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영상은 시리즈 중 10번째 영상으로 이전 영상들을 먼저 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본 영상부터 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 1. 칼 시리즈 보기: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hfEzUsx3gbc.html 2. 창 시리즈 보기: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KELXTgQmVqI.html 3. 활/석궁 시리즈 보기: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UipVIHOjxr0.html
형태로만 봤을 떄 제작상의 난이도로 보면 편날의 도 보다는 양날의 검이 더 만들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직선의 형태를 유지하며 중앙을 기점으로 양날을 동일한 각도로 가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시에는 검보다는 더 쉽고 빠르게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도가 더 많이 보급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편날 직도보다 양날의 검이 먼저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유는 형태에 의한 제작상의 난이도 보다는 재료적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인류가 가공할 수 있었던 금속은 녹는 온도의 한계 떄문에 청동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청동은 나중에 사용하게 된 철에 비해 인성이 낮았기 때문에 부러지기 쉬웠고, 그렇기 때문에 휘둘러서 베는 도로 만들면 전단 응력에 취약해 쉽게 부러지므로 의도한 사용 방법대로 사용하기가 사실상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청동제 무기들은 찌르는것을 주로 하는 검의 형태로 만들었고, 인류 초기의 전쟁용 무기로서의 도검은 모두 사람을 '찔러 죽이는' 용도였습니다. 도검을 찌르는 형태로 사용하면 전단응력이 아닌 압축력을 받기 때문에 찌른 상태에서 비트는 힘에는 취약하지만 단순하게 찌르고 뽑아내는 동작은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습니다. 기마 민족이 곡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영상에 나온대로 말 위에서 사용하는 칼인 부분도 있습니다만, 그 이유를 좀더 파고들어 보면 두손으로 잡지 않고 '한 손으로 잡고 휘둘러 베는 칼'이기 때문입니다. 즉, 한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말의 달리는 속도에 더해 한손으로 후려쳐 베는 용도의 무기이며, 일정한 만곡율을 가진 칼은 그 곡율로 인해서 세밀한 조작 없이도 사람의 살을 베어내기가 더 수월합니다. 전장에서 창 같은 주무기보다 우선도가 떨어지는 부무장에 가까웠기 때문에 만곡도의 날 길이는 일정 이상 길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문화권에 따라 양손 사용임에도 벨수도 있고 찌를수도 있는 두가지 동작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중간적 형태를 선호하는 지역도 있고(ex 일본도), 한손으로만 잡고 쓰더라도 찌르기를 우선시 한 지역도 있습니다(ex 레이피어). 이 경우는 지상에서 빠른 전진과 후진을 바탕으로 1대1의 대결을 주로 하던 지역적 특색이 영향을 끼친 경우가 될 것 같습니다. 이 경우에는 평상시 칼 한자루만을 휴대 하며 몸을 지키는데에 사용하거나 1대1 대결에 사용했던 경우로, 당시 그 사회의 문화적 특성도 많이 관여됩니다.
@@sr4840 말씀하신대로 인간이 한손으로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도검의 무게는 대략 1kg 내외~ 1.5kg 선이라고 보면 됩니다만, 도신의 형태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무게 밸런스의 특성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므로 단순히 무게의 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손 곡도임에도 불구하고 날길이가 길어진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기병도인 세이버의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역사적으로 총기가 개발된 시점에서 총포로 무장한 다수의 보병과 권총과 세이버로 무장한 소수의 기병으로 편제가 되는 경우로, 물론 이 때에도 도검이 전장에서의 주무기로서 활약하는 경우는 아니었고, 손잡이쪽의 도신의 두께는 7~8미리 정도로 유지하지만, 칼 끝으로 갈수록 급속하게 두께를 얇게 만듦으로서 얇게는 2미리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뽑아냄으로서 무게 중심이 손잡이쪽에 쏠린 형태로 한손 도검으로서도 날길이가 85센티에 육박하는 긴 도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 이미 총포에 의해 과거 냉병기 시대의 '갑옷'이라는 개념이 무력화 된 상태에서, 적도 아군도 단순한 천으로 된 제복 군복을 입고 싸우던 시대에, 길이를 위해 두께나 폭을 희생한 얇고 날카로운 도검에 의해서도 충분히 무력화 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운용 가능한 도검이기도 했습니다.
저 북방유목민들이 쓰던 곡도도 고려와 조선도 사용을 했을 가능성이 높을것 같습니다. 특히 고려시대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때 거란과 여진족으로 부터 창, 칼과 갑옷, 말, 낙타등을 노획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여진과의 전쟁 이전에는 여진족들이 고려에 조공품으로 칼을 바쳤다고 나오고 또 고려와 몽골과의 전쟁과 전쟁후 몽골 원나라의 부마국 간섭기때 몽골의 영향을 받아 고려군들도 저 북방유목민들이 사용하던 곡도를 방패와 같이 사용을 했을 가능성이 높을것 같고 고려말 동북면지방의 여진족 출신 장군이었던 이성계도 고려에 귀화를 하기전에 조부때 부터 몽골 원나라의 지방관 관료출신이자 여진족들과 인연이 깊었기때문에 아마도 조선군도 고려의 영향을 받아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 까지는 일부 지방의 군대에서는 저 북방유목민들이 쓰던 곡도를 사용했을가능성이 높을것 같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여진족들과 가까이 붙어있는 국경지대인 평안북도나 함경북도에 주둔하는 지방의 군대나 일부 치안을 담당하는 관군들도 긴창과 일직선의 직도와 더불어 여진족들과 몽골 유목민 들이 사용을 했던 곡도를 일부 같이 사용을 했을 가능성이 높을것 같습니다.
직도가 중무장한테 더유리하니 곡도를 쓴 이유는 경무장이기 때문이란 글들이 다수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 칼은 아무리 잘쳐줘도 개인화기... 권총급입니다. 소총급 무기가 창류 무기죠 그리고 유목민의 주무기는 활입니다. 몽고가 1인당 말 6마리를 데리고 다니는데, 다른 유목민도 안그랬을까요? 보급용 말에 각종 무기가 실리고, 필요에 따라 다른 무기를 쓸수 있게 준비하겠죠 유목민은 편제는 기마부대가 압도적으로 많은 단일 편제라곤 하나, 무기는 상황에 따라 다른 무기를 쓰는 멀티 편제였습니다. 그리고 툭까놓고... 누가 전쟁을 칼만 들고 합니까
애초에 경무장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경우가 많다보니...곡도를 선호하게 된거죠. 초원은 까놓고 말해 더워요...도저히 갑옷을 입힌 병력을 유지할만한 여건을 지닌곳이 아니였습니다. 낮에는 미치도록 덥고 밤에는 돌아버리게 춥고..자연스럽게 갑옷 아니라 환경에 버틸수 있는 의복위주의 방어구를 입게 된거죠... 이런 경방어구를 상대하기에는 곡도가 훨씬 더 유리했으니.뭐.... ㅋ
얌나야문화 쿠르간문화 등등 고대 유라시아 초원 전사들 유물 보면 기원전 20세기 이전부터 전사들은 골제 목제 찰갑을 갖추고 있었읍니다. 목 뒤에 널판지처럼 생긴 방호구를 매달기도 했고(영화 알렉산더 이소스 전투때 페르시아 중기병들 어깨 뒤에 매단 장비) 가죽재질이긴 하지만 사람과 말이 다 갑옷으로 무장한 최초의 중기병이 탄생한 곳도 기원전 6세기 경 우크라이나 초원지대 이고 스키타이 인들은 본격적으로 금속 재질로 스케일아머나 찰갑을 널리 착용했습니다.
@@미제드론 유목민의 적들은 결국 같은 유목민인데..그들의 생활 반경 자체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넓었죠. (..장에 나가려고 말타고 몇날이나 달린다는 기록이 제법 많죠..) 그리고 그 반경은 전투 환경 자체도 매우 넓었다는 거구요..그래서 기동성을 더 살리기 위해서 경장비나 혹은 급소만 가린 형태를 선호했죠. 근대 그건 주로 소규모 씨족간의 싸움이나 약탈, 같은 상황인거고.. .. 전쟁상황에선 당연히 이야기가 많이 달랐죠. 갑옷을 제대로 차려입은 놈들이 날뛴거구요.
스키타이 기술력은 아마도 열악한 환경속에서 발현된게 아닌가 합니다. 얌나야 안드로노브 쿠르간유목민 등등 아리안족으로 생각되는 유라시아 초원지대 기원전 3000~2000년 경 유물 유적 보면 그때 이미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아는 캠핑용품 장비들와 유사한게 참 많습니다. 말 타는데 용이하기 위해 고안된 바지도 그렇고요.
개인적으로 일제의 검과 유럽의 롱소드보다도 좋아하느 양식입니다 한손검으로서 역시 손잡이도 작은데 초승달처럼 휘어진 것이 베기 위력조차 단숨에 비무장된 사람의 목을 떨어트릴정도입니다. 지금의 사우디 아랍의 사형 집행에서도 저 검을 한팔로 쥐고 내리치는데 단번에 목이 구를정도였죠
유목민족의 칼 하니까 생각나는데 패용법, 즉 칼을 허리에 차는 것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패용법은 칼손잡이가 앞으로, 칼집이 뒤로 향하게 되어있어 언제든지 칼을 바로 뽑을수 있게 한 것이었는데, 유목민족들은 말 위에서 생활하다보니 그렇게 패용하면 말 위에서 몸을 기울일 때 칼이 앞으로 빠져버리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방유목민족들은 칼을 허리에 찰 때 칼집이 앞으로, 칼손잡이가 뒤로가게 패용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알기로 저런 훤칼을 만들라면 상당한 열처리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압니다 직도는 상대적으로 만들기 쉽지만 일본도도 그렇지만 진흙으로 열전달을 다르게 하고 급냉같은 열처리를 잘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칼을 망칠수도 있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데 저런 곡선이 큰 칼을 제작할수 있다는건 상당한 제련기술이 있다는거죠 뭐 솔직히 막말로 직도는 거푸집 방식으로 대량 생산도 가능하기도 하지만 곡도는 아니니까요
유목민의 칼에 대한 상당히 흥미로운 가설이네요. 고퀄리티영상 감사합니다. 유목민들은 우리들 생각과 다르게 상당히 화려하죠. 정주문명이야 집에 중요한 물건을 놔두지만, 유목민은 돌아다니기 때문에 값비싼것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그래서 목걸이, 팔찌, 귀걸이, 반지 같은 귀중품을 항상 지니고 다니며, 옷도 비단으로 된 화려한 색상을 입지요. 중요한건 전부 몸에 걸친다고 보면 됩니다. 작든 크든 칼은 유목민에게 매우 중요한 필수품이었고, 남자가 여자에게 칼을 주고 청혼하는 풍습이 있었지요. 에미시는 이런 문화가 아직도 남아있고, 조선시대 은장도 역시도 비슷하게 남아있는거죠. 우리들도 선조들이 유목민이었다는 증거가 남자들의 귀걸이에서 알 수 있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이 왜군수급이라고 가져왔는데, 귀걸이 자국(피어싱)이 있어서 조선인을 잡아서 머리를 깎아서 구라친걸 알아냈죠.
약탈이 빈번하고 고기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문화권은 칼이 필수가 될 수 밖에 없군요. 칼의 나라 일본조차 식기구는 칼이 아닌 젓가락이죠. 이들은 어차피 농경문화 해양문화 권역이라서 당연하겠지만요. 그런데 이번 양상도 그렇고 영상 제작에 참조한 영화나 드라마들을 남겨주실 수 있나요? 유목민의 생활을 조금 더 엿볼 수 있는 재밌어보이는 것들이 보이네요. 아사노 타다노부가 출연한 건 몽골이라는 심플한 제목의 영화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수 년 전에 잠깐 본 것 같긴 한데 나머지는 무슨 영화인지 모르겠네요~
환도가 처음 탄생한게 열처리 기술이 높아지면서 생긴거 아닌가요? 똑같은 직도라도 열처리를 통짜로한 칼이 초기열처리 방식이고, 직도를 칼날과 칼등부분을 열처리를 다르게 하면 열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휘면서 약간의 곡선이 생기면서 환도가 되고 이걸을 나중에는 설계단계에서 약긴휘게 설계해서 만든게 우리가 잘아는 일본도, 아라비아검 일겁니다.
구르카 ㆍ단검, 파괴력이 약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앞으로 휨, 역발상적 무기라 똑똑한 민족이 사용 우리나라는 이를 무기화하지 못하고 농기구화함.. 이름하여 호미 직도 ㆍ장,단검 파괴력 노멀 체킹, 집립보행 무장들 사용 환도ㆍ장검+말, 파괴력이 강함, 힘을 흘려야 함 그래서 사족보행 무장들이 사용 이정도로 정리되는거 같네요
확실히 마상무예의 특성상 가속도는 늘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기에 찌르기는 늘 큰 문제라 유럽의 마상렌스도 창을 들고 돌파가 아니라 찌르고 바로 놓습니다. 안 그러면 손목아지가 날아가는...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마상도가 환두대도 입니다. 예쁜 고리에 끈을 묶어서 팔에 걸어서 사용하는 것이죠
09:33 근데 오랑님 말이 오히려 정답인게 유목민은 남의 동네를 자주 약탈해야 하는데... 무기가 나쁘면 역으로 털릴수도 있어서 야금술과 철 주조술이 뛰어난게 오히려 정상입니다. 자기네 기술이 당장에 딸리더라도 다른 국가를 약탈해서 대장장이들을 노예로 삼아서라도 그 기술을 여기저기서 흡수해서라도 뛰어난 무기를 만들었겠죠...
아주 좋은 영상입니다. 재밌게 잘 봤습니다. 첨언 하나 하자면 돌궐제국 역시 그 시작은 금속제련으로 이웃부족들과의 중계무역 및 유연제국에 상납하던 친구들이 힘을 키워서 중앙의 유연을 전복하고 제국을 세우기도 했죠. (부탁 하나만 드리자면 영어라틴식 명칭인 투르크를 튀르크로 바꾸어만 주세요)
음 직검은 양날이 효율적이고, 끝으로 찌르기도 해야해서 날카로운 부분을 버텨줘야 할 두께가 각각 필요해지고(받춰주는 부분이 부실하면 부러질 우려가 생길듯), 일단 만들고 나서도 날을 갈아야 하는 면적이 넓어져 관리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직검의 형태라면 날이 한쪽에만 있더라도 위기시에는 칼을 보지 않고 뽑고 휘둘러야 하는데, 굴곡을 주면 날이 있는지 구분이 쉬웠을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유목민 특성상 몇천명 몇만명의 전투 보다는 소규모 전투였을 것이기 때문에, 서양의 검만큼의 내구도가 필요하지도 않았을꺼고요. 소규모의 잦은 전투로 죽은자들의 칼을 확보할 기회가 많아졌을것이라 엄청난 내구성이 필요하지도 않았을것 같고요. 또 칼을 만들어봐야 몇십 몇백 자루겠지만 투자되는 원석 대비 칼의 자루수도 많이 나올 것 같고요.
병력이 밀집해서 전투를 벌이면 칼을 휘두를 공간이 부족하므로 직도라기보단 찌르기용으로 끝이 날카로운 검이나 창이 보병용 무장이 되죠. 그리고 보호구가 충실한 적병들을 상대로 휘두르는 공격을 한다면 철퇴나 도끼같은 둔기가 더 효과가 있죠. 고구려 벽화에도 도끼병이 그려져 있습니다.
로마군의 칼이 짧은 직선인 건 방패진형이 기본이라 그래. 방패로 벽을 만들어서 밀고 그 사이로 한손으로 찔러야 되니 길고 가늘고 무거우면 안됨. 길 필요도 없고. 어차피 방패앞에 적이 있으니까. 기마병이 주력도 아니라서. 그 뒤로 장창대형이 나오고. 이건 화살 대신 누가 막아줘야 되지. 대형전략이 막강한 방어력을 가지는 대신에 기동력이 최악이지. 고로 몽골군 처럼 전원 말타고 치고빠지고 화살만 날려대고 도망하고 쉬지도 못하게 괴롭히면 답이 없지. 낮이고 밤이고 갑자기 나타나서 화살 날려대면 쉬지도 못하고 말라죽는거임,
유목민 기병대의 검, 몽골제국의 도검이 세계사에서 가장 강력한, 전 세계에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 검이기도 하죠. 고려를 침략해서 고려의 환도로 진화시켰고, 그리고 몽골제국이 이슬람, 중동을 정복하면서 이란의 샴쉬르(시미터)가 만들어졌고 그 샴쉬르(시미터)의 영향을 받아서 유럽이나 이슬람의 검들도 바뀌었죠.
오랑님 처음엔 관심분야에 대해서 공유하기 위해 썰이나 잘못된 내용도 포함해서 시작하셨으나 반대되는 썰이나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바로 잠수...그리고 다시 영상을 올리시는데 단순 취미가 아닌 전문가로서 제작하심(영상을 올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충분하고도 넘치게 해당 논문등 공인된 자료들을 조사하고 취합하여 논리적으로 영상을 제작하는 게 전문가..이심) 썰이나 헛소문 또는 지인들끼리의 의견으로 영상 제작하는 사람도 있는데 영상 제작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성을 쏟으시는데 노력에 비해 구독자가 적은 안 알려진 고퀄리티 제작자이심.
9분 26초 정도에 보이는 금공품은 그리스 제작입니다. 같은 시기로 보면, 스키타이쪽이 확실히 좀 거칠거나 투박한 조형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투구를 쓰고 말을 탄 채로 적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묘사된 금공품도 마찬가지이구요. 따라서 거기 그려진 상황도 그리스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 시기 스키타이의 대표적인 조형은 면각의 사슴류나 맹수를 묘사한 금공품입니다. 저 작품들에 비하면 확실히 거칠고 단순한 조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