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xb4cj7ip3q 부부사이에 속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알려진 사실은 부인 정확히 전처가 김동주가 아마 때부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함. 그렇게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음. 프로에서 나름 잘 나가며 연봉도 많이 올라감. 이때 김동주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김. 김동주가 무조건 이혼을 주장함. 전처는 당연히 거부함. 김동주는 유책배우자라 이혼소송도 못함. 이혼만 해주면 무슨 조건이든 들어주겠다고 함. 이에 전처는 아이 양육권과 양육비를 요구함. 양육비가 정액이 아니라 항후 벌어들일 소득의 일정비율이었다고 함. 그리고 그 퍼센테이지가 상당히 높았는데 이혼할 욕심에 김동주가 받아들임. 합의이혼. 이혼 후 돈 줄 생각에 너무 억울해짐. 내가 한푼도 안벌면 한푼도 안줘도 된다는 생각을 함. 그래서 은퇴선언. 한푼도 못버니 한푼도 안주겠다는 선언. 이걸 무기로 이혼합의서 재협상 시도한 걸로 추측함. 이건 추정임. 어쨌든 재협상에 성공했는지 새여자가 한푼도 안벌어 오면 같이 살지 못한다 했는지는 모르지만 은퇴선언 번복. 복귀. 대충 이런 스토리. 머...부부가 살다보면 이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함. 그리고 이혼하는 부부가 사이가 좋아서 이혼하는 경우는 없다고 봄. 그러나 내새끼 양육비 떼어 먹으려고 저지랄 하는 건 아니라고 봄. 그래서 금수라는 거임.
김동주만큼 실력에 비해서 명성이 최악인 선수는 없을듯. 지금와서 학폭에 승부조작에 약물에 논란이 있던 선수들은 많지만 실력면에선 김동주만큼의 압도적인 실력을 선수생활내내 뽐낸 선수는 없음. 크보 레전드에 어울리는 실력이지만 더러운사생활에 의해 대우받지못한건 앞으로의 프로활동을 하고있는 할려는 선수들에겐 본보기라고 생각함
일본으로 넘어가기 위해 팀, 팬들에게 어마무시한 상처를 줬죠. 개인사에 따른 위자료 지급 문제를 두산 그룹차원에서 법무팀을 동원해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두산입장에선 감동주에게 통수를 맞은거니 두산 프런트를 욕할 수 없을 듯 합니다. 통산성적이 3, 4, 5 인 우타자 3루수에, 잠실을 홈으로 쓰면서도 20홈런은 넘길 만한 펀치력까지.. 욕심을 조금만 줄였으면 팬들은 무슨일이 있었어도 그를 지지했을텐데 참 아쉬운 선수입니다.
잠실을 홈으로 사용하고 3-4-5 OPS0.919에 볼넷이 삼진보다 많은 타자.. 우르크 150의 타자.. 다른 것은 모르겠고 정말 위대한 선수였고 베어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사직이나 대구를 홈으로 사용했다면 어떤 성적이 나왔을까요. 잘은 몰라도 OPS 0.98은 찍어주지 않았을런지
두산(OB)는 김동주 입단전과 입단후로 나뉜다는 얘기가 있죠...95년 우승을 하긴 했지만 항상 중하위권에 머물던 팀은 김동주 입단후 늘 가을야구를 하게 되는 팀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후에 LG지와의 상대전적에서 앞서게 되죠...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김동주이지만 은퇴식을 못하고 은퇴해 참 아쉽네요...
@@user-kh8cb7oe7p 2000년대 중반부터라니...야구를 언제부터 본거유? 김동주 입단후 98년부터 준플(98),플옵(99),준우승(00),우승(01) 했는디? 02~03 잠시 쉬고 04(준플) 05(준우승) 등...이후로 거의 가을야구 하는걸 알꺼고... 김동주 입단후 4년연속 가을야구 했고 우승도 했는데 님이야 말로 개소리??? 중하위권이라고 해놨구만 무슨 롯데랑 항상 꼴찌를 다퉈...두산 팀 역대 순위나 좀 보고 오시지? 설마 80년대를 얘기하는???
95년 OB 우승은 말도 안되는 규정 덕분이었죠. 한국시리즈 7차전 중에서 5번을 잠실(두산 홈), 2번을 사직(롯데홈)에서 치렀습니다. 한국시리즈 567차전은 무조건 잠실에서 치른다는 규정 때문이었는데요, OB에게 너무나 유리한 편파 규정이었습니다. 그러다 01년 한국시리즈 때 더 심한 사건 터졌죠. 대구에서 1, 2차전 치르고 34567차전을 모두 잠실에서 치른거에요. 두산팬이 삼성팬에게 미안해할 정도였죠. 서울 구단에게 우승컵 갖다바치라는 격이죠. 지금은 최대한 공평하게 많이 개선됐습니다.
솔직히 별로 안중요해요 야구만 잘하면 되고 욕 먹어도 그때뿐이긴함 근데 김동주는 이건 너무 심한수준이고 선을 넘은게 문제임 그리고 진짜 개쓰레기같은 인성이었고 문제가 계속 나왔음에도 아무문제없이 선수생활 고액연봉받으면서 잘이어갔죠. 은퇴식만 안해줬을뿐 이것도 여론도 안좋기도하고 두산프론트가 앙금이 너무 있어서 안해준거뿐임
이승엽, 김동주 콤비는 국가대표 중심타자만 10년을 한 선수죠. (1999~2008) 한 나라 야구를 10년을 책임진 선수들이었습니다. 베이징 이전까지 국가대표 3번 이승엽, 4번 김동주.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 대표에선 4번 이승엽, 5번 김동주 (이건 여담인데, 고려대 시절 김동주는 일본 우에하라의 천적으로 불리기도 했죠.) 사람들은 잘 모르는 부분. 06WBC 때에도 원래 3번 이승엽, 4번 김동주였죠. 김동주가 대회 도중에 부상을 당해서 이탈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김동주는 야구 국대 드림팀 1기인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맴버 때부터 국대 중심타자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올림픽에서 첫 메달을 따고, 처음 일본을 이긴 시드니 올림픽 그 3,4위전에서 이승엽이 2타점 결승 2루타를 쳤고 곧바로 김동주가 적시타를 쳐서 우리가 최초로 동메달을 딸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프로야구 노 감독들한테 KBO 베스트 꼽아보라고 하면 3루수 + 중심타자에 최정, 한대화, 김한수 같은 선수가 있었음에도 김동주를 꼽는 감독들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만 김동주는 사생활 문제가 컸죠. 사실 기량과 기여도로는 영구결번되어야 할 선수인데.
배명고 시절에는 1번타자, 유격수, 투수로 활약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한 해 선배인 이경필과 함께 봉황기, 황금사자기, 전국체전을 쓸어담으며 배명고를 3관왕에 올렸죠. 94학번 나이대(1975년 3월 ~ 1976년 2월 생)에는 프로에 와서 눈에 띄는 강타자들이 나왔던 세대입니다. 그 당시에 좌재현(신일 김재현), 우동주(배명 김동주)라고 했거든요. 김동주, 김재현 외에도 심정수, 이호준 등이 있었죠. 죄다 소속팀에선 3,4번 치던 선수들이었죠.
이때 타자들을 보자면 일단 용병은 제껴두고도 이승엽, 심정수, 양준혁, 마해영, 이종범, 박재홍, 이병규 진짜 후덜덜하다. 김동주가 아주 뛰어난 타자이고 큰경기에도 강해서 엄청난 타자이지만 각 타이틀 마다 조금 앞선 경쟁자들 때문에 항상 그늘에 가려진 초고수의 느낌. 마지막이 너무 아쉽다
올타임 레전드에 국대 3루수하면 김동주.. 다만 구설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마지막 KT와의 협상에서도 이유는 모르지만 언론에 알려지기론( 연봉이 낮아서?) 등등의 이유로 입단하지 않고 은퇴하는등.. 선수생활내내 구단들과 좋지않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아직까지 김동주가 타석에 들어섰을때만큼의 무서움과 아우라를 주는 타자가 요즘은 많지 않은거같네요. 최근에 유소년 코치 하는거 같던데 다시 성공해서 언젠가 두산 코치로 돌아오시길
@@user-gq6rk2jd5o 두산팬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함 김동주는 두산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고 당시 두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였음 게다가 이대호 이승엽이 있었는데도 국가 대표 4번타자를 했던 선수임 그런 선수가 은퇴식과 영구결번이 안된건 팬 입장에선 안타까울만 한데 그리고 40인에는 김동주보다 더한 임창용도 있음
영상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오류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1992년 봉황기 MVP는 배명고 4번타자 노상진 선수였습니다. 공주고는 당시 봉황기에서 부산고를 만나 1회전 탈락했고 노장진은 청룡기 우승 이후 등판을 자제하고 있어서 당시에는 훗날 쌍방울에 2억 받고 입단 후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은퇴한 이대성이 공주고 선발로 등판했습니다. 노상진이 이후 경희대 진학 후 한화에 입단은 했는데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서 아마도 노상진을 노장진으로 오해하신 듯 싶습니다. 당시 배명고는 김동주가 1번이었고 권주현, 조현(LG 입단했던 신일고 조현 아니고 좌타자였습니다), 황재현, 투수였던 이경필까지 대포급 타선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