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에 참전 하신 참전 용사 분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님들이 아니없으면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은 월남 파병으로 세계로 도약하는 최 첨단무기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경제개발 성공으로 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잘 먹고 잘 사는 이유가 베트남 참전 용사이신 님들의 덕분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와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는 밤새도록 담배를 태웠으리라 새벽이 왔는지도 모르게 손가락을 태웠으리라~육 여사도 피를 말렸을 것이다~어린 그네가 눈을 말똥 말똥 굴리고 있었다~새벽이 가기 전에 결단를 내려야 한다~6. 25 전쟁을 내 어찌 잊으랴~그들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그는 태우던 담배를 짓눌러 버렸다~살타는 냄새가 난다~그래 내 손가락 몇 개쯤은 불타 없어져도 괜찮아~하지만 내 새끼들을 어떻게 전쟁통으로 보낸단 말인가~살아 돌아 오지 못할 그 밀림으로~아~
그랬다면 당시에 양김씨가 정권 잡았다면, 경제가 아직 중화학산업의 본궤도에 오르기 전인데다, 이미 다 보았듯이 북한에 돈보내고, IMF 상황 만들어낸 것 처럼 지금처럼 잘사는 대한민국은 불가능 했었을 것이다. 월남전 승리의 비결은 625때 유격전 경험이 많은 채명신 장군의 사령관 발탁이고, 또 채장군의 중대 전술기지 전략과 유기적인 대민친화 전략 이었다. 월남 주민들로 부터 지지와 지원을 받아 적정보를 얻고 안전한 삶과 생활안정을 제공하니, 지금도 한국군 주둔지역 주민들은 한국군 칭찬들을 합니다
나는 1966년 봄에 근무하던 부대에서 사이공 비전투부대인 비들기부대 보충병모집을 해서 안전하다고 생각해 지원해서 강원도 오옴리에서 어깨에 비들기 마크를 달고 3개월동안 훈련을 받았다. 훈련기간 동안 가족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훈련을 마치고 김포공항에서 가족이나 어떤 환송없이 미군용기로 파월 되었는데 그 때 비들기부대가 아닌 맹호와 청용전투부대 보충병으로 파월 되었다. 나는 맹호부대 1차보충병으로 속아서 파월 되었다. 오옴리 1차 파월훈련병들은 모두 그렇게 속아서 전투병으로 파월되었다. 1966년 9월5일 맹호 6호작전에서 나는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보훈처에는 그 기록도 없다. 오늘 한국을 보면서 국민으로서 일익을 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착취한 전투수당 90%를 지불해 줄 것을 희망한다.
100% 자원 참전 했는지 궁금? 의문 스럽습니다.저 당시 나라분위기나 특히 군대 분위기상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돈있고 빽 있는 집안의 아들은 군대 안 보낼려고 기를 쓰던 시절이지 싶은데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그것도 타국 전쟁터에 자원참전 했는지 여부가 궁금 합니다 혹시 이글 보시는분중에 파병당시 사정을 아시는분 계시면 알려 주십시오
당시 나는 죽을힘을 다써서 지원했는데^^중반쯤이라 지원자가 많아서 인사계에 담배값을 투자할려고 했는데^^다행히 병과가 LMG여서 바로 차출되서 갔다왔어요 ^^이병과는 지원자없어요^^저승가는 확률이 높아서요^^생과사는 하늘에 맡기면 지원하는데 두렵지 않아요^^모험주의자가 큰 발견을 합니다^^❤ ❤ ❤
52년 한국전 휴전. 그10년후 63년 이동외과 병원을 필두로 73년3월 까지 베트남전 한국 참전. 남의 나라 전쟁에 고생 많으셨읍니다. 32만명 참전에 5천1백명 전사. 10만명 부상 (고옆제포함). 눈물이 납니다, 제 동생도 백마 28연대로 동보산 전투에서 전사. 인생 끝자락 이 노인, 동생23살 얼굴 너무도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