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죽 댐은 완전히 물길을 막는게 아니라 어느정도 물길의 속도를 늦추는 형식이었을겁니다.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다가 거란군이 도강하는 타이밍에 맞춰 댐을 터트려서 물살이 거세지도록 하는 용도였을것으로 봅니다. 그정도만 되어도 거란군의 도강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이때 기습을 하면 큰 효과를 보았을것 같습니다.
정말 뚝을 만들어 수공을 했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효과가 몇가지 있는데 첫째로 수심이 깊었다면 도하를 위한 부교를 제거하는게 있을것이고 둘째로 하천 주변을 진흙탕으로 만들어서 기병의 기동력을 제한하는 것이 있을것이며 셋째로 겨울이니 동상 같은 비전투손실을 노리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물로 상대병력 반을 쓸어버리는 것은 소설이나 만화에서만 나오는 장면이니까요.
한반도 겨울에 물도 없을텐데 약간의 물을 완전히 막아 거란군이 물이 없다고 생각하고 건너는 중에 발목 높이 정도까지 물이 내려오면 한겨울에 물에 발을 담궜다가 빼면 얼어서 발이 날아갈텐데 당장 전투에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유의미한 부상병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긴한데 그래봐야 100여명 다칠텐데 노력대비 너무 성과가 없을텐데 과연 이런 강물을 막는 개고생을 했을지 의문이 든다
고려가 청야전술이 발전할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란제국은 당시 약탈을 세계에서 가장 잘했던 특수부대들이 있었고, 애초에 거란제국의 기병대들 자체가 약탈에 특화된 강력한 기병대였기 때문에 거란제국이 침략해오면 요새나 성 안으로 주민들을 대피시킨 후 성 밖의 마을들을 파괴시키고 우물에 독을 타는 등으로 항쟁했죠. 즉, 적군에게 내어주느니 그냥 우리가 파괴하겠다는 진짜 극단적인 전술이었음. 적군이 돌아가도 이미 도시들과 마을들이 초토화가 되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반란으로 이어질수도있는 위험한 전술이기도 했음.
귀주대첩에 대승을 해도 거라하고 고려의 관계는 바뀌지 않았죠 고려가 거란을 상국으로 대접하는 형태로 여전했지만 강동6주 반환이나 왕의 친조를 요구는 고려한테 무리한 요구는 절대로 일절하지 않았죠 이전쟁은 거란입장에서 엄청난 타격이었던것이 송나라하고 여러전선에서 싸우건 경험많고 뛰어난 거란장수들 대부분이 귀주대첩으로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는등 엄청난 타격이었죠
고려시대때 서희가 되찾은 강동6주는 압록강 북쪽입니다 ‘강동’의 뜻은 강의 동쪽을 뜻합니다 즉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는 영토를 되찾아서 강동6주를 설치한 것입니다 만약 강동6주가 평안도라면 강남6주가 되어야 합니다 압록강 남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명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북서쪽 영토가 지금의 요하 동쪽 철령까지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북동쪽 영토가 두만강 북쪽 688리 지점인 공험진까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기술되어있는 고려의 영토는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사]에 기록되어있는 것을 그대로 베낀것입니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국인 역사학자들이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병도, 신석호입니다 이들은 친일파 역사학자들인데 해방후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이었기 때문에 다 제거되거나 납북되어서 남한의 역사학계는 이들 식민사학자들만 남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계승해서 왜곡된 우리 역사를 가르쳤고 그들의 제자들도 식민사학을 배워서 또다시 그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의 제자들은 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식민사학을 가르치고.... 그 결과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배워온 것입니다 원나라가 무너진 후 명나라가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자신들의 땅으로 편입시키겠다고 고려에 통보하자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군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역사 교과서에는 철령이 함경도 안변이라고 기술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고려는 그 땅을 지키려면 어디로 군대를 보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함경도이겠죠? 그런데 왜 요동정벌군을 보냈겠습니까? 철령이 요동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자 당시 고려 북쪽 지방의 수령들이었던 조휘와 탁청 등이 그 지역을 갖다 바치고 투항을 했습니다 그리고 원나라는 고려의 북쪽 영토를 직속령으로 편입시키고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공민왕이 그 땅을 수복하기 위해 인당과 유인우로 하여금 군사를 몰아 쌍성총관부를 점령케 합니다 이때 인당은 압록강을 건넜고, 유인우는 두만강을 건넜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쌍성총관부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역사 교과서에는 쌍성총관부가 함경도 지역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일제가 완전히 왜곡한 것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민왕이 북방 영토를 회복한 후 원나라가 북쪽으로 물러나자 명나라가 고려의 북방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우왕과 최영이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이성계와 조민수로 하여금 요동을 정벌토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태종때 명나라와 국경을 합의했는데 고려시대때의 우리 영토였던 철령과 공험진까지를 조선의 북방 영토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세종이 김종서와 최윤덕을 북방으로 보내 4군 6진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그 지역이 현재 우리가 간도라고 부르는 지역입니다 즉 4군 6진이 간도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국에 있는 모든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들, 그리고 역사를 다루는 국가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일제의 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곡된 우리 역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땅에 한사군(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의 사마정은 [사기 하본기]의 주석서인 [사기색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귀주대첩은 사천, 노량 해전과 닮아있다. 사천해전은 물때가 맞지 않아 뒤로 배를 물렸다가 다시 물때가 되어 사천 포구의 왜적을 거북선을 먼저 침투 시켜 무찔렀다. 궤멸적 타격을 입히지 않으면 재침의 우려가 있기에 순천의 고니시를 철저히 고립시켰고, 구원을 온 시마즈군을 죽음으로써 물리쳤던 노량해전..
맥락이 안맞죠 ㅋㅋㅋ 한반도에 어거지로 쳐넣을려니 저렇게 되는겁니다 몽진을 나주로 갔는데 길이 너무 멀고 강이 많아 추격을 못했다는데 북방에서 개경까지를 저당시 기병으로 한달이면 충분한 거리임 개경에서 나주면 비교적 북방에 비해 산지도 없고 평야라 더 빨리가는데 왜 추격을 못했는지 의문점 생기는데 지금 사학에선 이걸 말 못함 ㅋㅋㅋ
발해가 강성할 때 신라는 안남(=베트남) 지경에 치우쳐 있다가 고려에 병합되었다는 기록이 만주원류고에 나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의 영토가 베트남 국경까지라는 것인데. 우리가 배우는 역사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만주원류고만 봐도 백제 신라 고려의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금방 알 수 있읍니다. 우리의 참 역사를 위해 만주원류고를 한 번 방송해주세요.
음력구월구일 중양절 광개토대왕이 요동땅에 살든 거란,비려(우문선비족)을 몰아내고 요동을 차지하고 승리를 기념한날 후에 고구려가 당에 멸망하고 말갈 발해가 그땅을 차지함 요동땅을 빼앗긴 거란은 산서 삭주(압록강 중류)로 피신하여 태항산맥 중턱에 살아 계단식 밭을 일구어 계단이라 불리우다 거란족이 됨 후에 세력을 키운 거란은 말갈 발해를 무너 트리고 고구려 땅을 차지함 압록강,호타하,청하는 산서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거란) 남쪽에서 동쪽으로 꺽여 요서(장흥진)를 지나 요동(흥화진)을 거쳐 귀주 맹주를 거쳐 천진에서 발해로 빠짐 고려 거란 전쟁은 요동(흥화진,등주,박작성)땅 쟁탈전임 또한 라당 전쟁도 석문(석가장,장흥진)전투 요서땅 쟁탈 전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