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년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만나고 싶었습니다' 라는 대담 프로에 박완서 작가님이 출연 본인의 성장과정과 체험, 문학에 대한 생각들을 나눴습니다. 2021년은 박완서님의 10주기 입니다 #허스토리kbs #박완서 #김동건 📨회차정보 만나고 싶었습니다_ 19921101 그녀의 삶이 역사입니다. Her story is HERSTORY
여성작가중에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입니다. 군제대후 직장에 복직하여 "도둑맞은 가난"을 읽고 난후, 열렬한 독자가되어 그분의 작품은 거의다 구매하여 읽었지요. 작품과 방송을 통하여 뵙게되었지만, 겸손과 따뜻함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나셨을때도 참 아쉬웠고, 지금도 잊혀지지않고 생각나는 분입니다.
저도 싱아를 몰랐었습니다만, 우연히 지인 중에 저보다 연배가 한참 위인 경기북부 출신 한 분의 이야기에서 싱아라는 걸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옛날 그분의 유년시절 산에 가면 별 맛도 없고 열매라고 할 것도 없는 콩알만한 과실이 있어 배고픈 시절 즐겨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 많던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에 나오는 얘기네요. 작가님의 인생이 다 소설의 내용이 되었네요. 그러니 힘들었던 젊은 시절이 이렇게 훌륭하신 작가가 되신 중요 내용이 되었네요. 원숙이는 어머님 홍보일을 한다고 하는데, 외국에서도 많이 번역되길 바라며, 너무 진솔하고, 얌전하신 대담, 김동건씨와, 잘 보았네..... 사실 김동건씨도 부모님과 생이별 (6.25로) 하신 아픔을 갖으신 분이더라구요. 우리 시카고 경운회에서도 이 소설을 사서 같이 나누어 읽었어.... 우리 모두 건강하고, 죽음이 즐거운 화두가 되자. 자해
오빠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마음 아픈 비극적인 이야기로 아는데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저렇게 아픈 이야기를 물어보는 상황,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왠지 비현실적이네여.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이지 싶기도 하고. 왠지 우리 어른들은 저렇게 말도 안되는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제 정신인 것 처럼 살아야 했구나 싶네요. 진짜 인생이 참 뭘까요.
선생님 작품은 데뷔작 인 나목 부터 발표되는대로 바로바로 구독합니다. 저는60년대에 전주에서 서울숙명여고로 유학을왔지요. 저의 선배님이시죠. 종로구 수송동시절이지요. 시골에서 중학교를 나온 정서를 가지고 서울생활에 가슴알이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인지 선생님 작품은 제 이야기입니다. 육성을 들으니 감격 스럽네요. 시골 할머니 입니다.
대한민국 위대 휼륭하신 문학 예술 시인 대 작가님들이 있었기에 일본 침략 군사문화를 극복한 대한민국에 위대한 정신 길이 빛날것입니다.이것은 우리민족에 혼과얼이 살아서 우리 민족에 자랑으로 길이 빛날것입니다.우리 민족에 문학 시 예술 어두운 시대에 찰란한 별 우리 민족 위에 영원히 빛날것입니다.사랑합니다.감사합니다.존경합니다.
6.25때 피난을 못간 이유, 6.25부터 9.28 수복때까지의 서울에서 인민군치하에서의 이야기는 소설에 직접적으로 쓰여지지않고 1.4후퇴부터 소설에 언급되는 것으로, 오빠와 함께 좌익사상에 약간은 동조한것으로보이나, 그후 좌익에 좌절하여, 특히 오빠는 의용군에 나갔다가 돌아왔고, 이후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감추지못했고 끝내 사망, "그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서 오빠와 같이 인민군에 자의던 타의던 헙력했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이것때문에 매우 불안한 정서를 표현
2011년 1월22일 서울 삼성병원에서 시부께서 폐암 치료 받고 있었는데~ 주치의 권오정 선생님이 박완서 작가님의 셋째 사위분이시라~ 내가 존경하던 박작가님 부고소식을 듣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박선생님 너무 그립습니다~~ 지금 이 영상 보면서 울고 있습니다~~ 세례명도 저와 같은 엘리사벳 ~ 부디 모든 아픔 다 잊으시고 편안 하시길요~~
작가님의 열열팬으로서 작품은 거진 백프로 다 읽었다 자신합니다^^ 마지막. 사후에 따님이 정리 해서. 발표한 책 까지 읽었읍니다만 중년에 한참 아이들때매 잊고 있다가 요즘 시대에 낭독 해주시는. 성우님들득택에 귀로듣는 호강을 하고. 있읍니다^^ 즐거이 듣고 있지만 눈으로 한자한자 감탄하며 집중해 읽을때가 훨 감명깊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지금생시 같이 너무 감동입니다. 마지막으로 화면으로 뵌건 한복 이쁘게 입으시고 자택 마당에서 찍으신 모습이었는데~ 지금 인터뷰 모습은 훨씬 젊으실때 모습이네요^^ 육성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음성도 너무 예쁘시네요^^ 박완서 선생님의 생전의 모습 올려 주셔서 kbs 에 감사드립니다^^
제 친할머니도 딱 저런 분위기셨지..1925년 개성출생에 일본어교육을 받아 한국어보다도 더 능숙하셨는데 해방후 여러모로 맘고생하신걸로 보이지만. 조선인의 정서보다는 탈조선한 사고에 신문물에 호기심을 항상 가지고 항상 모든 의견에도 개방적이시고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신 친할머니와 옛이야기를 들으며 대화를 나뉴는게 손자였던 나로선 정말 특이하고도 즐거운 추억이다.
정혜 엘리사벳 박완서 선생님의 칼럼 글이다. 오래 전 글이지만 현실의 세계는 그 현실이나 이 현실이나 변한 것이 없다. 쓰레기를 통한 소재로 신변잡기, 사회현실, 정치, 종교의 역할까지 말한다.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은 만연체로 길지만 읽기 편하고 주변 이야기로 풀어내는 장점이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칼럼 역시 소설과 닮았다.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GkSjV_mEN8c.html
유년기의 환경이 한사람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먼길을 걸어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그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머니의 뒷바라지는 온전한 희생과 깨어있음이 아니고는 오늘의 박완서 작가는 없듯이 가수 이선희씨 또한 산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니며 그 먼길을 노래로 지루함을 달래곤 했다는게 가수로서의 목청을 갈고 닦는 시발점이였고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그 시원한 목청이 나오지 않았나 싶네요. 박수근 화백 또한 가난과 그 시골 냇가의 빨래터와 가난한 초가집이 머리에 각인되어 타향에서 지우지 않을려고 무채색의 그림을 그렸다고 봅니다.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는 아날로그의 무채색으로 남아 있었음을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보면 절절한 그리움으로 표현되어 있는것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