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방송도 중요하지만 한국 교과서 감시가 훨씬 더 중요한데.... 저 칠지도는 중학생 정도만 돼도 새겨진 글자(한자)풀이를 해 보면 우리 근초고왕이 왜왕을 제후로 삼아 '후왕'이라 칭하며 칼을 하사하고 '후세에 전시하라'는 말까지 남긴 게 확실하거늘... 우리 교과서 8종중 단 하나만 '백제가 일본에 하사'했다'고 썼음.. 나머지 7개 중 3종은 오히려 일본의 왜곡과 유사한 뉘앙스, 4종은 중립적 묘사....ㅠㅠ 미친 사학자 매국노들임...ㅠㅠ 언론 토왜들은 눈 딱 감고 방조질...ㄷㄷ
칠지도 명문 • 뒷면 27자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 앞면 34자 泰△四年五月十六日 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 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 △△△△(作)祥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글자입니다.) 이건 왜곡이 불가능 .... 왜왕 지 에게 줄만하다 . 전시후세 ..후세에 널리 보이고 전하라 백제 왕도 아니고 왕세자가 당시왜왕의 이름까지 부르며 하대 명령문으로 버젓히 적혀있는데도 왜곡 할려고 오만가지 수단 다 찾다찾다 답이 안나오자 무슨 중국에서 백제통해서 내려준거라고 하고 우김
모든 문물의 전파는 하방이 자연스럽다. 원재료인 철정을 한반도로부터 수입해야할 정도로 초보적인 제철기술조차 확립되지 못했던 왜에게 칠지도를 바쳤다?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논리전개. 더구나 백제사상 가장 강력했던 정복군주였던 근초고왕때가 아니던가. 22담로 중 하나였던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해석이 지극히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명문의 몇가지 불명확한 부분을 들어 역사자체를 왜곡하는 왜인들의 처사가 끔찍할 따름이다. 그리고 실제 사실을 왜곡시키면서까지 억지주장을 하고 있는 왜인들의 한반도 컴플렉스가 딱하다. 독도를 저들의 영토라고 억지를 불리고 있는 저들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의 변화도 없다. 왜국과 왜인들은 전혀 신뢰하지 못할 종족이라는 신숙주의 가르침을 명심해야 된다.
고두심씨가 역사 다큐멘터리를 진행한다는 것이 상당히 신선하면서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옵니다. 하지만 낙랑, 대방등 한사군의 위치는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식민사관으로 축소한 한국의 역사를 한반도로 국한하여 한반도에 있다고 단정한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낙랑, 대방은 한반도의 백제가 아니라, 요동이나 요서인 만리장성과 인접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한성 백제에서 발견된 중국의 유물은 백제가 22개의 담로의 일부인 요동지역에 진출하여 중국과 교역을 하기도 하고 전쟁도 하면서, 입수한 물건중의 일부입니다. 그것을 한반도에서 축출된 한사군의 중국인들에게서 입수하였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방영한 것입니다. 백제가 자신의 담로중의 산둥반도에서 중국과 교역을 통하여 한성백제에 물건을 중국의 물건를 입수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이상하게 한반도에 있지도 아니한 한사군에서 중국인에게 중국물건을 입수하여 고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점령하고 한국의 상고사를 거짓말로 지어낸 일본의 식민지 역사학자의 거짓이론입니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으로 거의 한국인들이 백제는 의자왕의 부패한 생활로 낙화암 3천궁녀로 백제의 마지막이라고 알고 있지만, 백제는 22개의 담로의 제후국을 일본, 중국, 베트남까지 가진 해상 지역을 연결한 강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역에서 싸운 기록이 중국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 백제가 당나라를 점령하였다면, 우리는 지금 좁은 한반도에 갇힌 좁은 영토의 국가가 아니였을텐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22담로의 제후는 모두 백제의 왕족후예들인데, 왜에 방문한 백제의 왕과 인척은 당연히 왜왕의 아버지나 숙부인데 반갑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을 방송에서 마치 마치 백제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왜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바로 왜는 백제의 일부인 것입니다.
백제가 후왕이라고 인정할정도의 국가였던 왜의 사신 몰골이 저정도라면 후왕이라는 칭호는 다른 의미로 칭해졌을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면 왜의 사신이 정식 왜가 아닌 다른 일본 부속 지역의 사신을 왜의 사신이라 칭했을 수도 있고요. 그땐 일본이 통일되기 전이었으니... 암만그래도 사신은 그나라의 얼굴인데 왕이 다스리는 국가의 사신이 천쪼가리 뒤집어 쓰고 왔다고 보긴 그렇지 않나요? 저런 복장이면 아주 남쪽 지역 오키나와 쪽 사신 같기도 하고요.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註 008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註 009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註 010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註 031와 대수(帶水)註 032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편. : 자 한서지리지 낙랑군편을 보면 패수란 강물의 상류에 낙랑군 패수현이 있는데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빠진다 대수란 강물의 상류엔 함자현이 있고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 대방현에 이르러 바다로 빠진다. 열수란 강물은 탄열현에서 나와 서쪽으로 점제현에 이르러 바다로 빠진다 열수의 하구는 열구라 불렸음이 사기 조선전 한서 조선전 후한서군국지에 나오고 낙랑군의 열구현이 있었다. 한나라 침공군이 고조선을 칠 때 패수의 상류의 수비군을 격파하고 곧바로 왕검성에 이르고 한나라 수군은 열수의 하구 열구에 상륙해 곧장 왕검성으로 진격하다 우거왕에게 패했다. 그러면 열수는 대동강. 패수는 청천강 대수는 예성강 혹은 그 근처의 강이니 이로써 낙랑군이 북한 평양이요 대방은 황해도란게 확실해진다.
이병도 학설 " 그러면 열수는 대동강. 패수는 청천강 대수는 예성강 혹은 그 근처의 강이니 이로써 낙랑군이 북한 평양이요 대방은 황해도란게 확실해진다." 조선총독부 > 1925년 6월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 1946년 3월 창설된 국사관(國史館) >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1. 일제 식민사학자 : 요시다 도고, 쓰다 쇼우키치, 이마니시 류, 구로이타 가쓰미, 이나바 이와키치 2. 조선사 편수회 고문/ 대표인물 : 이완용, 권중현, 박영효 / 최남선 이능화 3. 1세대: 이병도, 신석호
일본의 역사가 거짓인 이유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음. 나라가 나라에 영향을 받을 때는 일반적으로 강대국에서 약소국으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백제가 일본에 영향을 끼친 건 현대까지도 언어에 (쿠다라 나이 : 백제의 것이 아니다 : 가치없다)남아 있는데 일본이 백제에 영향을 끼친 건 찾아볼 수가 없죠.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註 008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註 009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註 010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註 031와 대수(帶水)註 032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편. : 자 한서지리지 낙랑군편을 보면 패수란 강물의 상류에 낙랑군 패수현이 있는데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빠진다 대수란 강물의 상류엔 함자현이 있고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 대방현에 이르러 바다로 빠진다. 열수란 강물은 탄열현에서 나와 서쪽으로 점제현에 이르러 바다로 빠진다 열수의 하구는 열구라 불렸음이 사기 조선전 한서 조선전 후한서군국지에 나오고 낙랑군의 열구현이 있었다. 한나라 침공군이 고조선을 칠 때 패수의 상류의 수비군을 격파하고 곧바로 왕검성에 이르고 한나라 수군은 열수의 하구 열구에 상륙해 곧장 왕검성으로 진격하다 우거왕에게 패했다. 그러면 열수는 대동강. 패수는 청천강 대수는 예성강 혹은 그 근처의 강이니 이로써 낙랑군이 북한 평양이요 대방은 황해도란게 확실해진다.
사랑하는 훌륭한 코리언 여러분!! 이조실록(조선왕조실록 원본) 세종편에 이런 기록이있습니다."한글은 이세종(이도)이 만든것이 아니라 옛고려의 큰들을 본 따 만든것이다" 놀라운 기록 입니다.왜? 사관은 굳이 이런 기록을 남겨야 했을까요? 왜 이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당시,이조실록을 기록했던 담당 사관은,중국황제가 직접 임명했기때문에 조선왕도 못건드렸습니다. 그만큼 조선왕조내에서는 왕보다 위에 있었다고 할수있습니다.그런데 당시 세종은 한글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대대적으로 전국방방곡곡에 방을 붙이고 선전하며 심지어 해례본이란걸만들어 직접 창제한것처럼 속이고있었습니다.이 광경을 지켜보던 실록담담 사관은 후세에 이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그런데 이조실록을 읽어본 국내역사학자는 한명도 없다는 사실..다만,다른사람이 일부분만 읽어서 이 사실을 숨기는데만 급급해왔습니다.여러분들 더 세종이 한글창제한걸로 알고들계시죠? 고려글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시죠.서울대 사학교수에게 이 부분에 대해 물어봤더니 생전 처음듣는다며 사실이냐고 되려 묻더라구요...아~ 아~ 수능암기교육제도하의 한국인들! 그리고 한국사학자들 모두 우리역사를 절반이상 잘못배워왔스습니다.우리는 이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이런식으로 현재 한국사와 같이 중국과 조선왕조 중심의 비객관적으로 만들어진 한국사 부분이 절반이 넘는 부분들(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분단/위화도회군등) 이렇게 삐뚤어진 내용의 국사인 韓국사로 계속 암기교육으로 세습시키는 한 우리한국인들...남욕 남탓 생활과 내로남불 정신은 고쳐질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 근본인 가짜韓국사(반짱깨 韓국사 상태)의 진실을 이렇게 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참역사 펌)
고구려의 영토가 잘못되었다 서쪽으로 북경까지였으며 북쪽으로는 내몽골 시라무랜강을넘어섰다 그리고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평양에 한사군이 그럼 한사군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 포위된 상태란말인데 고구려가 가로막혀있는데 한나라가 어떻게 관리했을까 비행기타고 ?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다는것은 사실이다 나머지 일본서기를 인용한것은 모두 사기다
이소노가미라는 이름을 분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소노가미'를 '이소', ' 노', '가미'로 분리하여 분석해야 합니다. 측 "이소"는 백제근초고이다. 근초고의 이름이 '요속일'인데 '속'은 '소고 '풀어' '근초고'를 의미하고, '일'은 '왕'을 뜻하며 '가미'는 일어의 '신'이어 합하면 '최고의 신의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속일'은 백제 근초고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근초고가 신궁에 진좌되어 있을까? 그 이유는 당시 백제 근초고가 고대일본을 침략할 때 왜에 있는 가라 세력에게 고베/오사카지역에서 사망했으므로 후세에 이소노가미신궁에 진좌한 것이다. 저세한 내용은 본인이 저술한 학마을출판사 발행의 "고대일본은 백제가 지배했다"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읍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