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 시절, 지독한 향수병을 달래주었던 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였습니다.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고 가장 좋아한 시리즈는 역시 1편이었어요. 졸업하고 귀국하자마자 남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때 처음 남도를 가봤는데 책으로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미황사에서 바라본 남도 바다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네요.
영상보면서 내가 정리한 거. 경복궁(법궁) : 의전이나 사무적인 일 할 때 쓰는 궁 창덕궁(이궁, 법궁) : 태종이 자기 살려고 만든 궁, 다만 광해군 부터는 법궁 창경궁 : 선왕(죽은왕)의 남아있는 가족을 모신게 창경궁(대왕대비 등) 경희궁(이궁) : 임진왜란때 위의 3궁이 다 없어짐. 광해군때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 먼저 지음. (법궁인 경복궁은 너무 사무적이라 싫다고 함) 그래서 이후엔 창덕궁이 법궁이 되었구 경희궁을 따로 지어서 왕이 경희궁에서 살았음. 덕수궁(경운궁) : 아관파천이후 고종황제가 거처로 삼은곳이 경운궁인데, 일본이 고종을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다음 순종은 창덕궁에서 근무함. 순종은 경운궁에 남은 고종황제를 위해 아버님은 거기서 오래사시라고 경운궁을 덕수궁이라고 이름을 바꿈.
1:30 분명히 계산하실 분이 계실듯해서 계산해 드림 500X3백만+800X1백만+1200X1백만은 35억이고 38%면 13억 3천만이고 3.8%면 1억 3천3백만임 세금을 뺀 수익금은 20억 3천 7백만원이심 ㅎㄷㄷ 하지만 이 돈 보다 훨씬 값진 건 교수님의 땀과 피로 어울어진 역사교육의 열정이심
☺️ 완전 공감. 2018년에 한국갔을때 일부러 비오는날 궁에 갔어요 북적거리면 제대로 구경 못할것 같아서. 근정전(?) 앞 멀찍이에서 처마 밑에서 본 그 아름다움은.... 뒤에 병풍같은 산과 내리는비가 일정하지 않은 모양으로 내려 흐르는 모습이 눈에 아직도 선해요. 여행광이라 많은 나라의 궁들을 봤지만 그런 절제된 고급스럽고 균형이 자연스럽게 자연과 같이 녹아내린 계단 하나 허투로 조각하지않은 궁은 본적이 없어요. 하나하나 문짝하나, 굴뚝하나도 그냥 지붕에 놓지않은, 그 조차도 궁마다 다른데 다 조화롭고 주변 자연환경과 계절을 다 염두해서 지은게 경악스럽고도 경이롭더군요. 나고자란 서울이지만 경복궁을 어른으로써 본게 처음이였는데......
그냥 생각나는대로 쓰다보니 윗글에 오타도 있고 두서 없이 쓴 느낌이네요. 출판사는 인기작가의 유명도서만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작가의 신작도 출판합니다. 요즘은 초판 1000-3000권만 나가도 성공한 책입니다. 그렇지 않은 책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출판사의 이익은 이런 작가를 발굴하고 출판에 투자하는 비용도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근 인세가 출고가의 약10%정도로 추산되는데, 이건 정말 작가의 유명세에 비해 좀 작아 보이기는 하네요.
@@user-qz3bb6kh7b 숭례문의 1차 관리 책임은 어디에 있나요? 그 책임을 맡은 기관의 장은 누구였나요? 사건사고가 터졌을 때 모든 원인을 기관장에게 떠넘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만, 그래야만 한다면 무엇보다 관리를 맡은 기관의 장에게 책임을 묻는게 맞을 겁니다.
논현동 출판문화센터 지하에서 한국미술사를 듣고 김리나 교수 수업 대신 선생님 강의만 들었더랬습니다. 시와 문학의 절구를 인용한 문화해설은 흡입력이 있었고 책도 역시 다양한 일화를 문화에 입혀 다채로운 미술사를 보여줬죠..강의 자체가 참 좋았는데 그게 벌써 35년 전이네요..
선생님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듣게되고 그이후로 우리의 미술 공부를 계속하면서 이렇게 재미있고 자랑스러운 문화가 있다는것이 참으로 기뻣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의 도자기 (윤용이), 구수한 큰맛 (고유섭), 선생님의 완당평전, 한국미의 순례자 (최순우), 한국의 미 (오주석), 토기사랑 한평생(최영도), 사카와 다쿠미 평전까지 많은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수궁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것은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되고 상황이 되면서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를 정했으면 좋겠다 라는 말했고 순종이 윤허하면서 덕수궁으로 개명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쭉 경운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경희궁을 경복궁 재건재료로 쓴 이유는 단순합니다. 폐주(광해군)가 만든 궁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