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서 #난정서 #신필 왕희지에게 큰 영향을 준 서법가는 동한의 대 서예가 장지(张芝)입니다.(장욱이 아니고 )^^ 화악비는 동한의 비갈인데 당나라때 장욱의 화악비...라고 기록에 있는건 오류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Music by Whitesand Title - Your Voice Link : • Beautiful Piano Music ...
왕희지의 일대기를 이렇게 감동적인 목소리로 새기듯 또렷하게 들려주신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세상에 드러난 왕희지의 일대기는 많겠지만 선생님처럼 판에 새기듯 들려주시는 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마치 이 채널 가득 왕희지라는 거대한 장강의 물이 휩쓸고 지나간 듯 생생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평소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이 항상 부러운 사람입니다. 젊었을 땐 명필은 아니라도 그런대로 봐줄 만 한 글씨를 썼었는데 컴퓨터를 수십년 사용하다 보니 맨날 자판만 두들기고 글씨 쓸 일이 없다 보니 이젠 글씨가 내가 쓰고자 하는 방향과는 달리 엉뚱한 곳으로 손이 가서 쓰여지곤 하는군요. 요즘에 어떻게든 글씨체를 잡아보고자 시간 날 때마다 새로 글씨 연습을 꾸준히 해보고 있는데 역시 쉽지가 않습니다. ㅠㅠ 어쩌다가 선생님의 이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왕희지 선생과 같은 분들의 글씨야 저희같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 그저 신묘하고 놀라울 따름이죠. 이름만 들어보고 자세히 아는 바는 없었는데 이 영상을 통해서 이렇게 저의 무식함을 일깨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일에 미쳐서 한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사람에게는 다른 일반 사람들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뭔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겠지요. 공들여 만드신 영상과 그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왕희지에게는 양고기를 좋아하는 가난한 친구가 있었는데 양고기가 그리우면 친구인 왕희지에게 편지를 보내 고 반드시 친필로 답장을 받아 오라 했습니다. 답장을 받으면 왕희지의 글씨가 비싼 값에 거래가 되었는데 팔아서 양고기를 사 먹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왕희지의 고사가 송나라에 이르러 소자첨에 이르니 하루는 자첨이 업무를 마치고 퇴궐하는데 어떤 이가 편지를 주며 말하기를 주인께서 반드시 친필로 답장을 받아 오라 했다 하니 왕희지의 고사가 생각난 소동파가 오늘은 푸주간이 쉬는날이라 전하라 하니 멀뚱 멀뚱하고 돌아갔다는 겁니다
중국에서 왕희지를 서성이라 추켜세우는데, 진적이 없는 당황제 이야기에 살을 붙여 서성을 만든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왕 이후의 側筆이나 俗氣 넘치는 서법이 난무하는 것은, 왕법이 중국에서 제대로 이어지기나 한건지 의심스럽게 합니다. 다만 왕의 가문에서 헌지나 회소 같은 명필이 주로 나오는 걸 보면 황당한 얘기는 아닌듯 하기도 합니다. 갑골문 필치로부터 이어지는 중봉필법에 의한 만호제착법도 우리 고려시대까지, 이후 여초까지만 잠깐 나타났다 끝나는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서도의 종지-아주 핵심적인 주제라고 봅니다. 제 견해로는-먼저 예술은 내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꽃피우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얻는 것은 내 안과 밖의 아름다운 이상세계라고 보고요. 그 중 서예의 종지로 좁혀보자면 그 잠재성 발화 시스템을 문자로 심볼화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분한 목소리와 정갈한 삽화가 좋습니다.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당태종과 소익 그리고 변재의 이야기는 좋게 보이지 않네요. 소익의 우정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었고 우정을 믿고 난정서를 보여준 변재의 믿음을 배신하고 일신의 영달을 이룬 것 같아 좋아 보이지 않네요. 당태종 이세민도 그렇게 얻어진 물건을 그대로 가졌다니 좋게 보여지지는 않네요.
왕희지가. 중국의 서성이지 우리의 서풍과는 좀 거리가 있어보입니다. 그 왕씨 가문에 秘傳되어 오던 서법을 익혀 잘 썼는데, 왕씨가의 다른 묘비를 보면 왕희지에 못지 않아 보이고, 오히려 唐代에 들어 서법은 꽃을 피웠다 고 봅니다. 우리의 명필이 많은데, 누구 한 사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 서예의 사대사상의 뿌리가 깊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