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플랫폼(김세원) 1979.06 DBS-AM . Paul Mauriat Orchestra - Farewell My Love from "Anne of the Thousand Days" (1969) . 김정호 - 날이 갈수록 (1975) . Paul Mauriat Orchestra - Isadora (1969)
밤새워 듣던 방송.... 그때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님 다 살아 계셔서 북적북적 참으로 재미있게 살았었는데.. 지금은 황량한 겨울 들판에 내동댕이 쳐진듯, 구멍난 내 가슴에 찬 바람만이 하염없이 파고듭니다.. 그때는 먹을것이 없고 입을것이 없었지만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고등학생 학창시절은 김세원씨의 밤의 플랫폼을 매일 밤 들으며 맑은 목소리를 짝사랑 했던 꿈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고별 방송이라는 어느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배게 삼아 듣고 있던 제 눈가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이 라디오 스피커 속으로 떨어져 스며 들어가는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외국으로 떠난다는 고별 방송이었기에 더 이상 그 맑고 촉촉히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한다는 생 ? 이별의 슬픔이 남몰래 눈물을 흘렸나 봅니다. 세월이 흘러 광고쟁이가 되어 라디오 CM을 만들게 되었는데 CM녹음실 사장님께서 김세원씨가 돌아 왔는데---- 광고 출연은 안 하는 분이지만 광고 COPY(문안)와 제품 브랜드 이미지에 딱 맞을 목소리라고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 고별 방송에 눈물 흘렸던 기억을 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저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었습니다. 녹음실 사장님께 출연료에 상관없이 출연 섭외를 요청 하여 녹음실 사장님의 삼고초려 덕분에 김세원씨가 직접 CM 배경 음악을 선택하는 조건으로 출연 하시겠다고 승락을 받아내셨습니다. 저는 단숨에 광고주에게 일반적인 RADIO CM 성우료 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승락 받아내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제 열정에 광고주가 얼떨결에 허락 해주었다고 생각 합니다. 드디어 녹음하는 날( 토요일 아침 10시로 기억 합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모하던 그 분을 만난다는 설레임이 CM 제작하는 기쁨보다 컸었습니다. 약속 시간이 되었는데도 안 오시는데 (그때는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한 시간이 흐르는 게 몇 일이 지나가는 듯 하였습니다. 혹시 광고 출연 안 하시는 분이라 마음이 변하시지는 않았는지, 댁에서는 나가신지 오래 되셨다는 데------ 잡지와 신문을 보고 있느라 누가 들어온 지도 몰랐는데 녹음 부스에서 어디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녹음 부스 창 넘어 보이는 분은 중년의 아줌마였지 김세원씨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분이 마이크 앞에 서 계셨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변함 없는 김세원씨가 맞았습니다. 제게 십여년 동안 가슴속에 촉촉이 스며져 있던 여인?을 만난 순간이었습니다만 어떠한 말도 못해보고 인사도 나누지도 못한 채 훌쩍 녹음 끝나고 가시는 모습만 바라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녹음실 오시는 중에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 하시고는 본인이 선곡해서 오신다고 한 음반을 놓고 오시다 다시 가서 찾아 오시느라 늦었다는 이야기를 녹음실 사장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제 가슴속의 스며 있던 그 목소리로 반드시 CM을 만들겠다는 열정이 광고 출연을 처음으로 하시게 하였고 그해 년도 광고 공사에서 선정하는 CM성우 대상으로 선정 되었던 걸로 기억 합니다. 그 이후 다른 CM,CF에서도 종종 출연 하셔서 소비자들의 마음속에 품격 있고 고급 진 목소리를 많이 남겨 두셨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감성의 CM,CF가 없어 보여 집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변했나 봅니다.
가난했지만 꿈이있어 눈물을 삼킬수있었고 힘들었지만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청춘을 불 살았던 그시절 가난이 창피한것이 아니라 불편한것이라 자위하던 그시절 하지만 우리는 순수해서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나누는 푸근한 정이 있었습니다. 모든것이 풍족 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가난 해져서 서글퍼진다. 나 아닌 우리 모두가 생각했던 세상이 아니어서 비록 가난했지만 그시절이 그리워지고 그시절 친구들이 사람들이 보고싶다. 이불 뒤집어 쓰고 직직대던 고무줄로 동여매진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심야방송에 가슴 부풀리던 그시절 빨간 공중전화 부스앞에서 동전이 부족해 주위를 돌아볼때 뒷사람이 말없이 십원짜리 동전을 건네주어 머리를 숙이었던 그시절이 지금 가슴 저리게 그립고 돌아가고 싶어진다.
밤에 플렛트홈 그시간을 기다리며 기나긴 겨울밤 이불속에서 잘잡히지 않는전파를 찾아 열심히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동아 방송였던가? 이제 아득히 멀어진 그시간 다시 이방송을 들을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러나 김세원님을 잊어버리고 훌쩍지나버린 지금 김세원님이 무척 그리워지는 시간입니다
“밤의 플랫폼” 고등학생 때 입주 가정교사를 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 담임의 소개로 1년 후배의 집에서 전 과목 진학지도를 한 것이었다. 가르친 지 한 달도 못되어 후배의 학교성적이 크게 향상되자 그 집 어르신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비록 많지 않은 돈이지만 집안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자부심과 독립정신, 날로 좋아지는 후배의 성적에 집 떠난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사춘기 시절, 순간적으로 바뀌는 감정을 이성적으로 컨트롤하기에는 피가 너무 뜨거웠다. 희망으로 가득 찼던 청춘의 봄날이 갑자기 우울과 고독만이 있는 절망의 시간으로 바뀌기를 수없이 반복하곤 했으니.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키우던 호연지기와 극단의 외로움을 중재할 무엇인가가 더 필요한 시기였다. 그럴 때 조용히 힘이 되어준 것이 라디오였다. TV가 귀하던 시절 진공관식이나 별표전축을 통해 듣던 연속극을 통해 일찍이 라디오와 친해졌었고, 이후에도 ‘전설 따라 삼천리, 별이 빛나던 밤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의 프로를 통해 청각에 의한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나갔었다. 그때 라디오와의 인연 때문이었던가, 우연치 않게 내 인생에서의 첫 직업이 라디오광고를 파는 것이었고 재미있게 그 일들을 해내갔던 것 같다. 가정교사시절 가장 심취했던 라디오프로그램은 ‘밤의 플랫폼’이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1970년대의 동아방송, 밤 10시 즈음 종착역을 향해 치닫는 증기기관차의 굉음이 절정을 이루었다 사라진다. 그리고 폴모리아 악단의 왈츠곡 ‘이사도라’가 배경음으로 깔린다. 저 유명한 김세원 아나운서가 조용히 시그널을 알리고-그 사이에 광고 몇 편이 있었던 것 같다- 짤막한 에세이와 밤의 정취에 맞는 음악 몇 곡이 소개된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내레이터로도 잘 알려진 그녀의 목소리는 이유 없는 젊은 날의 분노와 열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기에 충분히 감미롭고 퇴폐적이었으며 고혹적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반해 무작정 방송국으로 찾아와 청혼을 하거나, 자살까지 감행한 젊은이들의 에피소드가 당시에 회자되기도 했었다. 사연의 막간에 소개되던 음악 또한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 영화 천일의 앤의 OST 'Farewell my love' 등 어린 영혼을 뒤흔드는 것들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지금은 방송국조차 사라져 다시 들을 수없는 프로이지만, 질풍노도의 시절에 가슴깊이 각인되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프로그램으로 남아있다.
필력을 보아하니 수재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불과 1년 후배의 가정교사를 하실 정도면 우수한 실력의 학창 시절을 보내셨을 듯 싶습니다... 이른바 일류 대학도 나오셨을테고, 졸업후에도 사회의 중추적인 일원으로 생활을 하셨을 듯싶습니다. 아마 추측컨데 광고 카피 라이팅을 하신 것 같은데... 창의력과 감성이 풍부한 직업인만큼 노스텔지어를 불러오는 글솜씨가 뛰어나십니다. 음악에 취하고 멋진 글에 또 한번 취합니다.
김세원 박인희 이해인 세분 모두 1945년 해방둥이시죠 라디오를 통해 이 분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초라하고 가난했던 젊은 시절을 버텨냈는데 어느덧 이 분들도 산수(80세)를 바라보고 있네요 참으로 야속하고 무정한 세월입니다 이제 화창한 날은 길지 않고 내 잎사귀들은 떨어져 가는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겠죠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추억의 아픔뿐
79년 6월쯤이면 제가 강원도 산골짝에서 힘들게 군생활 하던 때네요. 그 전에 고등학생때 기적을 울리며 출발하는 기차소리가 들리다가 폴 모리아 악단의 이사도라가 오버랩되며 들리던 시그널 음악, 그러다 흘러나오는 김세원 아나운서의 우수어린 목소리..짧은 분량의 방송이 아쉽긴 했지만 너무나 정감 깊어서 시간만 되면 다이얼을 돌리던 그리운 시절이 떠오릅니다.
우린 이런 정서속에서 좀 부족했어도 낭만이 있었고 정이 있었 죠 그 시절 그립네요 공장에 다녀 돈 벌어 명절이 되면 집에 간다는 기쁨에 설레였던 마음 또 다시 명절이 끝나면 공장에 복귀하는 건 도살장 끌려가는 소 처럼 야간 근무 지겹다 전기나 나가라 전기나 나가라 잠 좀자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 십년이 지나 이제는 할머니 추억이 새롭다
중학교 때에는 "mbc여성싸롱 임국희" 씨 목소리에 매료되어 한번 만나자고 편지를 쓰고 mbc앞에서 2시간동안 무작정 기다렸던일,, "김세원에 밤의 플렛트홈 " 의 김세원씨는 나의 애인 이었죠 ,목소리가 얼마나 예뼜던지 , 한칸 짜리 방이라 어디에서 잘수도 없는 사춘기 시절 ,닭털침낭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라디오와 배터리를 검정고무줄로 칭칭 감겨진 그런 라디오를 머리옆에 두고 듣던 . 폴모리아 악단에 "이사도라" 그리고 밤하늘의 별과 함께 울려 퍼지던 낭낭한 김세원의 목소리, 침낭안은 지금도 잊을수 없는 나의 소중한 공간이었죠 고등학교 방송반때에는 "팝송"은 방송금지라 "폴모리아 악단 "곡들만 주야장천으로 틀다가 어느날 산울림의 "아니벌써"를 틀었다가 지금도 만나면 죽이고 싶은 미친개 별명의 "황의 x 육군대위 교련선생 한테 워카발과 주먹으로 맞은게 군대에서 맞은거 보다 더 많았던거 같고 , 헌병의 주제를 망각하고 정문을 지키면서 라듸오를 듣다가 영창 갔다온일,,,,,, 영화를 보면서 처음 울었던일은 "천일의앤" 음악을 들을때 였다 내인생은 "라듸오"에서 시작해서 "라듸오"로 끝나는 것 같다
아련한 그 목소리 가난이 숙명이던 그 시절 우리 아버지가 나 들으라고 사 주신 라디오 그 시절 그 혈육님들 우리 강아지 롬은 어디로 가 버리셨나? 부모님 참회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도 생을 마감할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사악한 제가 오래 살고있습니다 머지 않은 시기에 제가 가면 반갑게 맞아 주십시오 저는 생의 마지막 인연을 찾아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저를 가엾게 봐 주십시오 태고난 저의 운명인 모양입니다
70년대 말~80년대 초.... 학창시절..... 군생활 시절..... 김세원님이 계셔서 많이 위로가 됬어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메어지다 못해 절여오네요....🥺🥺😢😢 이제 60대 중반이 넘어서 생각하니 참~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네요.... 그 어려웠 시절을 지내신 모든분들께 가내 평안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눈물이 없는 시대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에겐 눈물이 없다는 것은 웃음이 없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잃어버린 눈물과 웃음. 우린 이제 그것을 어디서 찾아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해가 지나면 또하나의 허탈이 쌓이고 그 속에서 피로와 권태가 나부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권태를 느끼는 생활 속에서 의욕을 찾을 수는 없겠죠. 권태란 방향감각을 상실케하고 동시에 자아를 상실케합니다. 우리의 삶에 신의가 없고 용기가 없다는 것은 바로 저마다의 자아상실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요.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일깨워줄 수있는 용기가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있을까요?
김세원씨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것이 어느새 50년쯤 되지 싶은데...첫머리에 기차의 기적소리와 함께 시그널 음악이 나오면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나이였음에도 왜 그토록 가슴은쿵..하고내려앉고,천일의앤 슬픈 주제곡을 듣고 있노라면 영화의 마지막장면에 먹먹해졌던 가슴이 끝내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을쏟게 했던.. 잊혀져 가던 그날들의 감성이되살아 오는군요.정말 귀한 파일 감사드립니다.
젊은시절에 라디오를 통해 밤이면 별이빛나는밤에 방송은 놓칠 수 없는 시절이 있었습니다~^^지금도 가끔씩 그 당시의 음악과 사연을 들어보곤 하지요~^^ 참으로 아련한 추억들이 시린듯한 감정이 마음에 와 닫습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그시절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하... 이렇게 한 회분을 다 듣게 되다니요... 그것도 태평양 너머에서...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종로2가 학원 수업 마치고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에서 듣기시작했던 이 목소리. 그 내용은 또 얼마나 아름다왔는지요... (79년의 이 방송분, 2018년 지금 방송한다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내용입니다.) 그 때 그 중학생은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딸을 낳으면 김세원이라고 이름 짓겠노라고. 결과요? 제 딸아이 이름이 김세원입니다. 한자도 같습니다. 金世媛. 딸아이는 영문도 모른채 이 이름을 갖게되었고, 딸아이 고등학생 즈음에 이름에 얽힌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맡아서는 멋진 불어 발음을 들려주셨던 분... 바람새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예전에 바람새 사이트가 폐쇄되었을 때 제가 얼마나 서운해했는지 짐작하실 수 조차 없으실거예요.)
유난히 추웠던 겨울. 그때는 왜 그리 추웠는지요. 깊어가는 겨울밤 밖에서 메밀묵.찹쌀떡 장사의 외침이 들려올때에 김세원의 밤의 플랫폼 시그널 음악을 들으며 꿈을 키웠던 생각이 납니다.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서 건강을 걱정하는 나이가 되었네요. 요즘은 왠지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말못할 허전함으로 그때로 돌아가고픈 시간들. 자꾸만 눈물이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