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아픈 기억을 소환하게 되네요. 제가 그 사고 당시 이리(지금의 익산)역에서 직선거리로 500m 거리에 있는 하숙집이자 독서실에 중학교 졸업후 고등학교 재수를 하던 해였는데 11월이면 고입 시험(그 당시 이리는 시험으로 선발)이 있는데 그 날 밤 이란하고 축구경기가 있었고 독서실 재수(이리 대일학원)생들은 대다수가 축구보러 밖으로 나갔는데 나는 시험공부한다고 독서실에서 과목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폭발음이 들리면서 독서실(2~3층 건물) 건물이 흔들리면서 창문이 와장창 깨지고 칸막이 책상이 나딩굴고 하는 와중에 순간 북한에서 미사일 쏜걸로 직감하고 책상 밑으로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지요. 순식간에 2~3번 연이어서 폭발음(정확히 기억안남)이 들리고 주택가가 아수라장이 되어 일단 건물에서 빠져 나와야 압사하지 않을것 같아서 불도 다 꺼진 건물을 더듬거리며 나왔고 상가 샤시가 풍압으로 안으로 들어 가 있었음(축구경기 때문에 가게들이 일찍 셔터를 내린경우가 많았음). 옆집은 tv보고 있는데 기차 바퀴가 날라와서 지붕을 뚫고 방안에 떨러졌는데 시뻘건 바퀴가 열기가 가득한채 그대로 있었는데 그집 가족은 한사람도 안죽었다는 말을 뒤로한채 왜 기차바퀴가 날라온지 영문도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이리역에서 또 터진다고 하자 몇천명이 역에서 멀어 지는 방향(동이리역, 원광고 방면)으로 뛰고 있었고 나도 덩달아서 뛰기 시작하였음...이리역 거리에는 유리조각으로 덮여서(그 당시 유리 공장이 수급조절에 안되어 도시 재건하는데 주문이 밀려있었다고 함) 뛰는데 바스락바스락 거리며 뛰고 또 뛰었음. 어디까지 뛰었는지 모르고 뛰고 있는데 어느 의원 앞에는 남성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피가 보도블럭에 흐를정도로 ... 그 걸 못도와주고 지나쳤던게 한동안 머리에서 죄책감으로 지워지질 않았음(죽었을것 같음) 새벽 4시쯤 독서실로 돌아 오는데 방향을 잡지 못해 아침 7시되서야 밝아지면서 겨우 방향잡고 찼아왔고 이란 축구보러 나간 독서실 학생도 1명 죽었다는 소리 들었음, 그 다음날 시골 어머니가 철도 교통편은 아예 끊기고 일반 버스편도 그 영향으로 원할히 안되었는데 물어물어 빙 돌아서 하숙집을 찿아 오셔서(휴대폰도 없던 때라 주소 하나가지고..) 아들의 생사를 확인 하셨습니다. 영상 들어보니 다른거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인데... 철도역에서 급행료를 받는 시절이 있었다는걸 처음 들었고, 그 급행료로 인해 열차 출발지연 및 그 사고의 빌미를 가져다 준 사거이라는것도 처음 알았네요..축구보러 나갔다면 지금 이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기억을 소환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그 당시 회장님이 거의 전재산 다 내놓고 사고 스트레스로 돌아가셨죠. 현 김승연 회장이 그 당시 20대였는데 빈껍데기만 남은 회사를 갑자기 물려받게되고.. 무기 만드는 일반에게는 알려지지않은 회사에서 지금의 한화로 변신시켰는데.. 이렇게 회사를 키우신건 정말 능력있는 2세 경영인인거 같긴한데.. 뉴스 사회면에 종종 등장하시고.. 드라마에서 무서운 (?) 회장님의 모델로도 활약하시고.. 이제 그집 아드님도 대를 이어 활약하시고..ㅎㅎ 암튼 오늘날의 한화가 만들어진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폭행사건 조사받으러 검찰 소환 됐을때 검사한테 복싱 제스처를 취하면서 검사님 주먹질좀 하실 줄 아십니까? 이러고 나중에는 제가 경호원들 데려다가 빠따 몇대 돌렸습니다 라는 레전드 발언을 하셨음. 그런데 그 처맞은 양아치 종업원 새끼들이 처음부터 양주값 뻥튀기해서 시비를 먼저 걸고 심지어 김승연 아들은 실명직전까지 가도록 존나 맞음. 아들이 실명위기까지 올 정도로 개처럼 쳐맞고 들어왔는데 어떤아버지가 가만히 있겠음? 내가 김승연이어도 경호원 데려다가 피떡갈비 만들고 진작에 반병신 만들어놨음.
@@jefflee887 이미일어난일은 어쩔수없는거고 그나마 복구와 피해가족들의 지원을위해 그당시에도 엄청나게컷던 한화그룹의 회장이 거의전재산을털었는거에 사람들이 용서와인정을하는거지 그리고 에초에 한화는안망함 그때 당시에 화약이 많이필요했는데(고속도로,공장 많이 만들어서)화약을 만들수있는곳이 한화밖에없어서 박정희도 이사태때문에 걱정했으니
저희 할머님께서 저 당시 저쪽에 살았는데 사는곳이 많이 역에서 떨어진 편이었는데도 집에 대문이 갑자기 펑하면서 부셔졌다네요ㄷ 그리고 할머니 친구분들 중에선 저당시에 저기 계셔서 생존했던분이 있는데 그 사고로 다리를 잃으셔서 몇년뒤에 자살 하셨다고 하네요ㅠ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안 일어나면 좋겠네요ㅠ
기업 상대로 벌금형을 때릴때는 그 회사의 자산 상황에 따라서 해야 한다고 생각함 어느 기업에게 50억은 자살을 하게 만들 정도의 금액 이지만 어느 기업에게 50억은 까짓 거 주지 하는 금액 일수 있기 때문에 괜히 탈세 같은거 저질러서 돈 엄청나게 얻고 감옥 한번 다녀오면 됨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 간의 격차나 지위가 평등하지 못한데
제가 이리역 폭발사고 산 증인인데요 그 때 정확히 저녁 9시 15분 이리역 광장 앞에 있었어요 기관사님 이 신무일 씨구요 날아다니는 파편에 맞아 신고 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어요 저두 오른쪽 다리에 파편이 치고 들어와 다리에 피가 -- --- 신고 안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친지 몰라요 ===== 다이나 마이트가 두번 터졌어요 제입에서 땅에 업드리라고 소리을 치었구요 얼마나 많은 분들이 땅에 업드린지 몰라요 제 고함 소리에
음 맞습니다. 이리역 언덕 쪽에 창녀촌에 매춘부들과 그날 밤 손님들이 벌거벗은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그냥 처리되어서 실지로는 더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겁니다. 70년대 625끝나고 20년 후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 짧은 시기에 정말 많은 발전했네여.
진짜 사고나면 밑에 책임 다 떠넘기고 극히 미비한 처벌받고 땡하는게 당연한게 지금인데 그래도 저 당시 회장이 바로 대국민사과에 지금의 수천억원이 넘는 전재산을 내놓고 직원들도 보너스 반납에 봉급의 일부도 떼서 기금마련하고, 현장에가서 작업도 돕고 했네... 어느 방면에선 점점 나아지고 있는 반면에 윗대가리들의 도덕적 책임의식은 반대로 가고 있구나...
현재진행형이죠.... 뇌물은 많이 없어졌다하더라도 '책임감', '성실함' 이런걸 국가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기대못하죠. 그런현실도 있는것인데 월급 현실화하자고 하면 입에 거품무는, 생각이 1차원적인 국민들도 반성해야한다고 봅니다. 주는걸 제대로 주고, 책임도 운운해야 하는데 말이죠....
저때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익산(구 이리) 사람이라 아빠한테랑 들었죠 엄마랑 저때 이리역이면 지금 익산역 엄마 집을 지나가는 기차들이 많았어요 모현동 쪽이라 배산쪽에 살았는데 폭팔음이 엄청 컸었고 그날 기억이 엄마는 4살이었고 큰삼춘은 8살 외할머니한테도 다 들었지만 정말 충격이었다고 합니다.저 날 이후 익산역은 이리는 많은게 바뀌었지만 아직도 익산역 근처만 가면 저절로 슬퍼지고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하춘하쇼가있던 극장은 삼남극장이란 곳인데 자료사진은 삼남극장이 아니군요. 극장 앞엔 버스가 다니지도 않았고, 더구나 사진 찍는 위치는 사고날 때 내가 살던 집의 위치인데 고가가 있을 수가 없죠. 지금도 익산의 이 지역은 그대로 이기때문에 익산사람이라면 이 사진이 틀렸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거에요. 폭발후 사진은 맞네요.
군대에서 수류탄 훈련할때 조교들이 수류탄 수십발이 든 박스를 들고 수류탄 교장까지 옮기거나 탄(총알) 수백발이 든 탄통을 사격장으로 옮기기도 한다. 솔직히 이것도 엄청 잘못된거지.... 그 모든 현장을 간부나 장교들이 관리할 수 없으니까.. 잘못된걸 알고도 하는 현실이 참...
@@user-yh6wn5gu8f 그것도 이유였고 저 중학생때 익산이 고향인 학교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그당시에 익산은 알게 모르게 안좋은 사건 사고들이 많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다가 크게 터진게 이리역 폭발사고인데 이리 라는게 늑대 라는 뜻도 있어서 이름 때문에 이런 안좋은 일이 생기는게 아닌가 해서 익산으로 바꿨다는 썰도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간혹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의 어떤 사건 이름이 피해자 중심으로 붙여진다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가해자는 누구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고 피해자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리역 폭발 사고”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한국화약 열차 폭발사고”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911 테러가 있은 후 아직까지도 뉴욕근교 뉴저지 각 공원마다 그 잔해를 두고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지나가면서 계속 보이는 도로변에 있어서 늘 보게 되고 늘 생각하게 되능걸 보면 우리나라는 어쩌면 사고난 것 부정적 이미지는 빨리 덮어버리고 다시 보지 않으려하는게 있지 않나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