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원-h1n내 생각에 고구려 출신보단 이민족이 더많아서 이게 융합력이 고구려보다 약했던 것 같음.. 중앙의 힘이 지방에까지 못간거지 다른 유목국가들처럼 그렇게 변해버린것 같음.. 발해가 고려 만큼만이라도 통솔력 없더라도 체계 잘 정비해서 체제만 어캐 유지되었어도 그렇게 쉽게망해서 와해되진 않았을듯
맨날 저 영토크기가지고 저러는데, 고대국가에서 정작 중요한건 인구임.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지 못하고, 결국 밀린것도 결국은 고구려 땅 자체가 인구부양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지역이었지...,유목민도 아니고 농경민족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임. 발해 영토가 고구려보다 크다해서 고구려나 통일신라보다 강햇다? 절대 아님
@@Silla_Gates5 발해는 만주 지방에서 대조영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건국되었으며,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뚜렷하였다. 발해는 일본에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자신들을 ‘고려(高麗)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扶餘)의 풍속을 가진’ 나라라고 소개하였다. 또 발해의 왕을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도 확인된다. 여기서 말하는 ‘고려’는 곧 ‘고구려’를 뜻하므로, 발해가 스스로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발해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일본은 발해에 국서(國書)를 보내며 고구려에 관한 책인 『고려구기(高麗舊記)』를 근거로 일본을 대할 때 고구려의 선례(先例)를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아예 고구려와 발해를 직접적으로 연장선상에서 언급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당시 일본이 발해왕에게 보낸 국서 서두에 “고려국왕에게 문안을 드린다.”는 표현을 썼으며, 발해의 사신 고남신(高南申)을 발해사(渤海使)라고 불렀다가 또 고려사(高麗使)라고도 하였던 사실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Silla_Gates5 오늘날 중국의 헤이룽장성의 닝안은 발해의 수도 상경성이 있던 곳이에요. 이곳에서 발해의 온돌 터가 발견되어서 발해가 고구려의 생활 문화를 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온돌이란 아궁이에 불을 때서 그 열기로 방바닥인 구들을 데우는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 방식이에요. 김치의 영문 표기 방식인 ‘kimchi’와 함께 세계 유명 사전에 ‘ondol’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올라가 있을 정도로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자랑하지요. 온돌은 일찍부터 우리 민족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매서운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개발한 것이에요. 온돌은 점차 남쪽 지역으로 퍼져 나가 고려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돼요. 고구려와 발해의 여러 건물 유적에서 발견되는 온돌 장치는 방 전체가 아닌 일부에만 ‘ㄱ’자나 ‘ㄷ’자, ‘一’자 모양으로 온돌을 놓은 것들이에요. 이 방식이 개선되어 조선 시대에는 방 전체에 온돌을 깔았지요. 이러한 온돌 문화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속으로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답니다. 솔개의 꼬리 모양을 딴 치미는 지붕 꼭대기에 올려놓은 장식물로, 망새라고도 해요. 발해 상경성터에서 발견된 치미는 높이가 87센티미터이고 표면에 연한 초록빛이 나는 유약이 칠해져 있어요. 고구려 치미가 발해 치미보다 두 배 남짓 크고 형태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와 선의 흐름 등을 볼 때, 발해 치미는 고구려 치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어요.
전쟁은 과학기술 무기 기술로 하는거니깐요 ㅋ 영토가 이래된건 우리조상들이 과학에 무지하고 천대해서 그런거예욤 ㅋ 고구려때는 말타는기술과 말안장 그외 철무기 기술이 뛰어나면 되는 시대였지만 일본 식민지 시대때는 윤봉길 도시락 폭탄 만들때 미국은 핵폭탄을 만들었거든요 차이가 크져?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활이고 일본은 조총이니 게임이 되겠어요? ㅋ
@@CHG104 고려가 이성계의 반역 좋게 말하면 위화도(우리가 알고 있는 위치는 아님) 회군으로 고려 땅에 명과 조선이 일어난 후 명은 화하족화 되고 조선은 금 청에 의해 위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후 부터는 겨우 명맥만 유지. 그러다 국제정세 때문에 일본에 망했고 지금은 분단되어 있죠 최악을 지나 우리민족이 일어서고 있는데 통일되고 옛 고려의 영토였던 하북성 산동성 안후이성(양쯔강 하류 옛 절강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쉽지 않겠죠
방송에서 앞장서서 지도의 함정을 얘기하면 우째... 그냥 면적만 넓은건지 아니면 넓은만큼 경제성이 있는 땅인지 설명을 해야지 그냥 고구려보다 넓었다~ 그래서 위대하다? 왜 그럼 경제성 떨어지는 동쪽으로만 가지말고 중국 본토쪽인 서쪽으로 안갔을까? 동쪽으로만 뻗어나간건 그만큼 경제성이 없어서 더 수월했던거지
@@Silla_Gates5 발해는 인안(仁安),대흥(大興)을 비롯한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 선왕에 대한 시호를 스스로 올리고 문왕은 스스로 대왕,성인,황상(皇上)이라 칭했다. 당나라가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빈공과에서 발해인도 응시해 급제할 수 있었다.일본에게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천손이라 하고 주변의 말갈을 번국(藩國)으로 여겼다.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관심을 가진다. 이 말은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가장 부합한 중국의 여러 왕조와 이를 이용하여 역사를 자국의 입맛에 맞춰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행태를 보면 역시 중국은 어찌할 수 없는 나라로구나 하는 생각만 드는군요! 기록은 주관적인 것이지 펙트는 아닙니다. 진정 자신 있으면 유물을 공개하고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지 통제하며 감추는 것은 그들의 과거 행태와 같은 역사 날조와 다를바 없지요. 일본도 이와 다를 바 없지요. 천왕가의 고분 발굴을 금하는 행태가 그것이지요 또한 유물을 날조하여 세계적 망신을 사는 나라이죠.
8~9세기는 소빙기 시대라서 지금보다 만주, 연해주 지역은 훨씬 더 추웠는데 똥땅 많이 가지고 있는다고 뭐가 대단할까? 당시 오죽했으면 신라가 대동강 이북을 넘어가려고도 않았어. 평양일대는 거대한 황무지였고.. 심지어 청말까지 만주지역 인구가 100만을 넘겨 본지가 거의 없었는데 고구려니 발해니 단순히 면적만 보고 국뽕 치솟는사람들 보면 너무 한심해 보임.. 지금 몽골, 카자흐나 북아프리카 알제리, 리비아 땅 보면서 딸치는거랑 뭐가 다름
[대진국 발해는 한국사다] 발해는 인안(仁安),대흥(大興)을 비롯한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 선왕에 대한 시호를 스스로 올리고 문왕은 스스로 대왕,성인,황상(皇上)이라 칭했다. 당나라가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빈공과에서 발해인도 응시해 급제할 수 있었다.일본에게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천손이라 하고 주변의 말갈을 번국(藩國)으로 여겼다.
말갈족 중 일부는 예맥계임 ㅋ 발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발해와 말갈의 관계를 먼저 풀어야 된다. 그 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발해의 종족 구성을 설명할 때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들이었고, 피지배계층은 말갈족이었다고 했다. 즉 종족 구성을 이원화 구조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당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구당서』와 『신당서』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출자를 각기 달리 말하고 있다. 『구당서』는 대조영을 고려의 별종, 즉 고구려 별종이라고 했고, 『신당서』는 대조영을 속말 말갈인이라고 했다. 동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의 내용이 이처럼 다를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둘 다 맞는 말일 것이다. 고구려계 말갈인이 그것이다. 당시 부여 지역이었던 속말수 지역의 말갈족인 속말 말갈은 다른 지역의 말갈과는 다르게 일찍이 고구려에 편입되어 고구려인이 되어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지역에는 광범위하게 말갈족들이 분포하고 있었고, 그러한 말갈족들은 크게 예맥계와 숙신계로 나뉘어져 있었다. 예맥계는 앞서 언급한 속말말갈과 백산만갈 등이 있었고, 숙신계는 대표적으로 흑수말갈이 있었다. 고조선이 붕괴되기 전 종족 구성은 크게 동호계, 숙신계, 예맥계로 분류할 수 있었고, 고조선이 붕괴되면서 여러 나라들, 즉 열국들이 등장하면서 크게 부여계와 진계로 다시 재편되게 된다. 부여계는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이 있었고, 진계에는 옥저, 동예, 삼한, 말갈 등이 포함된다.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대진국이라고 한 것은 진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로부터 진국은 동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대조영 출자에서 언급했던 속말말갈은 부여계로 고구려와 그 계통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의 별종이자 속말 말갈인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제 말갈이라고 해서 이민족 오랑캐로 취급하면 곤란해진다. 특히 한국사로 알고 있던 발해사가 이상해지는 것이다. 발해사를 온전하게 한국사로 편입하려면 그전에 말갈부터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Silla_Gates5 개성(開城)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고구려 영토였던 시절의 지명 동비홀(冬比忽)의 의미를 번역해 중국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고대 한국어 tɔLVpi- [도ㄹ비]는 중세 한국어 듧-에 대응되며, 현대 한국어의 뚫다로 이어집니다.뚫는다는 것은 곧 연다는 의미이으로,개성이 한화(韓化)된 것입니다. 고구려 지명에서 買(살 매)는 '물','하천'을 의미합니다.買는 고대 한국어에서 mɛr [맬]로 읽힙니다.mɛr은 서기 500년 전후로 mɔr [몰]로 변화한 뒤, 중세 한국어 [믈]을 거쳐 현대 한국어의 물로 이어집니다. 백제의 영토였던 우술군(雨述郡)은 경덕왕 때 비풍군(比豊郡)으로 개명되었는데 비풍과 우술이라는 표기는 서로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에 흥미로운데 비풍의 比(비)는 우술의 비 우(雨)와 대응되고 우술의 述은 비풍의 豊(풍)에 대응합니다. 비는 현대어에도 그대로 쓰이지만 술의 경우 봉우리를 의미하며 봉우리라는 단어 자체가 峰과 수리의 합성어입니다.
@@Silla_Gates5 [대진국 발해는 한국사다] 발해는 만주 지방에서 대조영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건국되었으며,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뚜렷하였다. 발해는 일본에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자신들을 ‘고려(高麗)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扶餘)의 풍속을 가진’ 나라라고 소개하였다. 또 발해의 왕을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도 확인된다. 여기서 말하는 ‘고려’는 곧 ‘고구려’를 뜻하므로, 발해가 스스로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발해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일본은 발해에 국서(國書)를 보내며 고구려에 관한 책인 『고려구기(高麗舊記)』를 근거로 일본을 대할 때 고구려의 선례(先例)를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아예 고구려와 발해를 직접적으로 연장선상에서 언급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당시 일본이 발해왕에게 보낸 국서 서두에 “고려국왕에게 문안을 드린다.”는 표현을 썼으며, 발해의 사신 고남신(高南申)을 발해사(渤海使)라고 불렀다가 또 고려사(高麗使)라고도 하였던 사실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솔개의 꼬리 모양을 딴 치미는 지붕 꼭대기에 올려놓은 장식물로, 망새라고도 해요. 발해 상경성터에서 발견된 치미는 높이가 87센티미터이고 표면에 연한 초록빛이 나는 유약이 칠해져 있어요. 고구려 치미가 발해 치미보다 두 배 남짓 크고 형태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와 선의 흐름 등을 볼 때, 발해 치미는 고구려 치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어요. 왼쪽은 발해 기와(수막새)이고, 오른쪽은 고구려 기와(수막새)인데, 이 두 기와는 원 주위에 꽃잎이 둘러싼 형태가 닮아 있어요. 이처럼 발해의 기와는 무늬가 뚜렷하고 힘 있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어요. 오늘날 중국의 헤이룽장성의 닝안은 발해의 수도 상경성이 있던 곳이에요. 이곳에서 발해의 온돌 터가 발견되어서 발해가 고구려의 생활 문화를 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온돌이란 아궁이에 불을 때서 그 열기로 방바닥인 구들을 데우는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 방식이에요. 김치의 영문 표기 방식인 ‘kimchi’와 함께 세계 유명 사전에 ‘ondol’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올라가 있을 정도로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자랑하지요. 온돌은 일찍부터 우리 민족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매서운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개발한 것이에요. 온돌은 점차 남쪽 지역으로 퍼져 나가 고려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돼요. 고구려와 발해의 여러 건물 유적에서 발견되는 온돌 장치는 방 전체가 아닌 일부에만 ‘ㄱ’자나 ‘ㄷ’자, ‘一’자 모양으로 온돌을 놓은 것들이에요. 이 방식이 개선되어 조선 시대에는 방 전체에 온돌을 깔았지요. 이러한 온돌 문화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속으로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