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에서 잠깐 인도의 사티 제도에 관해서 나오는데, 사티 제도는 공식적으로 2012년까지 인도 현지에서 일어났었고, 많은 힌두교도들이 그 뼛가루를 만지려고 모여드는 장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인도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사티제도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현재에도 인도의 몇 도시에는 마을의 촌장이 (브라만계급) 다스리는 마을 중에서는 사티 제도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곳이 있습니다. 정말로 노답입니다.
저는 음악을 좋아해서 (주로 핑크플로이드) 음악 채널들 위주로 구독했지만, 초한지 몰아보기를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보자마자 10분도 안되서 칼 구독하게 된 순도 깊은 미친 역사 스토리텔링 채널. 수십개 이상의 채널을 보고있지만 왜 이제서야 알게된건지 지금에라도 알게되서 너무 벅차고 감격입니다. 써에이스쇼 채널은 북툰과 함께 최애채널 투톱이십니다. 아는 것만 보려했던 제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해외에 나가서 살아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릅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대해 흔히 알고 있던것이 극히 일부이거나 편견 또는 오해인 경우가 허다 하더라고요.. 외국이 한국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기가 막히는 경우가 많은것 처럼 우리도 외국에 대해 여전히 꽤나 무지하다고 보면 맞는듯요. 무식해서 아니라 정보가 정확하지 않아서요. 그게 그럴수 밖에 없고 흉도 아니더라고요.. 거기서 살지 않기에.
마르코폴로가 말한게 살짝 과장일수도 있지만 실제 원나라는 당나라,송나라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화려한도시였고 특히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동양부터 인도,아랍,유럽까지 각지에서 사람들이 왔기때문에 대도(북경)는 동서양풍이 조화를 이루는 사실상 세계수도였다고 현시대의 뉴욕같은 위치였죠
그리고 다른 방문객과 아내를 재우게하는 풍습은 유목민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대게는 일부다처제 풍습에거 많이 나옵니다 근친혼 또는 부족혼을 배제하기 위한? 어떤 조치였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씨를 받아서 부족을 키우기 위한. 아직도 이스라엘이나 터키쪽 유목민들 한테 ㅇ런풍습이 어느정도 남아있습니다. 아는 지인도 너무 당황했다하네요. 물론지금은 그런 씨 보다는 천사가 왔다 샌각하고 모든것을 내엊 ㄴ다??
일부다체제는 아랍이고, 유목민족은 일부일체제인데 형사취수제라는것이 잇엇습니다. 형제중에 남자가 죽으면 약탈이 기본인 초원에서 재산 뺏는건 기본이고 남은 가족도 노예되기때문에 만들어진 문화엿죠. 테무친만 하더라도 아버지 에수게이가 죽으니 부족내 힘잇는 놈들이 먼저 재산다 가져갓고 후환이 두려워 테무친도 죽이려햇으나 바퀴보다 작아서 살려줌. 약유강식이 판치는 초원에서 재산과 사람수는 세력이 되고 최대한 손실을 줄이기위한 문화엿습니다.
수호지 삼국지 서유기에도 식인풍습 여러번 나오고 유비를 손님으로 맞은 농사군이 귀한 분 왔다고 아내를 살해해서 고기를 대접하고 칭찬받는 부분도 있습니다. 공자가 인육섭취를 즐겼다는 기록도 여러 책에 있습니다. 당나라 송나라때 인육 조리법을 상세하게 적은 책들도 나왔고 정기로 인육시장도 열렸다 합니다. 명나라 시대 군중이 몰려와 사형될 죄수들의 고기를 얻어먹으려 기다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의화단도 서양인들을 살해하고 인육을 먹었습니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반동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인육을 먹었고 잔치하고 남은 고기를 집에 싸가기까지 했으며 홍위병 중학생들이 여성 지리선생님을 때려죽인후 학교 교정에서 구워먹은 기록도 있습니다. 영아탕과 인육캡슐 섭취는 근래에도 보도되었습니다.
@@비늘가지 사람의 고기를 상육(想肉)이라 부르면서 최고의 미식으로 치는 풍습이 중국에 있었고 공자 역시 상육을 즐겨 먹던 인물이었다 합니다. 공자가 인육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예기(禮記), 동주열국지(東周列國誌), 장자(壯者) 「논어」등에 나온다는데 직접 읽어보지 못해서 정확히 뭐라고 써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인터넷 검색해서 읽은 말들입니다. 중국인들은 인육으로 소금에 절인 고기 (해), 말린 고기 (포), 간장에 넣고 조린 고기 (육장) 등을 만들어 오래 두고 먹었고 공자가 제자가 처형된 후 버리라고 한 건 육장 그러니까 장조림 같은 거라는데요. 철경록(輟耕錄)이라는 인육요리 책에는 '화하 상류지방의 군인들은 사람 먹기를 즐겨한다. 어린이 고기를 상품으로 치고, 여성의 고기는 다음으로 치며, 남성의 고기는 그 아래다'라고 써있습니다. 고대 중국사에서 권좌나 패권을 다투다가 패배한 자는 승자의 먹이가 되는 것을 당연히 여겼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들은 패배한 적장들의 인육을 먹었고 황제 승계때 암투에서 승리하고 즉위한 황제들은 경쟁자들을 죽여 먹었다 합니다. 복수할 때 적의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도만할’이라 하여 사람의 몸통을 완전히 분해하고 때로는 연육과 심장과 간을 씹어 먹고 뼈까지 갈아 먹는것이 흔했다 합니다. 중국 문화혁명때 홍위병들이 반동분자들의 인육을 섭취한 것도 비슷하게 복수하는 의미가 있겠죠. 마을에서 인육잔치하고 남은 고기는 싸서 집에 가져갔고 죽은자의 간이나 심장은 '고급' 부위라서 공산당 고위직 차지로서 돼지고기와 섞어 먺었고 일반인은 죽은자의 팔과 허벅지 근육과 창자같은 나머지 내장을 주로 먹었다 합니다. 문화혁명때 죽은 사람중 지주집 17세 딸 류시울란 (刘秀兰)이란 여자를 남자 9 명이 19번 강간한 후 그녀의 배를 찢고 가슴과 간을 먹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의화단도 비슷하게 서양 여성들을 잡으면 돌아가며 윤간한뒤 좌용(锉舂)이라고 하여 가슴과 음부를 훼손하며 고문한뒤 시신을 먹었다 합니다. 서양인 남녀를 벗겨서 불속에 넣어 아주 태우지 않고 익혀서 먹을 정도로 굽는 소마(烧磨), 물속에 넣고 삶아서 익혀 썰어먹는 포팽(炮烹), 팔과 다리 각을 뜨고(支解) 회처럼 얇게 썰어 먹는 등등 아무튼 사람 잡아먹는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건 확실한건 같네요. 당나라 현종때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이때 포위된 후양성의 1만여 당나라군사가 성안의 민간인 3만명을 잡아먹었다 합니다. 성주가 솔선해서 자신의 첩을 끌고나와 군사들 보는 앞에서 죽인후 살을 먹으라 명령했고 그렇게 성내의 여자들을 모두 잡아먹은 뒤에는 어린이들, 그리고는 노비들을 먹었다 합니다. 아마 역사상 단기간에 걸쳐 일어난 최대 규모의 식인 사건이 아닌지. 공자의 춘추전국시대부터 유비의 후한시대 삼국시대,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중공에 걸쳐 전통은 계속 이어진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