
함경북도에서 피난 오신 친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아이들이 학교에서 차별을 받으면 일본인 선생을 찾아가 큰소리를 내셨다고 하셨고 이북에서 서점과 정미소 등 여러 사업도 하셔서 할아버지께서 일본 유학도 하신걸로 봐서. 이 영상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실제 상황이 아니였을까 추측해 봅니다.
@@Riverside-u8w 맞습니다. 친가쪽은 이북에 건물 땅 재산 다 두고 공산당들 피해서 남쪽으로 피난 오셔서 고생 많이 하셨고 할머니께 어린 저를 붙잡고 반공 교육시키셨죠. 제 아버지는 금강산 관광을 가시라고 해도 공산당들 한테 돈 들어간다고 안가시구요. 역사 바로 잡아야 이 나라 바로 세워집니다.
@@user-ne7bc7sv1p정신처리세요. Are you 단세포 인간 ?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도, 심지어 어릴 때부터 세뇌교육받고 자란 북한에도, 당연히 당시 일본인 중에도 성격이나 생각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천차만별인데 댁은 그 중에서 드라마등애서 묘사되는 정형화된 그런 일본인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잖아요 ? 대부분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20세기 초,선진국 중 만족할만큼 식민지를 못 가진 나라.두 군데.독일과 일본. 네덜란드조차 가진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독일과 서양국에 완전 초토화된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에서 겨우 조선과 만주 대만 정도 가진 일본. 모든 침략국이 그랫듯이 이 지역을 블록화해서 폐쇄경제하에 수탈을 매개로한 약탈경제, 조선은 오로지 일본에세만 쌀을 수출할 수 잇고 오로지 일본 공산품만 수입할 수 잇다. 인도가 오로지 영국에만 면화를 수출하고 영국 공산품만 수입할 수 잇엇고 베트남은 오로지 프랑스에게만 고무를 수출하고 프랑스 공산품만 수입할 수 잇엇다. 영국.일본.프랑스는 각 국의 소금과 담배,술을 전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본국으로 가져갓다. 프랑스는 할당량을 매기고 강매하여 착취햇고 일본은 민간 술 제조를 금지하여 술을 강매하엿다.술에는 부가가치세를 매겨 세금으로 착취해갓다. 조선의 농부들은 새참으로 대형 술 도가에서 만든 막걸리를 마셔야햇고, 몰래 집에서 막걸리를 빚엇다가는 10년 가까운 징역을 살아야해서 엄두도 내지 못햇다.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개인들이 자랑스럽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 뿐만 아니라, 사실 어릴 때부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모두 겪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일본에는 별 감정이 없으신 데에 비해 .. 오히려 전쟁 당시에 공산당이 얼마나 잔인했는 줄 아느냐고 말씀하시는 걸 종종 들어왔습니다 ... 당시에는 저도 일본이 절대악인 줄 알았기에 고개를 갸웃했었는데, 최근에야 막상 일제가 더 악하게 묘사되는 데에는 왜곡이 있으며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그나마 조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 있었습니까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님이 말하는건 다 틀렸음. 조선인들은 어쩔수 없이 무조건적인 피해자가 맞음. 우리나라가 그 상태에서 일본한테 무슨 해를 어떻게 끼쳐요. 결국엔 일본은 일방적 가해자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어느 매체에서 우리 국민들이 수동적이고 무조건 굴복하는 인간으로 묘사한답니까? 당장에 문학 시간에 배우는 일제강점기 시들만 봐도 우리 조상들의 정신을 엿볼수 있고, 한글 보존 정책, 국내진공작전, 여러 항일 운동 등 어떻게든 살아가고 나라를 되찾으려한 노력을 배우는데요? 이 영상이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잘 만든 영상임은 맞지만, 빼놓은 일제의 만행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저는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영상이 길어지더라도 일제시대의 사실적 조선인들의 피해도 넣어주셨으면 좋았을텐데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수한 민간단체가 생겼다 소멸됐는데 그 이유는 예외 없이 "내부 분열"이었죠 이게 다 일제의 공작이나 이간질 때문이었을까요? 지금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는 자들이 대의大義보다 소아小我에 사로잡혀 온갖 작태를 벌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조선시대 사색당쟁 후예답다는 한탄이 나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 기간동안 조선왕조 500년간 없다시피 할 정도로 더뎠던 근대화를 빠른 속도로 일제의 목적이 병참기지화 혹은 쌀을 수탈해나가기 위해 진행된 것이든 뭐든 어쨌든 일제가 조선왕조였으면 못했을 근대화를 나서서 해준 것은 사실 한국은 무슨 이슈거리만 생기면 그것을 매번 정치적 문제로 만들려고만 하니 편 가르기가 일어나고 왜곡과 과장이 심하지..
솔직히 소름돋았다.ㅋㅋ 영상의 처음 부분과 쌀 수탈 관련 내용을 들었을땐, 지금까지 교과서로 역사를 공부해왔던 내 인식, 그리고 사회 전반적인 인식과는 정 반대의 생각을 도출해놓는거 보고 소름돋았고, 조선 왕조 노예제, 일제강점기 시절과 같이 끊임없는 착취 속에서도 길을 개척해 나갔던 우리나라 국민들의 역사가 너무 자랑스러워지기까지. 항상 힘없는 노예, 당하기만 하던 무능한 이들로만 비춰지던 .. 이제야 퍼즐이 촤라락 맞춰지는 기분입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이고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니깐요. 다들 산미증식 계획 때문에 굶어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나 알고 말하시는건지. 그리고 애초에 강제 합병 되기 전에도 대한제국은 산업화의 시작과 근대 문물 수용을 진행중이었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발전시켰네 같은 ㅈㄹ은 애초에 발전 시작중인 나라를 점령해 놓고 여러 수탈로 발전을 무디게 한 사실도 모르면서 하는 소리 아닌가요..,,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견해의 공유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역화’만큼 역겨운 게 또 있을까 싶네요.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금단의 상자라도 되는 것처럼, 주류 의견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매국노, 정신병자 취급하는 쓰레기같은 풍조는 없어져야겠죠.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만 분노하지 말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도 하고 있는 왜곡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해 봅시다.
저의 외할머니는 어릴적 진짜 가난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당연하겠죠. 그 시대에경북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뻔하겠죠. 제가 진짜 어릴때 외할머니께서 뉴스등을 보면서 입버릇 처럼 말하던게 있었어요. 내 어릴때는 조선놈보다 차라리 일본사람이랑 일하는게 훨씬 낫드라 돈 꼬박꼬박 챙기주고 약속 잘 지키고 친절했다. 그시절은 진짜 살았던 외할머니는 입버릇 처럼 말했어요. 이것을 다시 생각해보면 미디어가 너무너무 왜곡 된게 많은 것 같아요.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해 사라진 것은 분노하지만, 당시 우리 민중의 입장과 처지를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역사인식과 국제관계의 올바른 출발이 된다. 북한 간 첩 민주당놈들과 주사파 간 첩놈들 처럼, 한민족을 내세우며, 반일 선동질을 해, 미래한국의 경제와 국방, 외교를 망치려는 반 한국세력의 거짓말과 왜곡 선동질에 더이상 속아서는 안된다.. 과거 일본제국의 악행을 과장 선동해, 미래 일본과의 협력을 막으려는 북한 간 첩들의 세뇌공작을 과감히 몰아내야 한다.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그럼 일본에 나라를 뺏겼는데. 그 나라의 순경이 되고 싶지 않을까? 그래야 가족도 지키고 돈도 버는데. 아니면 놀아? 노냐고. 그리고 일본이 백프로 다 뺏어가면, 그거야 말로 조선인 전부가 들고 일어날 빌미가 되는 건데. 쌀 수출한 돈 줬다고 그걸 가지고 합리화를 해? ㅁ ㅐ ㄱ ㅜㄱ 노 이상.
칼은 양면이 있지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칼이거나. 우리에게 겨눠진 칼은 무서운 칼이었기에 우리의 시각으로 보아야지요.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너희에게 사람 고기 요리를 해주려 하였던 것이다 라는것은 일본인들의 변명과 미화입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방향이 다른 미래로 나아갈 수가 없겠죠?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유익한 영상입니다. 나는 X세대로 오십이 넘었습니다. 일평생 반일 감정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일제 때 징용을 다녀온줄 알았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번듯한 사무실의 책임자로 일하며, 명절 때는 '일본인'들이 뇌물을 가져왔었다는 이야기를 마흔이 훌쩍 넘어서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들 조상님 절대 다수는 항일 투사도 노예도 아닌 생활인 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아닙니다 일본시대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극극소수이며 해해마다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대량으로(거의전부)일본시대를 악마화하는 세뇌교육을 받습니다 지금 20-30-40-50-60-70대들 교육받은 거의 전 세대가 거대한 새뇌교육을 받고 지금도 받고있으며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년년 세뇌를 진행중입니다
해방시점에서 거의 대다수 국민들이 반일세력(극소수)에 대항할수 없었고 막무가내로 반일역사가 진행되었고 그렇게 대다수 국민들은 침묵으로 일관합니다..그것이 밑에 댓글들에 너무 자주 보이는 우리 할머니는 일본시대가 좋았다고 하더라 자신의 학교교육과는 너무 다른이야기를 하더라는 말들입니다..너무 지칩니다 한국인의 너무 수준낮음과 세뇌 선동의 취약함은 거의 인간수준이 아닙니다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조금만 찾아보면 이 영상이 거짓말이라는걸 알수있죠 왜 산미증식 계획을 일제에서 시작했는지 그결과는 어땠는지 이런 내용은 없고 쌀수출량이 증가했다? 그쌀을 어디 유럽 미국 이런데 팔았나요? 쌀을 절반이상 일본에서 가지고 가니 조선 쌀값이 급등하고 그결과 옥수수나 콩같은걸 수입해와서 먹었는데 그런 내용은 하나도 없고 쌀수출량이 증가했다ㅋ 그리고 일본에 쌀수입이 많아지고 쌀값이 폭락하니 산미증식계획을 폐기했죠
기존의 시각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여주심에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어렸을 때 일제시기에 태어나 사셔서 간혹 말씀해 주신 적이 있는데 일본인들 때문에 삶이 힘든 게 아니라 같은 조선인들 때문에 힘드셨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2차 세계 전쟁 때 집에 있던 놋그릇들까지 다 걷어가서 숨겨두기도 했었고, 이모님 중에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하셨다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저희 증조부께서 당시 사업이 잘되셔서 큰 부를 이루고 사셨습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신다거나 그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단지 사업 하시면서 자식들 뒷바라지 하고 지역사회 기부도 하시면서 사셨습니다. 일본과는 실질적 얽혀 있는게 없었는데도 그런데 지금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보면 그 당시 부를 이루었단 얘기에 친일파 아니셨냐는둥 친일쪽으로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위대한 열사님들 처럼 독립운동에 무경험이라면 친일이 되는건지 참 안타깝고 희한합니다. 또한 저희 할머니(1920년생)께서 어렸을때 제 앞에서 일본어로 숫자를 읽으시길래 할머니께 신기해서 또 읽어봐달라고 하고, 할머니께서는 옛날에 학교에서 배웠고 일본순사도 봤었다 하셨는데 단지 그런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나쁜이야기는 없었네요. 오히려 6.25때 고생 하셨습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해 사라진 것은 분노하지만, 당시 우리 민중의 입장과 처지를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역사인식과 국제관계의 올바른 출발이 된다. 북한 간 첩 민주당놈들과 주사파 간 첩놈들 처럼, 한민족을 내세우며, 반일 선동질을 해, 미래한국의 경제와 국방, 외교를 망치려는 반 한국세력의 거짓말과 왜곡 선동질에 더이상 속아서는 안된다. 과거 일본제국의 악행을 과장 선동해, 미래 일본과의 협력을 막으려는 북한 간 첩들의 세뇌공작을 과감히 몰아내야 한다..
님 사실에 근거한 멋진 역사 인식입니다. 존중하고 감사합니다. 사실 어려서 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일제시대에 대한 삶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의 실화 실제 이야기들을 들으면 학교에서 배운 일제시대에 대한 우리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왜곡되고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지를 알게 됩니다. 님이 정확하게 그 부분을 한국인으로서 짚어 내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참 놀랍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몰라요-k5f 1930년생이면 지금은 93세이지만 일제시대엔 10대 초중반 93세 분들도 어린대 그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들이 당한걸 얼마나 기억 하겠습니까? 동학군 학살 3.1운동 학살 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그 인근의 조선인 학살 731 생체실험. 등등 일제에 의한 학살 찾아보면 수두룩하게 나오는데 그게 거짓말 같습니까? 어느 연구 단체는 1910~1945년 간 최소 5백만명 이상이 죽었다는데 이 정신나간 유튜버의 말이 맞다고 보는거요? 위안부 할머니 말도 거짓이라 하는 넘들의 말을 말을 믿는거요? 역사 공부 똑바로 하세요. 일본 극우는 지금의 한글이 지들이 만들어 줬다 하던데 그걸 또 믿는 한국넘도 있던데 얼마나 공부를 안했기에 그런말을 믿는지 진짜 한심 에휴~ ㅉㅉ
양반 계층이 독립 운동에 많이 가담하지요. 그간 신분제에 의한 혜택과 특권을 누렸는데 그게 다 사라지니까요. 그나마 양반중에 적응좀 잘한 사람은 친일파, 적응 잘못한 사람은 항일 독립운동가, 내가 냅네 하면서 노비들이랑 주변 농민들이 가져다 주는 생산물로 편하게 공부하고 과거급제나 꿈꾸던 사람들에게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신분제 폐지하고, 양반들을 몰라주거나 깔보기까지 하니 그걸 받아 들일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애국이 아니고 그냥 자신들 기득권을 흔들려는 일본이 싫었던 것일뿐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때 남부가 연방의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던 것이랑 아무 다를게 없다고 봅니다.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된 것은 고종 시기인 1894년 갑오개혁 때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보자면 오히려 일본 덕분에 친일파 양반들이 신분제 비슷한 덕을 본 경우가 더 많다. 법적으로는 신분제가 갑오개혁 시기에 사라졌어도 신분 차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기 때문에 일제가 신분제에서 조선 민중을 해방했다는 억지 주장도 나오지만, 그런 논리라면 1920년대에도 평민 들의 참정권을 주장하던 민주주의 운동인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일어나고 현대까지도 부라쿠민 차별이 남아있는 일본은 20세기 후반까지도 신분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아주 황당한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법적 신분제 철폐가 아닌 실질적으로 사회속에서 신분 차별이 사라진 것도 6.25 전쟁을 거치면서이기 때문에 애초에 원인과 결과가 모두 틀린 주장이다 문맹 80% 1920년대 초반[100], 생산가액과 부가가치의 각각 과반이었던 농업이었던 반면 이후 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해감에 따라 1940년도에는 절반 이하까지 떨어지고, 공업이 30~40%, 광업이 10%에 못 미치게 되는 등 공업의 성장에 눈에 띄인다. 당대 조선 산업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농업 분야는 전근대적인 지주제가 해소되기보다는 더 강화되었다. 조선 농가의 소작지 면적은 1918년 50.4%, 1926년 50.7%였다. 소작지 면적은 이후 급상승해서 1932년에는 56%로 높아졌으며 중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자작농은 20년대 이후로 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헌병, 경찰이 조사한 의병장 및 부장 430명 중 직업과 신분이 분명한 사람이 255명으로, 255명 중에서 유생·양반이 64명(25%), 농업이 49명(19%), 士兵이 35명(14%), 무직 및 火賊이 30명(12%)으로 되어 있으며, 기타 포군(13명), 광부(12명), 主事·서기(9명), 장교(7명), 군수·면장(6명), 상인의 순으로 되어 있다. 또한 1908년에 귀순하거나 투항한 의병장 및 부장 28명 중 8명(28%)이 양반 출신이고 나머지 21명(72%)이 평민 출신이다.
@@하나-h6d 집안마다 형편이 좋고 나쁨은 차이가 있을 순 있는데 625직후에 형편이 괜찮은 집은 찾기 드물었죠.... 저희할머니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신 분이라 조선시대랑 비교하긴 힘들지만.. 여자들이 학교를 다녔다는 것 부터가 조선이랑은 많이 다른점이었죠.... 할머니의 오빠가 일본으로 돈 벌러 갔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네요..(일본에서 찍은 사진도 봤어요)
@@하나-h6d 그쵸ㅠㅠ저희할머니도 일제때 물어보면 그때는 괜찮았고 전쟁후가 진짜 힘들었다고 여러번 말씀하셨어요...심지어 할아버지가 경찰이셔서 먹고살만한 형편일 것 같았는데 그런집도 힘들다고 할 정도면 농민이나 전쟁으로 직업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었을지ㅠㅠㅠ굶는집이 태반이었다더라고요
자국민을 노예로쓴 몇안되는 국가 나라의 발전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아 망하기 직전이었던 국가 이런 상황의 나라를 팔아먹은 인물을 배출한 국가 팔려버린 국가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던 인물들을 친일파라 몰아가며 탄압하는 국가 자진해서 한 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며 아직까지 그런 작자들의 뜻을 이어가는 집단이 남아있는 국가 35년 침탈당했다며 피를 토하며 비난과 경멸을 쏟아내는 그 나라를 수백년을 자국민을 노예로 바치고 재물을 바쳐가며 굽신거리던 그 나라보다 미워하는 국가 심지어 어떤 말도안되는 인간 하나를 대령통으로 만들어 그 수백년간의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자는 발언을 대놓고 하게만드는 국가
1927년생이셨던 돌아가신 제 어머니도 생전에 우리나라와 일본인의 국민성을 자주 비교하시는 말씀으로 침략국가로써 일본은 나쁘지만 일본인 개개인들의 국민성은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것을 제일 조심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더랬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반일정서와 상충하는 부분에서 많이 혼란스러워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DoDo.Shibal 전범국가의 전쟁범죄가 꼭 그 나라 국민성과 직결되는 건 아니지요.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 독일 국민성에 기인한다고 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본도 식민지 확장 경쟁에 한창이던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의 국제정세 속에서 당대 집권세력의 식민지 야욕이 한층 더 심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게 일본 대다수 평범한 민초들의 국민성의 발로로 동일시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일례로 유엔 범죄동향조사 자료에 따르면 일부 사법환경의 차이는 있으나 일본의 2020년 사기 범죄 발생 건수는 인구 10만명당 24건으로 우리의 683건과 비교해 보면 3.5%에 불과함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또한 언급하신 역사속의 왜구 사례는 국민성보다는 북방 오랑캐처럼 당시 문명적으로 후진국에 속했던 섬나라 일본의 시대적 특성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제가 한 얘기도 아니고 일제 치하에서 똑같이 억압의 세월을 사셨던 제 모친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느끼셨다는 부분을 회고한 것뿐인데 마치 돌아가신 제 모친을 비아냥대시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이 편칠 않네요. 제 외조부께서 반민특위조사부장을 역임하셨던 것으로 보면 제 모친이 친일파도 아닐진대 말입니다.
이상한 애국심에 쩔어있는 사람이랑 설전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조선의 문제점을 꼬집으니 이런 대답을 하더군요. "시대 상황이 그렇다고 매국할거야? 잠재적 매국노야?" 아 이사람은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매국노를 줄이는건 강요된 애국심이아니라, 정상적인 국가가 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더군요.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일제 미화영상에 혹하지 마세요. 피해자로써 어두운 면을 보면서 기리지 못할 망정 아 맞아 이런 점에서는 괜찮았지 이러시면 안되죠. 99.9999는 무슨 당신이 잘 알고나 계세요? 그 수가 어찌됐건, 나라는 정체성을 잃고 소수든 다수든 국민들은 괴로워 했습니다. 윤동주, 이원록 등등의 유명한 시인들의 시는 그냥 발악입니까?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은 한국이고, 그런 한국은 피해자입니다. 제발 친일 세력의 주장에 의해 미화되는 일제에 혹하지 마세요. 사실이 있다고 한들, 미화영상또한 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0.0001의 독립운동가를 기리세요. 이딴 거 보지마시고.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저는 정치성향이 자유 민주주의 성향이라 우파에 가깝지만, 일제 미화, 친일 행위에 대해선 정말 역겹다고 생각합니다.
99.9999% 서민들 시각으로 봐도 살기 힘들었던 시대라고. 산미증식으로 곡식량은 증가했지만 그만큼 일본으로 반출되서 만주에서 잡곡을 들여와 겨우 끼니를 연명하고 토지조사로 지주들의 경작권을 인정해주지만 어디까지나 기득층과 친일지주들이였으며 오히려 소작농들의 경작권을 뺏어가서 화전민이 발생하고 만주로 이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건 새발의 피고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분명한건 역사는 일제시대는 친일파 제외 모든 계층이 수탈당하는 시대라고 말하고 있고 너처럼 뇌피셜로 살기 좋았던 시대라고 씨부리는건 근거없는 그저 니 볼품없는 역사관에 대한 주장임.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전 이미 10년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의외로 모르는 분들이 많더군요. 재미있는거 알려드릴까요 ? 그당시 사셨던 (10대 후반~20대 초반) 우리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는 일제시대에 대해서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더군요. 외할머니한테 항상 들었던 말은 " 일본인들이 만든 교각이나 다리는 정말 튼튼했었다. " 이말 정말 많이 들었음. 이런 말 하면 친일파 어쩌고 하겠지만 당시 사셨던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그다지 잘살았던 집안이 아닙니다. 그냥 고만고만했던 집안임. 더 충격적인 증언은 당시 친할아버지 집안이 잠시 엄청 어려웠던 적이 있어서 할아버지가 도시락도 못싸올 정도였음. 근데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할아버지를 위해서 도시락을 매일 싸와서 먹였음. 외할아버지는 어느날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 너희 조선인은 너희 말과 글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라고 했었다죠. 이건 당사자분들한테 직접 들었던 말임. 나도 한때 엄청 반일이었는데 이후 무조건 맹목적 반일만 할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내 나이는 40대 중후반 입니다.
일단 중요한 점은 1.일본을 욕하기 전에 우리 지배층이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 알아보자 2.일본을 욕하기 전에 “왜” 전쟁한번 못하고 정복당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공부하자 3.일본을 욕하기 전에 우리는 최선을 다 했는지를 체크하자 이 3가지를 체크하고 다 복습한 이후에 일본 욕을 해도 늦지 않다 배울건 배우고 욕해라
1. 지배층이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를 욕하기전에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한 짓을 알아봐라. 2.남의 것은 내것이 아니기에 전쟁 한 번 못해본 우리 민족성을 욕하기전에 남의 나라를 힘과 무력으로 빼앗으려 하며 자원과 사람을 죽인 일본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생각해보라. 3.최선을 다하고 안하고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각자 자기 위치에서 변함없이 하던일을 하는것이 그들에겐 최선을 다하는 일이었을것이다. 그것이 수탈을 당할것을 알면서도 또 벼를 심을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user-ne7bc7sv1p일본이 아니어도 어디에든 먹힐 운명이었습니다. 나라가 힘이 없고 지도자는 부패하여 사치와 미신에 빠져 굿거리나 하고 궁중 암투에 ,매관매직으로 관료된 자들은 백성들을 수탈하고 청나라 러시아 일본 중국 모두무두 침을 바르며 서로 먹으려고 나대는 시기였답니다.
과거 일본 원폭으로 블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유명 일본 만화 작가은 당시 조선인에게 도움받아 어려운 시기을 극복 했다는 자서전 있어 현재의 대한민국을 존경 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현재 한일 간에 미워하면서 같이 발전해 나아가는데 그저 과거에 집착하면서 발전 못하고 신세 한탄 하는 모습 보면 별로 동정심이 안가네요 그러면서 현재 중국에 대해서는 강국이니 어쩔수 없다 . 속국과 식민지는 다른다 하는데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은 멀리 할려고 합니다
속국과 식민지는 달라요.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아시겠지만 '자주성'을 계속 강조하면서 속국인 게 뻔함에도 우린 자주성을 유지하였다! 이렇게 서술하죠. 이게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속국은 이걸 말 할 여지라도 남겨두죠. 근데 식민지는 여지가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저렇게 싫어하는 것도 그 여지를 완전히 박살냈기 때문입니다. 한사군이니 속국이니 이래도 열심히 자주성 주장하면서 변명아닌 변명을 했는데 식민지는 변명을 할 여지가 없어요.
@@izumiaco5079 그래서요 .. 중국 모시는 사대부만 잘 살았지 백성들은 잘 살았냐요?? 식민지 통해 근대화가 된 배경이 되었는데 그동안 속국으로 지내면서 무슨 발전이 있었냐요?? 그리고 조선 자존심 하면 거북선 한글 말고 다른 근거좀 내새워 설명 해 주실래요 .. 그리고 *같은 조선 민족끼리 죽여도 되지만 다른 나라 ( 특히 일본)가 조선 죽이면 안된다는 논리는 사절 합니다 .. * 표시한 말은 실제 반일 감정이 심한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해 사라진 것은 분노하지만, 당시 우리 민중의 입장과 처지를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역사인식과 국제관계의 올바른 출발이 된다.. 북한 간 첩 민주당놈들과 주사파 간 첩놈들 처럼, 한민족을 내세우며, 반일 선동질을 해, 미래한국의 경제와 국방, 외교를 망치려는 반 한국세력의 거짓말과 왜곡 선동질에 더이상 속아서는 안된다. 과거 일본제국의 악행을 과장 선동해, 미래 일본과의 협력을 막으려는 북한 간 첩들의 세뇌공작을 과감히 몰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