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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의 순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ㅣ임재론 vs 기념론 vs 실체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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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сен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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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ментарии : 48   
@user-dj1lb6kt4m
@user-dj1lb6kt4m 3 месяца назад
성찬에 대한 논쟁의 역사는 오래되었지요. 반복하는 것에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 워딩이 영상에 나온 탓에 약간의 부연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 - 실체변화 교의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스콜라 신학"적인 차원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사실 실체변화 교의뿐만 아니라 스콜라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톨릭 신학 자체를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지식은 중요하고, 실제로 신학교에서 비중 있게 배웁니다. 그러나 "신앙"의 차원에서 성찬례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희랍 철학 전반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삼위일체 교의가, 다들 알고 계시듯, 희랍 철학과의 대화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기에, 삼위일체 교의를 신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를 "신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철학을 꼭 배워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만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2. 질료 - 제가 이신칭의를 예로 들었는데, 사실 적절한 예는 아닙니다. "의의 전가"라는 도식을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차라리 성령의 임재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내적 변화라는 틀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어쨌든, 맛을 보고 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는 빵과 포도주의 물리적 차원에는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에 변화가 생긴다면 우리가 영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요. (교회에 보고된 "성체기적"들 중에서는 실제로 질료가 변화된 사례들이 발견됩니다. 물론 기적들은 당연히 통상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성찬례에 참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씹는 것이 아니고, 생물학적이고 소화계적인 과정을 통해 은총을 흡수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성찬례를 희화화하는 것이지요. 성찬례는 어디까지나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성사적이고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이고 내밀한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성찬 안의 그리스도 현존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3. 희생 제사 - 미신 - 전통적으로 개신교에서 미사에 대해 "단 한 번 완전하게 이루어진 그리스도 희생 제사의 가치를 감소시킨다", "성직자에 의한 마술에 가깝다"는 비판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그리스도 희생제사의 현재화로 보는 것은 단 한 번 이루어진 완전한 희생제사의 가치를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드높입니다. 십자가 제사를 단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으로만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효력을 미치고 우리에게 은총을 가져다주고 우리와 그리스도가 친교를 나눌 수 있게끔 하는 사건이 바로 성찬례를 통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미사는 역사적인 십자가 제사를 결코 대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찬례가 예수님의 제사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고, 그 역은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술적"이라는 혐의에 대해서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사제는 오직 삼위일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성찬례 기도문의 구조는 항상 성령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리고 성찬 때 선포되는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던 복음 말씀 뿐입니다. 교회는 결코 예수님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오직, 언제나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그분께 겸손되이 자녀답게 청할 뿐입니다.
@user-pi2yp6wj9m
@user-pi2yp6wj9m 3 месяца назад
3번 문단에서 박수 치고 갑니다. 희생제사의 재현을 '재연'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어왔다고 봅니다! 2000년 전의 그 희생제사, 감사제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 한번의 제사가 미사에서 '오늘화' 되는 것이죠. 미사를 드릴 때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user-ih5vv2xc6u
@user-ih5vv2xc6u 3 месяца назад
와우~!! 속이 뻥 뚫리는 설명 감사해요!😊
@user-er1329
@user-er1329 3 месяца назад
기념의식 자체가 신성하다는 생각이 흥미롭습니다. 저는 영적 임재설은 의식행위에 대한 지나친 망상에 기반한 기형적인 확대해석이라고 생각해요. 일종의 가상적인 환각현상이지요. 기념이나 의식행위는 어떤 초월적 실체에 대한 비유적인 상징적 행위로써 그것은 직관적인 방식을 통한 상기나 인식에 대한 효용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의식행위가 가르키는 초월적 실체는 결코 현실적인 합리성으로 이해될수 없는 (합리성을 초월한 기적에 가까운 영역이지만 그것은 실재하기 때문에 물론 언어적으로 온전하게 설명될수 있습니다.) 시공의 제약을 벗어난 불가항력적인 영역으로써 상징적으로 심오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bangwonkim8667
@bangwonkim8667 3 месяца назад
개혁주의의 성찬론은 실재적/영적 임재설 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입과 치아가 떡을 씹고 우리의 혀가 포도주를 맛보고 목으로 넘기는 그 모든 일련의 실제적 체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성령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분과의 연합을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user-fh2wn6zq3z
@user-fh2wn6zq3z 3 месяца назад
우리가 '기념'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가 라는 지적 넘 공감이 됩니다!
@Isaac_of_syria
@Isaac_of_syria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교회와 가톨릭은 정말로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성체, 성혈이 된다고 믿습니다. 근데 그렇다고 기념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념은 당연히 있는 것이고(루가 22,19) 실제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 성혈이 된다는 것도 믿는 것입니다. 다만 가톨릭과 달리 정교회는 질료라는 개념은 사용하지 않고 성변화를 신비로 봅니다. 맛과 모양은 변하지 않지만 그 본질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의심 없이 믿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론 가톨릭도 질료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의 거룩한 신비로 믿고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Isaac_of_syria
@Isaac_of_syria 3 месяца назад
여기에 대해 사실 교부들의 가르침을 첨부하는게 가장 좋아 보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신 교부들의 가르침을 보면 성찬례 때의 빵과 포도주가 그저 기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체성혈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제적으로 변화하며, 성체성혈을 영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은 거룩하게 양육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Isaac_of_syria
@Isaac_of_syria 3 месяца назад
[성 이그나티오스(35-107), 에페소인들에게] 20,2 : 곧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각자 은총을 받아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시요, 사람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함께 모인다는 사실, 그리하여 일치된 심정으로 주교와 원로단에게 순종하면서 한 덩이 빵을 나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 한 덩이 빵으로 말하면 불사의 약입니다.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해독제입니다.
@Isaac_of_syria
@Isaac_of_syria 3 месяца назад
[성 이그나티오스, 스미르나인들에게] 7,2 : (예수 가현 이단자들은) 성체와 기도를 멀리합니다. 저들은 성체가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살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성체야말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살이요, 아버지께서 자애로이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살인데도 말입니다.
@Isaac_of_syria
@Isaac_of_syria 3 месяца назад
[성 유스티노스(100-165), 첫째 호교론, 66장] 1 우리는 이 음식을 ‘에우카리스티아’(감사제, 성찬)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가르침이 참되다고 믿고 죄의 용서와 새로 남(새생명)을 위한 씻음(세례)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는 이가 아니면 아무도 여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2 우리는 이것을 보통의 음식이나 보통의 음료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육화하시어 우리 구원을 위하여 살과 피를 취하셨기에, 우리는 그분 자신의 말씀이 담긴 기도로 축성되고 또한 우리의 피와 살에 자양분이 되어 주는 그 음식은 육화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배웠습니다.
@Isaac_of_syria
@Isaac_of_syria 3 месяца назад
[테르툴리아누스(160-240), 마르키온 반박] 그분께서는 빵을 들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당신 몸으로 변화시키신 다음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 마르 14,22; 루카 22,19; 1코린 11,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내 몸의 형상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만질 수 있는 몸이 아니었더라면 형상도 없었을 것입니다. 유령이나 허상은 형상을 지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키온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비육체적인 실체를 지니고 계셨을 터이고 육신도 없는 상태로 우리에게 빵을 주시는 까닭에, 그저 빵에 지나지 않는 것을 당신 몸인 체하셨다.’ 우리가 확대해석하여 빵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까지 말하더라도 마르키온의 ‘육신-유령’ 이론은 그다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가 그분의 몸을 굳이 빵이라 불러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마르키온이 심장 대신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수박처럼 더 재미난 먹을거리로 부르는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doingworship
@doingworship 3 месяца назад
혼동이 있어 기존 댓글은 삭제하고 다시 글을 남깁니다. 신학교 졸업한지가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의 오류가 있었던 것 같네요. 총신에서는 영적 임재설로 가르쳤을 거예요. 신학교때 교재를 찾아보니 "칼빈은 성찬식에서 우리가 빵과 포도주 안에만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성만찬 예식 중에 함께하시는 참 인격적인 그리스도와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장로교기본교리)라고 되어 있네요. 제목이 주는 오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시에 특별하게 더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강화된다는 표현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towardsthelife5311
@towardsthelife5311 3 месяца назад
개신교에서도 세례와 성찬은 성례입니다. 성찬이 단순한 기념이나 성령의 임재라면 왜 성찬식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은 목회자로 제한하고 있는 것일까요? 기념이라 하기에는 신자들은 성찬식을 집전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성찬식의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요한복음 6장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Hrh_11
@Hrh_11 3 месяца назад
제가 개신교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는게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제 경험상 개신교의 성찬 집전자는 교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곳은 청년회 회장도 성찬을 집전하는 것이 가능한 교회도 있고 어떤 곳은 말씀하신 것처럼 목사만 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곳은 신자 개개인이 집에서 빵(떡)과 포도주(스)를 마시면서 성찬해도 된다고 하는걸 봤습니다. 전 개신교의 이렇게 난립하는 가르침들을 보면서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분열주의적이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user-bc6pz1jv9s
@user-bc6pz1jv9s 3 месяца назад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님의 몸이 될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음식을 통해 우리의 살과 뼈와 피로 변할수 있게 하느님은 우릴 창조 하셨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으신 하느님이 스스로 어린양이 되시듯 빵과 포도주라는 작은 존재로 변화하시는 것이고 만물중에 특별히 음식으로 변화해주시어 우리 몸으로 모실수 있게 해주시는 은총과 그 신비가 파스카 축제(기념)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그것은 파스카축제 (기념)를 과소 평가 하는것이 아니라 신비와 은총이 현재하는 성찬을 체험 하며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jasonkim1277
@jasonkim1277 3 месяца назад
제가 이해한 걸로는 말씀하신 입장이 가톨릭의 화체설에 대한 이해로 보이는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예수님이 굳이 음식으로 변하여 은혜와 신비를 체감하게 해야할 어떤 이유? 당위성? 목적? 있을까요? 다르게 표현해보면 화체가 되어 얻게 되는 어떤 유익이 있는건지, 말씀의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모실수 있게 된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얻게 되는 유익이 무엇이 있을까요. 궁금하여 여쭤봅니다
@Isaac_of_syria
@Isaac_of_syria 3 месяца назад
@@jasonkim1277 질문하신 것은 아래의 두 말씀만 봐도 충분히 명확해집니다. [요한 6, 47-51] "정말 잘 들어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 6, 53-58]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user-bc6pz1jv9s
@user-bc6pz1jv9s 3 месяца назад
@@jasonkim1277 위에분이 성경말씀으로 당위성과 목적에 대해 잘 설명하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도 입장에서 다른 종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임을 이해합니다. 반대로 제 입장에서 화체설에서 공재설이나 기념설로 구지 바꿔서 얻는 영성적 유익함이 대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 처럼요. 허나 이번주 성체성혈대축일을 지내면서 특별히 묵상하며 개신교 형제님에게 제가 느낀 화체의 유익함을 설명해보려합니다. 개신교에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기도 할띠 항상 늘 하나님와 같은 거리감으로 가깝게 느껴지시나요? 집보다는 교회 , 또는 남들과 함께 있을때보단 혼자 있을때 등 기도가 잘되는 환경 등 각자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먼저 음식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어 하느님을 내안에 모시고 기도 하는 경험은 어떤 공간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거룩한 공간이 되며 내가 성전이 되는 것을 느낄수 있게 됩니다. 과연 이 기도 중에 성변화하신 음식의 질료가 사람살덩이와 사람의 피로 정말 변하게 된다면 그것을 내입에 넣고 삼기키 어려울 것입니다. 어쩔수 없이 예수님의 몸이 역겨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누구나 모실수 있는 제병의 모습으로 변화 하시는 것이 유익하다 할수 있겠습니다. 영상은 올라온지 좀 지났으나 교회 전례력으로 성체성혈대축일에 이질문을 하신 개신교우님께 성령님의 이끄심이 있었을 것이라 말씀드립니다.
@user-ok6ky7fb9i
@user-ok6ky7fb9i 3 месяца назад
화체설아닌 실체변화라 제목에 적은것에서 천주교에 대한 배려가 느꼈지네요 ㅎ
@kgurwns
@kgurwns 3 месяца назад
기념에 대한 말씀은 쯔빙글리가 그렇게 접근했었죠. 그런데 칼빈의 영적임재설의 경우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 측면이 있습니다. 목회적으로 칼빈은 성령의 조명기도(우리의 마음을 주께 올려드립니다)를 성찬 전에 넣음으로써 성찬이 승천하사 성부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과정으로 드러냈죠. 성령이 그 순간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임재하신 성령께서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루터의 공재설과는 차이가 있고 기념설보다는 조금 더 실재적입니다. 그러나 실제 한국의 대부분의 장로교회는 영적임재설에 대한 개념이 사실 거의 부족하여 소극적인 기념설에 가깝게 실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성찬에 대한 것이 역사적으로 신학적 논란이 많았던 이유는 이것이 각 신학에서의 삼위일체적 강조점과 기독론적 차이를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예식이었기 때문입니다.
@jasonkim1277
@jasonkim1277 3 месяца назад
엇..저랑 같은 생각을..ㅋ 저도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나만그런게 아니였어ㅠ
@user-ux7zb8qc1v
@user-ux7zb8qc1v 3 месяца назад
주의 만찬
@chspurgeon1834
@chspurgeon1834 3 месяца назад
저 또한 성찬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왜 굳이 이런 난해한 토론이 이뤄져야만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해본 뒤로는 왜 종교개혁자들이 기존 로마 카톨릭의 성찬 이해방식인 화체설을 배격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일단, 카톨릭의 종교의식인 미사와 개신교의 예배가 신학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의 미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재현하는 제사의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사함을 가져오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계속해서 재현해야한다는 것이 카톨릭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인류 역사속 단한번만 행해졌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완벽하지 않는가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이뤄진 것 중 하나는 성경해석의 재발견입니다. 카톨릭 교회의 전통과 난해한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을 외치며 성경은 문법적,역사적 독해방식에 따라 읽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종교개혁자들은 새롭게 성경을 읽었고 그에 따라 당시 카톨릭 교회의 미사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꼽히는 성찬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해석한 것이죠.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은 엄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재현하는 것에 강조점을 둔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축사로 인해 빵과 포도주가 실제적,육체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는 카톨릭의 주장은 어쩌면 미신적으로 보일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은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난해합니다. 화체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근거해서 설명을 하는데... 글쎄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철학적 사고가 훈련되어있지 않던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다수는 아마 그런식으로 성찬을 이해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towardsthelife5311
@towardsthelife5311 3 месяца назад
기념설은 500년 좀 넘은 역사를 가진 츠빙글리의 주장인 반면 꽤나 분명해보이는 것은 초기 교회의 문헌들 가운데 성찬을 기념이나 상징으로 가르친 문헌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혹시 찾으시면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알아보면 초대교회는 단순한 "설"이 아닌 성찬을 예수님이 이 것은 내 몸이다. 이 것은 내 피다 말씀하신 그대로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받았들여졌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wheeon
@wheeon 3 месяца назад
세례 너무 공감합니다 침례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래의 형식에 나름의 의미와 효용이 있을텐데 편한 방식으로 간소화된게 약간은 의문이었어요
@user-zg1or4ub2h
@user-zg1or4ub2h 3 месяца назад
임재의 의미는 이미 주신 성령님의 충만의 역사
@user-pi2yp6wj9m
@user-pi2yp6wj9m 3 месяца назад
왜 이리 잘생겨졌지.
@user-mx9io2kz1o
@user-mx9io2kz1o 3 месяца назад
성찬에 사용되는 빵과 잔은 사람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희생에 참여케 하는 중간 매개체의 역활을 담당하는 그 역활로써 즉 그 빵과 잔은 실제 십자가에서 찢으신 살과 실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대리 함으로써 그 역활로 그 잔과 빵이 실제 살과 피의 가치를 부여 받는 것이지 그 잔과 빵 자체가 실제 피와 실제 살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왕의 이름으로 오는 사신을 영접하는 것은 그 사신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곧 왕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 사신을 거부하는 것은 그 사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왕을 거부하는 것이 되듯이요 이것은 사신이 왕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신은 왕의 뜻을 이루기 위한 왕을 대신하는 역활로써 왕의 가치를 지닌 것처럼요 이런 특징으로 그 잔과 빵은 십자가에서 찢으신 실제 살과 흘리신 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을 의지하여 사람들은 그 잔과 빵을 받아 마시고 먹음으로써 실제 그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역활을 맡은 빵과 잔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잔과 빵이 대신 역활로써 연결한 실제 살과 피에 대하여 범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분변치 못하는 행위가 단순히 그 빵과 잔에 잘못된 자세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실제 살과 피에 대하여 잘못된 자세로 옮겨 가는 것이죠 이런 특징으로 실제 주의 피와 주의 살을 대신하는 역활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실제 피와 살에 참여케 하는 일을 만드는 데 이 속성의 일이 성찬행위에서 벌어짐으로 그 예식이 있는 목적에 맞게 성령의 역사가 예식을 통하여 나타나고 반대로 그 예식을 분변치 못한 잘못된 행위에 맞게 악령의 역사도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분변치 못한 행위로 말미암아 너희 중에 잠자는 자가 많고 병든 자와 약한 자가 많다라고 경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특징이 함께 하고 있는 예식에 참여 하여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또 대대로 그 예식을 통해 주의 죽으심을 후손 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주의 죽으심을 잊지 말자는 의미만을 가진체 예식의 행사만을 위해 그 행사를 치루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살과 피를 대하는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효력과 혹은 반대로 실제 살과 피를 범하는 영적인 해악이 함께 하는 일로써 그 예식의 행사에 참여하고 이런 특징에 의거하여 기념하여 대대로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chenchen44
@chenchen44 3 месяца назад
공재론도 있죠ㅎㅎ
@archetypa4075
@archetypa4075 3 месяца назад
성령님께서 성찬식이라는 빵과 포도주에 임재하셨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라고 이해를 하는 것은 가톨릭의 화체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장로교회는 웨신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교리상 고백하는 바가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성령님의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신자에게 적용하시고 효력을 베풀어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빵과 포도주라는 언약의 기념 표징이라는 수단을 통해 신자가 믿음으로 먹고 마실 때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케하시는 효력을 전달하시고 적용하신다고 고백하는게 장로교회 ( 개혁교회 ) 의 믿음입니다.
@jasminteabag
@jasminteabag 3 месяца назад
천주교 개신교를 모두 다니는 사람으로서 느끼는거지만… 정말 쓸데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라고 제정한 성만찬이 오히려 분열의 이유가 되고 있는 현실이 답답합니다. 예수가 봐도 기가 막할듯ㅎ
@Hrh_11
@Hrh_11 3 месяца назад
천주교 개신교를 모두 다니는 사람이라는게 어떤 말일까요? 제가 알기론 천주교에선 개신교 예배에 참석시 신부님의 허락이 없거나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고해성사를 꼭 해야하는 것으로 아는데
@jasminteabag
@jasminteabag 3 месяца назад
⁠​⁠​⁠@@Hrh_11언제 어디서나 온라인 예배나 설교를 들을수 있는 2024년에 그런 규칙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Hrh_11
@Hrh_11 2 месяца назад
@@jasminteabag 우선 저는 천주교인이 아님을 밝힙니다. 그런 주장은 상당히 개신교적이며 천주교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회의 허락 없이 다른 교파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으며 만약 이를 어기면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대죄'로 봅니다. 교회의 이러한 원칙들을 잘 지키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천주교 신자분들에게 님의 주장은 상당히 실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jasminteabag
@jasminteabag 2 месяца назад
@@Hrh_11 네 교리상으론 그런데 실제 개신교회예배에 천주교인들 많이 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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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ЖИВОЙ Чехол на Айфо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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