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저격! 당신이 원하던 그 플레이리스트 [#디제이픽😎] #어쩌다어른 #노비 〈어쩌다 어른〉 매주 화 오후 8시 20분 tvN STORY에서! TVING으로 다시보기👉 www.tving.com/... *회차 정보 : 어쩌다 어른 22회 / 책 읽어주는 나의서재 59회 we’re :DIGGLE family
그리고 조상이 노비라고 해도 조선 이전 고려나 신라 혹은 더 이전에는 귀족 가문이었을 수 있습니다. 또 노비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한 사람중에 귀족 양반도 꽤 있습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노비는 영원한 노비, 귀족은 영원한 귀족이란 건 없습니다. 우리들 모두 조상들은 다수의 양인과 소수의 노비와 극소수의 귀족의 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인구 800만에 30퍼 300만 가까이 노비여서 다수이고 노비는 성이 없었으므로 철저히 신분 구분이 되었기 때문에 피가 섞여 있다는 허황된 망언이고 일제시대 접어들어 노비제도 사라지면서 노비들이 성씨를 가졌고 족보를 사들이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에 머슴이 있었다는게 사실이고 따라서 우리나라 인구의 50퍼 이상은 조상이 노비일 확율이 높다는것이 팩트
@@양정옥-h6t 노비도 종류에 따라 외거노비, 솔거노비, 공노비, 사노비 다 따로따로라서 재산을 축적할 수는 있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수천수억 모으는 노비도 있었구요. 전쟁 때 힘들어하던 왕을 위해 자기 전재산 풀어서 모신 노비를 왕이 면천(노비신분에서 해방)시켜준 기록도 있고, 이 이후 면천을 위해 왕실에 기부넣어도 면천을 위한 사심으로는 면천 안시켜준다고 한 기록도 남아 있어요 양반도 귀족과는 다르게 대대손손 공시에 합격해 공무원 자격을 유지해야 지킬 수 있는 신분인데다 체면때문에 밭갈고 땀흘리는 노동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배 곯으면서도 마누라 삯바느질 돌려 글공부하는 가난한 선비얘기도 허구언날 나오는거구요. 가난한 양반이면 천민만도 못하게 살기 힘드니까 돈주고서라도 족보를 바꾸려고 한거구요. 천민입장에선 아무리 돈이 많아봐야 고작 천민이라고 무시당하고 손가락질당하고 인권침해당해도 아무 말 못하니 기를 쓰고 족보를 사려한거구요.
들으면서 백씨일거라고 생각했어요.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니까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진실을 꼭 이야기하진 않으니깐 알수없지만 시대상 백씨를 심문하지 않을수도 있지만 여자 다모가 있었다면 가서 이야기는 들어봤을거고 추론으로 나온 이야기처럼 속 이야기를하니 감추려고 그 이후 심문자체를 못하게 아닌가 추론합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들이 많네요. 교수님은 노비 제도가 로마나 유럽의 노예 제도와 다르고 더 인간적이였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또 자기 백성을 노예로 삼아 대를 이어 착취한 경우는 다른 국가나 문화에는 거의 없습니다. 로마의 경우도 채무 관계로 노예가 되고 돈을 벌어 노예에서 해방되는 식이였죠. 아니면 전쟁 과정에서 적의 백성을 노예로 삼는 식이였죠. 조선의 노비 제도는 같은 백성을 노예로 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혹한 제도였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흑인 노예도 주인 잘만나면 나름 인간적인 대우 받으면서 잘 살 수 있었죠. 그렇게 일부 케이스를 갖고 조선의 노비 제도는 다른 국가나 문화의 노예제도 보다 낫다고 하는 건 다른 나라나 문화의 노예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오는 편협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조선의 노예 제도가 잔혹한 이유는 노비의 후손들이 노비 신분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선 후기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되며 자연스럽게 노비들이 양반들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초기 중기는 그렇지 못했죠. 이는 무엇보다 조선의 현물화폐 중심의 원시적 경제 시스템 때문에 노비를 비롯한 사회 하층민들이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편을 든 것도 그 때문이죠. 전란 중 명나라 군대가 들고온 은전이 전후 조선에 유통되면서 조선의 경제가 살아나고 상실된 노동력 부족으로 조선의 신분 시스템에 변화의 조짐이 보였으나 명나라의 강력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조정은 은전 도입을 거부 다시 원시 경제 시스템으로 복귀를 선택 했습니다. 조선의 조정이 그렇게 한 진짜 이유는 은전의 도입이 생산과 유통을 활성화시켜 사회 생산,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하층민들의 경제적 부를 촉진하고 그것이 결국 유교적 신분제도의 붕괴로 이어질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은 끊임없는 하이퍼인플레이션과 기근, 그리고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죠. 양반들이 유교 신분제도로 인한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온 백성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선택을 하게 된거죠. 물론 조선 후기에 와서 일부 선각자들이 선진적인 금속 화폐 도입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나 원시적 현물화폐 시스템으로 인해 생산력 자체가 너무나 낮았고 화폐의 교환을 중심으로 한 유통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발적인 근대화가 쉽지 않았죠. 조선 후기 화폐 개혁 또한 왕가와 관리들의 비리로 인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결국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박살, 결국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게 먹히고 봉건 신분 제도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 학폭 아버지 검사가 수사의 목표는 범죄자 엮어 기소하는 것이라 했던 말과 일치하는군요. 자기가 사회정의의 지킴이라 믿고 진실보다는 범죄자 처벌에 눈이 멀게 된 사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센 자에게 달라붙어 법집행이 왜곡되는건 피의자가 성상납해 재판에 이기고 영부인까지 되는 지금도 같죠.
인간적 이었다? 아니었다? 가 뭐 그리 중요하지! 서양이든 조선이든 그 차이는 미묘하고 의미도 없고 중요치 않다! 본질은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는 거 생사여탈권을 주인이 가지고 있는데 노비 한 놈 죽인다고 주인이 처벌 받는 것도 아니고 서양이든 조선이든 노비는 파리 목숨 이었다 라는게 중요하지.
노예 제도 없었던 나라가 있나? 단순히 노예제도가 존재했다는 것만으로 부끄러운 역사라 치부한다면 남존여비도 그렇고 순장도 그렇고 옷도 없이 뛰어다니던 것도 그렇고 다부다처라 할 수 조차 없이 교미 수준이었을 인류의 조상도 그렇고 인류 역사 부끄럽지 않은 과거가 없을 것 같은디
노비의 비율 문제 누가 제기한 건지는 알고 떠드는 거임? 지금은 작고한 워싱턴대의 제임스 팔레 교수임. 이게 2006년인가 그랬음. 그런데 방송 내용 중에 업데이트 된 내용이 있지요? 최대 30%. 업데이트 안 된 옛날 내용을 들고 오는 이유는 간단함. 이영훈 따가리들이거든. 게다가 노비와 노예는 법적으로 성격이 동일하다고 하기 어려움. 역시 방송에서 간략하게 언급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노비는 재산권, 상속권, 재판청구권이 있고 노예는 위 세 가지 권리가 없음. 이런 법적 권리의 유무는 철학적, 이념적 차이와 연결되는 것임.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정치적 지위를 잃으면 다른 인간들로부터 '같은 종'으로 인정될 인간적 특성 자체를 상실한다고 이야기했는데, '노예'가 정치적 지위가 전혀 없는 동물로서의 인간이라면 노비는 정치적 지위가 '불완전한'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님. 즉, 현대철학적 관점으로 봐도 양자의 차이를 축소하기 어려움. 어디서 남이 떠드는 얘기 앵무새처럼 떠들지 말고 직접 공부해.....
와 ~ 대박 이분 의무적으로 중등학교 아이들 교육해주셨음 합니다. 국가의 존립은 이런분들이 지키는 겁니다. 와 ~~ 👍 👍 👍 👍 👍 👍 그동안 일제시대 잔물의 영향과 남존여비 사상이 마치 한국의 전통인양 생각하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 화가나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분 지켜주세요. 친일놈들은 분명 일도 못하게 방해할거 뻔해요.
예전에 이 강의를 들었더라면 재밌기만 했을텐데.. 일단, 조선은 같은 동족을 노예로 삼은 몇 안되는 민족인거 아시나요? 찬찬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 일반적으로 예전 미국의 노예도 흑인이고 다 전쟁에서 진 나라 사람들이 노예가 되지요. 그렇다고 그 나라는 노예를 물건처럼 취급해도 된다는건 아니지만 조선시대에 겁탈당할뻔한 노비가 구제받았다고 아~ 노비에게도 인권이!!하고 감탄할일은 아닌거죠. 그리고 세종대왕시대에 우리나에 노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노비와 양인 사이의 아기는 양인이었지만, (그래서 노비수가 세종전까진 계속 줄고있었죠) . 세종대왕은 이 제도를 대폭 고쳐 부모중 하나라도 노비면 아기는 무조건 노비가 되게했으니 그 이후에는 노비수가 엄청 늘었죠. 세종대왕께 백성은 철저히 양인까지이지 노비는 백성이 아니었어요.
어휴...채응규가 유유 집안의 여종의 남편이니 제대로 학문을 익히지 못했을테니 유유가 사라지기 전의 필묵의 서체가 집안에 있었을 것. 소위 필적 대조와 기초적 학문을 시험해 보면 간단함. 여종의 남편이 학식이 있지는 않을 터. 그리고 아내와 남편을 대질시키면 또한 간단한데..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