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주는 서주 대학살로 초토화된 것이 맞는가? 1)소금으로 유명한 해지 하동군(현재 염성시)는 분명 염호가 맞긴 하지만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조조는 내륙에 위치한 하비 소패등 서주의 중심도시들까지 함락시키진 못했습니다. 소금산업으로 번성했던게 서주라면 관우가 소금장사 했다던 그 염호에는 접근도 못했는데 부의 원천은 주변에도 도달 못했습니다. 즉 공장도 못건드리고 연주 주변 길만 끊은게 전부인데 그것이 서주의 쇠락과 즉결될까요? 3)군을 일으킨지 얼마 안돼서 진궁 장막 여포에게 통수를 맞았으니까요. 4) 즉 조조와 인접했던 서주의 군현들이 초토화된 것이 맞지만 서주 전체가 초토화되진 않았습니다. 5)강동의 이장으로 유명한 장소와 장굉 그리고 노숙 제갈근 제갈량 형제 그외 수 많은 서주출신 명사들이 서주를 떠난 것이 서주 대학살 때문으로 단정 짓지 않은 것 역시 이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건 과거 삼국지 커뮤니티들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사례로 기억하는데요- 6)서주의 황폐화는 대학살의 영향도 있지만 이후 원술 유비 여포 조조까지 한 숟가락 거든 지속된 불안정으로 촉발 된 측면이 더 컷습니다. 7)즉 서주전체의 황폐화는 조조의 서주 대학살만으로 단정짓기 힘든 지속적인 정국 불안정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2.조조는 모든 것을 꿰뜷어보는 신이었던 것인가? 솔직히 좀 젊잔게 말하려고해도 이 말 밖에 안나오네요. 영상에 따르자면 조조는 중원지역에 위치한 연주가 지키긴 힘든 땅이란 걸 알고 통수 맞을 것을 알고도 서주의 초토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가용 가능한 전병력을 이끌고 점령도 아닌 초토화를 위해서 군을 일으켰고 그래서 이삼년을 허비해서 본진인 연주에서 죽자사자 여포 진궁 장막과 영혼의 맞다이를 벌였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출진할 때 내가 잘못되면 장막에게 의탁하라고 말하고서요? 아니 그렇다고쳐도 서주 전역을 초토화 시키긴 커녕 군을 일으킨지 얼마 안되서 회군해야 했는데? 솔직히 농을 좀 섞자면 연의에서 묘사된 제갈량은 합리적으로 본다면 화약 비스무리한 것도 쓰고 바람의 풍향도 바꾸고 밤하늘을 보고 사람의 삶과 죽음을 예측하 내연기관이 아니면 설명안되는 목우유마나 남만정벌시 짐승의 외연을 본 뜬 기괴 한 짐승모형까지 사용한 괴인이고 그래서 관우와 유비의 죽음을 방관하고 스스로 오장원에서 영웅적으로 죽은 중이병 환자라는 게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 묘사된 조조도 그와 크게 다르진 않네요. 자신이 통수맞을 것을 예상하였고 서주 전역의 초토화도 안될 것을 알고 있었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반란 세력을 평정하고 그 세력이 서주로 가 분쟁을 지속적으로 일으켜 서주 전체가 결과적으론 초토화될 것을 알았던 마치 연의의 제갈량처럼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한 인물이라야 이번 영상이 설명됩니다. 전제가 조조의 서주 출병이 서주를 점령하는 게 아니라 초토화 시킨다는 것이니까요. 3. 결론으로 보는 역사 그리고 모든 역사적 결정이 합리적이었다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영웅사관 주인장의 영상을 보면 역사 결정의 주체가 모든 결정을 합리적으로 했다는 시각에 매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예편에서도 언급됐던 궁궐이나 대규모 토목건축은 진시황 수 양제 광해군 대원군 서양쪽으론 루트비히2세에 이르기까지 그거 나라 망하는 지름길이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위험하고 개인적 욕망도 많이 포함된 케이스인데 그걸 왕권 강화라고 한쪽면만 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애초에 진시황이 진시황릉을 대규모 토목건축=왕권강화라고 해석해보세요. 수양제 루트비히2세 광해군 대원군 마찬가집니다. 다 자기가 이룬 업적들 그걸로 다 말아먹었어요. 역사적으로 유명한 위인이고 뛰어난 인물이라고해도 신은 아닙니다. 그가 내린 모든 결정들이 합리적이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게 됏다면 공산주의는 실패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영웅주의 사관이 진리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애초에 트럼프나 프랑스의 제1당이 된 국만전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딸내미 과거로 돌아가자면 히틀러 같은 인물도 발 붙일 곳이 없었을 겁니다. 적어도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나가며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결정권자도 인간이기 떄문에 수많은 오류와 패착이 발생합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감정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는합리주의는 합리주의적 역사관이 아닙니다-적어도 미시사에서는-. 차라리 보이지 않는 이세계의 뒷면을 집중하느니 '내가 잘못되면 장막에게 의탁하라'는 말을 담백하게 받아들이느는것이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조조 개인을 그리고 그시대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쓸 데 없이 리플 안다는 편인데 주인장의 영상에선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것마냥 그리고 그걸 지나칠 수 없는 것 마냥 리플을 달게 되네요. 리플 달 떄 마다 좆같은 반박문만 써서 구독자도 주인장도 좆같겠고 저도 왜 이지랄을 하는 걸까 좆같습니다. 그래도 그냥 그게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보게 되네요. 킹덤 오브 헤븐이 떙기는 밤이네요. 쓴 글이 좆같아도 저 같은 월급쟁인 내일도 일나갑니다. 굳 밤 하십쇼.
손찬이형 감사합니다. 제 오랜 의문을 단번에 해결해주셨네요. 지금까지 나온 서주대학살에 대한 가장 명쾌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타공인 삼국지 어떤 전문가도 역사책에 쓰여진 이런저런 기록들만 되내일 뿐, 이런 분석을 내놓지 않아 정말 답답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조조랑 비슷한 캐릭터인데 비슷하게 프랑스, 잉글랜드 지방에서 수십만 단위 학살을 했던 전적이 있습니다. 똑같이 가질 수 없으면 날려버리는게 낫다는 판단이었고요. (비슷한점 - 패장에게 관대했음, 유부녀 킬러, 명장이자 뛰어난 행정가, 민중을 위해 거병했다고 사기치고 실제론 독재자 길을 걸음)
한가지 이견이 있습니다. 카이사르쪽은 잘 모르는데, 일단 조조는 '사기'를 친건 아니라 생각해요. 조조가 호리행을 비롯해 그가 써온 시들이나 라는 유언명령같은데에서조차 민중과 명사들을 홀리기위해 구라를 치는 '참으로 전설적이고 천재적인 연기자'라도 되시는게 아닌이상, 제 딴에는 진심으로 여겼지 기만적인 태도로 거병을 한건 아니라는거임. 본인이 진정으로 민중을 원하는 자라고 '자기합리화'를 한거라면 몰라도요. 그런 의미에서 사기라기보단 차후적으로 민중에 대한 명시적 혹은 암묵적 맹세를 어긴거(=배반적 행위를 했다)라고 한다면 나름 타당하다고 생각하긴함 ㅋㅋ
카이사르가 조졌건거는 로마의 부와권력을 독점하던 기득권세력이었어요 카이사르도 얘네들이랑 한편되서 잘먹고 잘살아도 되었죠 하지만 그러지 않고 그라쿠스형제가 실패한 민생개혁을 시도하다가 암살된거죠 애초에 독재하려고 했으면 기득권귀족들 싸그리 숙청해버렸겠죠 짐승만도 못한것들은 사람취급하면 안된다는거에요 당시 로마의 시대상을 보면 카이사르 독재 어쩌구는 생각도 못할텐데..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든 조조가 민간에서 오랫동안 악인으로 회자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죠 후에 조조가 중앙권력의 중심이 된만큼 몇몇 청류들은 이해해 줬을 지언정, 위와 조조를 좋게 표현했던 진수도 서주대학살을 육참이라고 표현을 했을정도면, 당시 민간에서는 안좋은 쪽으로 계속 회자되었을듯 하네요.
청류중에 조조를 이해(?)해주는건 위진시기 집권세력 눈치보는 극히 일부가 그랬을 거고 진대 이후로 조조는 서주대학살로 두고두고 까이는 걸보면 '관대하게 이해해줬다'는건 뇌피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목적이 있답시고 학살을 이해(?)한다? 나치 홀로코스트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죠. 문제는 약탈전쟁이나 그냥 초토화 정도면 충분할 것을 수십만씩 대학살을 자행하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감행했다는 거.. 그딴걸 '냉혹하지만 이성적 판단'이라 실드치고 있으니 어이 상실입니다. 비유하자면 강도나 강간범이 피해자를 입막음 하려고 살해한 것을 '냉혹하지만 이성적 판단'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그 나름의 설명은 될 지언정 여러 선택지 중에 막장 선택지를 택했다는 것이 팩트입니다.)
그때 당시 효율만을 중시했던 조조가 생각할수 있는 전략하네요. 다만 이 서주대학살은 결론적으로는 해가 되긴 하지만요. 1. 연주(진궁)의 배신 2. 점령한 서주의 배신(유비) 3. 제갈량 등 주요 인재들의 손실... 효율만을 따지던 젊은 조조가 이해 못하던 대의라는 항목때문에 잃은게 많았던 ....
위빠라 조승상이 높게 평가받는 건 좋습니다 다만 소금을 통한 주장은 뭔가 오 진짜 그런 것 같다! 라고 생각했는데 대효도에 대해서는 너무 결과에 기대서 좋게 보신 것 같다는 느낌이 좀 드네요 조조가 치밀한 인물은 맞지만 그건 다른 사례에서 찾아야지 대효도가 향후 전략 다 고려한 이성적 판단이라는 데에는 찬성하기 좀 어렵습니다 당장 토벌할 때는 아버지 원수도 갚아야겠다 가족들 다 죽어서 화도 났겠다 뿐만 아니라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조조 입장에서 하나라도 명분이 제대로 서고 기회가 왔을 때 조져야하니까 소금 인프라를 망가뜨리면서 아버님 가시는 길 외롭지 말라고 서주 백성들을 길동무로 보내드린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훗날 거길 적들이 먹으면 ㅋㅋ 함정카드임 니들이 거기 갈 줄 알고 내가 다 조져놓음 ㅋㅋ 할 인물은 아니에요 그냥 시발 열도 받겠다 ㅈ같은 새끼 조질 기회도 왔겠다 개박살냈는데 나중에 아빠셋이나 귀크고 팔긴놈 걔들이 거기로 간겁니다 갈 곳이 없어서 거기라도 가야하니까요 다만 그걸 조조가 너네 그럴 줄 알고 내가 여기 조진거임 ㅋㅋ 이건 너무 조승상을 좋게만 봐준 것 같다는거죠 당장 미망인 보지 빨겠다고 헛짓거리 하다가 장남이랑 전위도 본인 아버님 영전에 바쳤는데 그런 행동들은 향후 전략을 고려한 이성적인 치밀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은 아니죠 ㅋㅋ... 뿐만 아니라 연주에서 아빠셋이랑 치고박고 싸울 때도 아 시발 서주라도 일단 먹을까? 하니까 찬합좌가 서주 사람들 너 싫어하는데 연주 뺏기면 어디에서 기반을 잡을 수 있겠냐 연주에 집중해야한다고 간언한 일화도 남아있는데 향후 전략까지 다 고려했다는건 조금 고평가 같아요 ㅋㅋ
캬 탁월한 설명과 해석으로 x알이 탁 차게 만들어주시네요 덕분에 소설 연의와 기타 잡상식들을 오랜시간 접하면서 궁금했던 사소하거나 의아했던 부분이 '손찬이형' 영상을 접하며 이해하기 시작됩니다. 다음 컨텐츠는 아직도 이해를 잘못하고 있는 형주대여론 요부분 꼭 해주셨음 합니다. 적벽대전으로 동맹을 맺고 조조의 남침을 막은 유손 동맹인데 연의와 달리 실제 정사에서는 유비도 유기의 강하 병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의 지분이 있을터인데 왜 대여 받은 남군이 아닌 나머지 4군을 요구하는 손권의 주장에 량주를 점령하면 돌려준다는 나약한 채무자의 스텐스를 취하였는지 아님 촉을 정벌하려는 손권을 방해하고 낼름 한중과 촉을 얻은 유비가 손권에게 빚이 생긴 것은 아닌지 그 당시 상황과 설명이 아직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어 이 부분 컨텐츠로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와~ 정말 감탄하면서 봤습니다. 실제로 삼국지 게임을 하다보면 종종 하는 생각이, 연주를 근거지로 하는 조조를 생각해보면 구축해야되는 전선이 정말 좀 말도 안되게 불합리한 느낌이 든다는 거였어요..ㅎ 걍 게임일 뿐이지만요. 영상에서 설명해주신대로 서주가 비옥한 상태로 계속 유지되였다면 정말 여포와 유비 등을 도모하기 너무 까다로왔을 것 같습니다. 조조는 정말로 마키아벨리즘의 화신 다운 난세에 최적화된 인물이었군요.
인물에 대한 열전도 항상 잘 보고 있지만, 이렇게 특정 사건에 대한 손찬이형의 해석과 추론을 보는 것도 못지 않게, 어쩌면 더욱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단순 뇌피셜이 아니라 사료 등의 근거에 기반한다는 점도 손찬이형만의 독보적인 장점이고요.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무병장수하시고 마우스 들 힘이 없어질 때까지 영상 업로드 부탁드립니다.
손찬이형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사실 전 생후 4개월 아이의 아빠로 주머니 사정이 빠듯함에도 이렇게 조공하는 이유는 손찬이형의 춘추전국시대사도 들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 삼국지보다 동주 열국지를 더 좋아하고, 그래서 독학으로 춘추전국시대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백면서생일 뿐인 저로선 그저 교양서적들만 읽을 수 있어 역사지식이 매우 낮습니다. 그래서 손찬이형의 깊은 식견이 담긴 춘추전국시대사가 너무 듣고 싶습니다 ^^ 언젠가 삼국지가 이야기가 끝날때 꼭 춘추전국시대사나 열국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만약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역경루에 막대한 양의 양곡을 쌓아놓겠습니다!! ^^😅
소중한 후원 감사드립니다!! 후원해주신 소중한 금액은 절대 허투루 쓰지 않고 역경대(?)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춘추 전국시대 영웅들의 서사를 너무 좋아합니다. 언젠가 원하시는 컨텐츠 올려드릴 날이 꼭 옵니다!! 감동적이고 따뜻한 후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근데 서주대학살의 결과가 조조한테 좋기만 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서주 출신 인재 상당수(미축 노숙 제갈근 제갈량 등)가 조조에게 등을 돌렸고 그 중 제갈근은 서주 대학살의 참상을 직접 봤다는 기록이 정사에 나오죠. 이후 틈만 나면 조위의 앞길을 막게 되는 제갈량 또한 학살 현장을 직접 본 게 아니라도 형인 제갈근한테 들었을 겁니다. 뭐 조조가 그런 것까지 고려하긴 힘들었겠지만 서주대학살이 아니었으면 유손동맹을 방해하기 위해 제갈량을 회유하고 그게 씹히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해서 댓 적어봅니다.
당시 서주에 있던 주요 인재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조조의 학살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근거가 명확하게 나오는 인물은 정사 어디에도 없습니다. 1. 노숙 : 노숙은 서주 임회현 사람인데 원술의 부름을 받아 관리에 임명이 되었으나 원술의 인물 됨됨이 때문에 오히려 친분이 있던 주유에게 의탁하는 기록만 있지 조조의 학살 때문에 동오로 갔다는 기록은 일절 없습니다. 2. 장소 : 장소는 정사 기록에도 황건적의 난 때문에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3. 제갈근 : 제갈근 또한 낙양에서 관리에 임명되었고 모친 상으로 고향에 있다가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고 되어있는데 그때가 손책이 죽었을때니 200년이고 조조의 침공이 있었던 193~195년과는 시간상으로 5년 이상의 차이가 나는데 제갈근의 정사 기록에도 조조 때문에 이동한건 아니라는거죠. 4. 제갈량 : 제갈량이 어린 시절 숙부인 제갈현은 원술의 부름에 따라 예장태수로 임명되고 그 이후 유표를 섬겼다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서주학살을 직접적으로 겪었다는 기록은 일절 없고 직접적인 원인은 숙부의 부임에 따라 종속되는 상황입니다. 흔히 웹툰이나 넷상에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출사한것은 서주학살 때문이라는 주장을 많이들 하는데 추정을 할 순 있어도 정사 어디에도 서주학살 때문이라는 근거는 매우 부족합니다. 5. 미축 : 미축 또한 정사의 기록상으로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없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도겸의 휘하였고 도겸이 유명을 내려 유비를 따르게 했으니 서주학살의 원인보다는 도겸이 연결시켜준 인사라는게 좀 더 맞는 내용이겠지요. 한국 삼덕들이 흔히 서주대학살 때문에 조조가 인재를 많이 놓쳤다, 천통을 못했다 이렇게 주장들 하시는데 결국 결과론적인 이야기일뿐이죠. 진등, 진규, 진군 같은 인재들은 서주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조조를 섬겼고, 제갈량과 친척지간인 제갈탄은 서주출신 인사임에도 조위를 섬겼죠.
11:23 명백한 비약. 대전략의 목적이 결과적으로 달성되었다고 해서 그 결정과정이 합리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이번 영상은 전체적으로 논리가 부실하네요. 서주대학살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당시 상황상 적절한 전략이었는지와 조조가 합리적으로 판단했다는 주장은 상관이 없습니다 😅😅😅 그냥 계속 딴소리하다가 주장만 툭 던지고 간 셈..
조조에게 그런 형태로 긍정적인 변수가 되었다라는 관점까지는 확실히 상당히 흥미롭긴 합니다만, '향후를 고려한 이성적인 판단일 가능성이 있다'도 아니고 '판단이라 봐야된다'? 그건 좀 결과론적인 시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애당초 당장 앞뒤 안맞는 사례가 한가지 떠오르는데, 삼국지 순욱전에서 조조는 그 일 이후에도 서주 땅에 눈독을 들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걸 순욱이 '주공께서 그 때 그런 일을 하셨는데 백성들이 결사항전하지 않을까요? 설령 점령한다고 제대로 따를거같나요?'를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면서 말해서 말렸고요. ↑일단 이건 '조조가 영상에서 말씀하신 부분을 고려하고 행한것이 아니다'라는 반박보다는, '적어도 철처하게 계획된 판짜기는 아니라고 본다'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인의 인망 한나라에 대한 정통성은 유비에게 있고, 조조는 새로운 신흥 세력이자 강자 군웅으로써 한나라를 망가뜨리는 입장에서 결정을 해야 했으니... 유비가 이렇게 한다면 조조는 그 반대로 유비 또한 조조와는 정 반대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 까지 생각하면 명쾌한 해석이네요. 협천자를 통해서 자신의 인재들에게 자신이 군주로써 정당하다는 것을 보이고, 천자를 활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불리는 것은 물론이고 서주를 내버려둔다면 나중에는 서주를 점령한 누군가가 또 거대한 세력이 되어 자신의 후방을 노렸을테니... 이미 유비보다 나아질 수 없는 것들은 유비에게 줘버리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것들을 취한 조조의 선택이 당시로써는 최고의 판단일 수 밖에 없던 이유를 잘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손찬이형님께 질문 드릴게 있습니다. 예전에 역사저널에 출연하셨던 홍승현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제갈량은 서주에 본거지를 둔 사람이었다. 가장 민감한 시절에 서주 대학살을 겪으며 '반조조' 기치를 내세웠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는 오히려 조조와 가까웠음에도 유비를 선택했다고요. 혹시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갈량이 유년시절일 때 이미 숙부를 따라서 원술의 세력하에 들어가기 때문에 사서 상으로는 제갈량과 서주학살의 직접적인 관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갈량이 서주학살에 대한 분노로 조조를 기피했다는건 2010년대 일본발 커뮤니티 찌라시에 불과합니다. 근거가 매우 부족한 내용이에요.
손찬이형님 유관장이 정사나 역사 기준으로는 얼마나 친밀한 의형제 사이였는지 영상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나관중 도원결의가 허구라는 것만 압니다. 역사에서는 의형제를 맺기는 했는지, 맺었으면 다른 의형제와는 무엇이 달랐는지, 의형제를 안 맺었으면 얼마나 친밀했던건지 정말로 유비가 관우 장비 죽음을 구실로 내세워서 이릉대전을 벌인건지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