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연의에서 나오는 제갈량의 신들린듯한 전략은 사실 법정의 전략이었다 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촉나라 최고의 군사 전략가 법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은 큰 힘이 됩니다 꾹 눌러주고 가세요~ 더 좋은 영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채널에 가입하여 혜택을 누려보세요. / @stgt #법정 #유비 #삼국지
사실 이릉전은 관우의 복수라는 명분을 세우긴했지만 촉 입장에선 피할수없는 싸움이긴했죠. 형주를 두고 오와 촉이 왜그리 싸웠는지 유비사후 제갈량이 단독루트로 북벌하면서 나온 결과를 보면 알수있죠..위를 상대로 북벌루트가 사실상 장안, 번성, 합비 3루트밖에 없으니 유비와 손권입장에서는 남군, 번성루트를 누가 가져가냐에 따라 대업의 성공률이 달라지니.. 물론 합비루트에 번성루트까지 전부 가져가놓고도 방어만하고 공격을 성공하지못한 오나라는 아직도 욕먹고있죠
사실 제갈량 자체가 과로사를 안햇을 수도 잇음.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면서 원래 조정해서 해야하는 거 뿐만 아니라 현장의 전술,전략 관리까지 해야하는데 법정이 살아잇으면 최소 현장의 전술 부분은 법정이 처리햇을태니 제갈량의 업무량이 줄엇을 수도 잇음. 자신은 전략 부분인 보급에 전념하기도 쉽고. 적어도 이릉대전 대패 후에 북벌 시기에 손이 부족해서 마속을 현장에다가 보내야 하는 그런 일도 없엇을거고.
@@jaehyekher8391 근데 그것도 위연도 당시엔 뭔가 하긴 햇을거임. [223년에 유비가 사망하고 극적으로 촉한을 재건하고 남중을 평정하여 후환을 예방한 제갈량은 건흥 5년(227년), 위연을 독전부(督前部), 영(領) 승상 사마(丞相司馬), 량주자사(涼州刺史)로 삼았다. 이는 북벌을 위한 사전준비로 적국 영토의 자사나 태수로 임명하는 건 전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제갈량이 이 중요한 국가적 중대사업에 위연을 중용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쳤음을 알 수 있다. 위연이 군부의 중핵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당시 위연은 군부에서는 이미 중추가 된지가 오래임. 아무 일도 안 시켯을 리는 없음. 조운이 더 위긴한데 조운의 나이가 나이라서 이미 은퇴각이 서서히 보이는 시점인걸 고려하면(실제 1차 북벌 직후에 사망) 저 당시 위연은 이미 군부의 1인자임. 거기다가 촉한에서의 량주자사나 량주목은 북벌 최고 사령관에게 달아주는 직위라서(이건 뭐 마초나 강유도 달앗고. 그래서 마초가 빨리 안죽엇으면 북벌의 중추가 됫을거라고 할 정도니까) 이런 위연을 놀게 냅둿을 리는 없음. 애당초 가정에서의 본래 목적이 장합과 본대의 합류를 막는 동안 천수에서 주력군이 천수,남안, 그리고 안정이라는 농서 3개의 군과 호족 그리고 이민족 지원부대의 합류와 더불어서 곳 시작될 수비전 즉 위나라와의 대규모 접전에 대비해서 모든 포진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상규까지 점령함으로써 옹양주에서 장안을 제외한 모든 일대를 굳히기에 들어간다는 작전 계획을 수립햇엇음. 즉 이를 놓고봣을때 가정과 기곡은 마속과 조운이 각각 맡아서 합류를 막아야 하니까 결국 농서를 돌아다니면서 나머지 작업을 누군가가 현장에서 햇을텐데 그게 위연임. 정말 당시 제갈량 입장에선 손이 부족한 게 맞고 그리고 이 임무도 앞선 계획들을 고려한다면 절대 중요하지 않은 임무도 아니고 쉬울 임무도 아님. 일단 농서 3개의 군도 어느정도 굳히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살짝 간보던 입장이라서요. 그럼 제대로 이름 값 잇고 정예군대를 끌고 다니긴 햇어야 햇음. 근데 이건 마속보다 위연이잖음? 그렇게 된다면.
제갈량은 생각보다 군운용과 전술을 보여준게 별로 없음. 제갈량이 마속을 계속 끼고 있었던 것도 마속이 병법을 논하기 좋아했기 때문. 유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마속을 계속 신뢰 했던 건 제갈량은 마속의 그런 능력을 높이 샀던거지. 칠종칠금도 마속과 같이 주도했다는 설들이 있음.그런데 병법을 글로만 배워서 실전이 부족했는데 만약에 법정이 있었다면 마속이 등산하는 뇌절은 하지 못했을거임.
법정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최근에 크게 호평받는 분위기이고 실제로 법정이 뛰어난 책사인 것은 팩트가 맞다. 그러나 제갈량보다 더 뛰어나다고 했지. 제갈량이 군사적 재능이 거의 없고 소하같은 재상으로서의 능력만 있다는 소리는 아니였고 제갈량도 초기 유비가 형주를 얻기까지의 모든 연전 연승하는데에는 제갈량의 책략과 군사적 수완도 많이 컸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유비가 법정 말은 듣는 편이라 이릉대전을 일으키지 않았을것이고 행여나 일으킨다 해도 법정이 책사로 참천했다면 이긴다는 보장은 못해도 대패 하지는 않았을 거임 아마도 서로 눈치보고 소모전 펼치다가 오나라와 협상하고 퇴각했을꺼임 육손이나 법정은 잘알고 있음 서로 싸우면 위나라한테 개박살나는것을 ...
걍 내부에 박힌 프락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게 법정 아님? 솔직히 법정이 내부에서 배신 때린거 아니였음 유비 오지도 못했음 에초에 촉나라가 계속 전쟁을 치룰수밖에 없던이유는 내부단속도 큰거 같음 전쟁이 없으면 내부안에서 지방호족들이 계속 반란을 일으켰을거 같음 위나라도 전쟁에 지쳤다고 전쟁을 아예 안해버리니까 내부에서 반란이 엄청 일어 났잔음.. 그리고 오나라도 산월족? 에초에 오나라 땅 밑에는 그당시 중국땅이 아니였다잔음.. 사씨 일가가 통치하고 있던 지역도 에초에 베트남 초입구 같은곳이라.. 중국이 계속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집하고 절대 바주지 않는 이유도 너무큰 땅에 산이 많고 소수민족을 비롯하여 여럿 민족이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음 지금은 바주질 않으니 의미 있겠냐 싶겠냐만은
@@u_ran 분명 둘 다 똑같이 탁고를 맡는 역할을 줬음에도 이들의 높낮이를 분명히 했던 건 유비였음. 이엄 스스로 트롤짓 한 건 분명한 사실이고, 이에 연판장을 돌려 대신들의 만장일치를 보고서야 이엄 탄핵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거. 그리고 진도는 이엄 탄핵 이후에 사라졌다는 명확한 근거 하나 없음.
제갈공명은 초한지의 소하같은 행정을 담당하는 국무총리 역활. 군사는 방통과 법정이 담당. 방통이 전사하고, 촉의 저항이 거세고, 촉 점령이 되어가자 ,점령지 민심수습및 행정을 담당해 위해서 장비와 함께 형주성에서 촉으로 온 것. 공명이 형주성에 남았다면 여몽과 육손에게 형주를 뻿기는 일은 없었을 것
법정이 조금만 더 살아있었으면 1차 북벌 때 제갈량은 보급만 했을거고 기곡 유인책 그대로에 기산이 아닌 진창으로 달리지 않았을까 싶음. 혹여나 기산으로 갔어도 분명 가정에서 위연을 썼을거임. 게다가 차후 맹달이 상용에서 배신했을 때도 법정은 제갈량처럼 편지만 달랑 보내서 대비하게 하지 않고 맹달을 지원하든 바로 북벌을 전개하든 분명 제갈량보단 한 템포 빠르게 진행했을 것 같다.
솔직히 이릉대전때 누가 이길지는 장담할수는 없을꺼 같고 육손도 용병술이 뛰어나서 정사에서는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사람이라.. 다만 두 사람은 잘 알겠죠 여기서 둘이 싸우다가 병력 소모되면 좃되는걸.. 그래서 눈치보고 소모전 펼치다가 법정이 유비 설득해서 오나라와 협정맺고 끝났을듯 물론 법정이 살아있으면 유비가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을꺼라고는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