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정치물뿐이라고 하고 누구는 범죄물뿐이라고 하고 누구는 신파물뿐이라고 하고...그냥 까대려고 갖다 붙이는 느낌. 한국영화 덮어놓고 천대하려드는 편견이 더 지겹네요. 정작 대박친 영화들을 보면 공포물 가족물 정치물 느와르물 코미디물 몹시 다양한데허세 낭낭한 외화보다 한국영화는 현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나왔구나 싶은 취재력이 인상적이예요.
종교철학,사상에 어느정도이상의 관심이 있었거나 있을수록 재미있었을 영화였고 그렇지 않다면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검은사제들처럼 극한의 공포나 비주얼/연출적 충격을 기대하고 간 분들이면 실망을 하는 모양이고 평도 실제로 굉장히 갈리고 있네요.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호. 이것은 대작입니다. 재미있는 모티브와 복선,은유적 표현이 넘쳐나요.
그럼 성경이 틀렸다는 이야기냐...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세이었더라 창세기 25:25-26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거겠지
오늘 영화를 봤는데 저는 아직까지도 과연 그 뱀은 누구였을까라고 생각되네요 물론 영화를 만든이가 의도한것이나 그 의도대로 많은 사람들이 김제석이 뱀이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많은 아이들이 죽고 예수가 태어난 것처럼 김제석이 살았다면 정말 미륵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불교에서 부처가 될 것을 의미하는(맞는지는 모르겠네요) 육손을 가지고 있고 예언가가 그런 예언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학살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물론 제 생각입니다
저완 다르게 보셨군요. 저는 불교로 시작해 기독교로 끝나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지는 불교에서 차용했지만 대사나 상징들을 이용하는 방법 또는 그 의미가 다분히 기독교적이었거든요. 심지어 감독도 본인 입으로 자신이 교회를 다닌다고도 했고 기독교신자로서 신에 대한 궁금증을 표현했다고도 한 것도 있어서 불교로 끝난다는 해석도 좋은 해석이지만 기독교적 사상이 담긴 영화로 해석하는 쪽이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오늘 티비에서 사바하를했었는데 해석을 듣고 보니까 진짜 중 후반부에 소름이 돋더라구요...."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이말의 뜻과 "불교에는 선과 악이없다"의 뜻이 너무 이해가 됐습니다.미륵이었던 김제석이 자신이 죽을걸 알게되자 타락하여 코끼리의눈을 보고 두려워하며 아이들을 죽인다.그리고 김제석이 죽자 그것도 죽었다. 진짜 완벽한 영화인거같습니다
기독교 신자인데 정말 영화 너무 잘 만든 것 같습니다. 댓글들에서도 보이듯이 주변 기독교인들이 영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보지 말라고 하길래 안봤는데, 개인적으로 보고나니 정말 그들에게 다시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사바하나 밀양처럼 반기독교적이면서 기독교적일 수도 있는 그런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영화들이 기독교의 이미지를 어쩌면 안좋게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영상에서도 말했듯이 기독교인들 또한 스스로 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의심(?) 계속하는 것이 더욱 더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니깐요!
이 영화 전면에 기독교 목사가 서 있다고 좋아하는 교회사람들 봤는데ㅋ......그거 아니에요.... 기독교로 시작해 불교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신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선(善)에 대한 통찰이 녹아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구요. ‘유일신’에 대한 의심을 차단하고자 하는 기독교 광신도들이 좋아할 스탠스는 아닌데...
James 0034 오히려 신학을 공부하는 분들은 맹목적으로 믿지 않으시죠. 저도 제가아닌 지인이 공부하는지라 어깨너머로 들은 것이긴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다가 현타와서 아예 개신교 이외 다른 종교로 믿음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개신교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이태껏 배운 가르침이 모두 옳기만 하진 않았다는걸 깨달아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ㅋㅋㅋㅋㅋ
티벳 고승의 예언은 부처님이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에서 방해하던 마라와 같습니다. 부처님이 유혹을 이겨내고 온전한 깨달음을 얻었듯이 김제석도 예언이라는 깨달음을 무너뜨리는 유혹과 거짓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계속 정진했다면 대척점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고 진짜 부처와 같은 존재가 됐을 것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점은 부처는 신이 아니고, 불로불사하는 인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 자체인데 마치 깨달은 존재가 신인 것처럼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띠로리로리-t6p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인과와 균형이 적용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김제석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악이 되어 저지른 악행이라는 원인과 이에 대한 책임이라는 결과가 있어야 하고, 김제석이라는 악에 대응해 균형을 이룰 초현상적인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한 것이겠죠. 영화의 세계관으로 설명하면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가 불사의 능력을 지닌 김제석이 선에서 악으로 타락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존재로 쌍둥이 언니를 탄생시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선과 악은 내안에 존재하는것. 공존하는것. 절대선과 절대악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인간의 모호함.불안정성 때문에 신이란 존재를 갈구하고 찾게되지만 어느종교안을 들여다 보아도 보이는건 인간. 인간이기에 의심하고 인간이기에 믿는 망각의 동물.존재를 한번더 생각해 보게만드는 영화.
정말 단순 미스테리 추리극 영화가 아닌, 영화에 담긴 의미들과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게 해석하는 리뷰마가 소름돋고 흥미진진한거같아요 양파같은 매력도 있고 깊이감 있는 떡밥들! 두 종교를 묶어서 융합시킨 점도 너무 재밌구요.. 아무튼 이 리뷰 보는내내 등에서부터 머리까지 살짝씩 소름 돋았어요
그또한 맞지만 동생의 다리를 물어 뜯은건 동생을 보호하고자 함과 더불어 김제석을 만날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 이기도 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생이 없다면 나한이 동생을 죽이러 오지도 않을것이고 나한과 만날일도 없죠 그것은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동생 다리를 다치게 하여 동생이 그것으로 부터 멀어지지 않게하고 동시에 자신의 곁에서 동생을 보호 할수 있는것 이죠
진짜를 찾아헤매던 박목사가 만약 그것과 만났다면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를 상상해보니 흥미롭네요. 또 작중에선 결국 만나지못한 그것과 김제석이 만약 만났다면 또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요? 물론 김제석은 대화할 생각따윈 없는것같으니 말 대신 총을 쐈을것같긴 하지만요. 아... 산탄총! 훌륭한 대화수단이죠
박목사는 절대로 그것을 만날 수 없습니다. 박목사가 진짜를 만나기 원하는 한 박목사는 절대로 진짜를 만날 수 없다는 점이 재미있는거에요. 박목사가 티벳대승이나 문어가 진짜라 보증한 풍사를 만나게 된 것도 풍사가 진짜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죠. 세계관이 불교와 기독교등 여러가지 요소가 혼합된 만큼 기독교의 신을 믿는 박목사는 절대로 진짜를 만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박목사가 기독교 신앙 안에 있을 수 있거든요...
비슷하게 풍사도 그것을 만날 수 없습니다. 불교세계관에서 풍사와 그것은 완벽하게 대치되기 때문에 둘이 직접 만나게 되면 인과가 깨지게 됩니다. 이를 알고 있는 그것은 예전의 제석처럼 나한을 이용한 것이고요. 이미 욕망으로 타락한 김제석은 이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스스로 나선겁니다.
전작인 검은 사제의 주제, 감독이 공공연히 자신이 개신교인이라 밝히는 점, 박목사의 마지막 읊조림(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 같음)을 볼 때, 감독은 의심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교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신과 구원을 바라고 있음. 추후에 신앙을 버릴지, 유지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박목사가 직접적으로 하느님이나 하나님 또는 부처님을 정해놓고 마지막 대사를 말했다기 보다는 신 그 자체를 생각하며 말했다 생각합니다. 우리의 위에 존재한다 믿어지는 그 분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우리를 이리 내버려두느냐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답은 영화 내에 부처로 현신한 그것이 말한 대사에 있다고 봅니다. '나는 너희들이 피흘릴 때 같이 울고있는 자이니라' 라고 말이죠.
@UCQC3hVQUijr5I8oCFopVFWw 종교에 회의적이며 스스로도 가짜를 표방하지만 사실 진짜를 찾고 싶고 갈구하는 존재인 박목사는 기독교에 메인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전도사가 기독교인에 가깝죠. 박목사는 종교의 본질 그 자체만을 보며 진짜 가짜를 가릴 뿐, 고전도사와의 차 안 대화에서도 하느님이 살아계신다는 그의 말에 신의 뜻 때문에 죽어야 했던 친구 가족의 일을 말하며 모르겠다고 하죠. 박목사가 말한 신은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박목사는 종교문제연구소를 할 생각도, 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곳은 오직 어딘가에 있을 진짜를 찾고 싶은 박목사가 가짜들을 가려내는 곳이니까요. 김제석이 진짜고 신이라 했을 때도 그는 정말 진짜인지만을 알고 싶어했을 뿐 기독교적 교리와 생각들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감독이 정말 유일신만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영화는 만들지도 않겠죠. 또한 감독은 기독교적 이분법이 옳다 여기지 않았을 겁니다. 김제석과 정나한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야 나올 수 있으니까요. 악귀였던 정나한은 그것을 만나 귀의하였고 악귀인 김제석을 잡고 열반한 겁니다. 영화 마지막에 정나한이 죽고나서 화면이 가로등을 비추고 불꽃을 비춘 것은 그 둘이 불을 뜻하기 때문이고 그 불은 등불이 될 수도 부처가 될 수도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cyoon9930 고전도사는 고민없는 기독교인입니다. 하지만 감독은(그리고 목사는) 원리주의적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검은사제나 사바하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검은사제의 결말이나 박목사의 마지막 읊조림이 나왔습니다. 저 또한 원리주의적 기독교인이 아니고 신앙에 회의를 가지고 있기에, 감독과 굉장히 유사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사바하처럼 만들었으리라 확신합니다. 기독교이라고 해서, 고민없이 교리를 무조건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인도 내적으로는 여러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존재와 방관에 대한 무거운 담론은 기독교 세계관에서 나올 수 있는 담론이지, 불교 세계관에서 나올 수 있는 담론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은 전지전능하고 자존자입니다. 모든 것은 자존할 수 없는데, 오직 야훼만이 자존할 수 있습니다. 불교로 치자면 본초불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선인은 핍박받고 세상은 어둡습니다.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초대교회부터 나왔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새삼스러운 주제도 아닙니다. 불교 세계관에서 세상의 어지러움과 개인의 고통은 붓다의 책임이 아닙니다. 업 때문이죠. 모든 건 자신의 책임입니다. 붓다는 중생을 해탈할 수 있게 도와주는 초월자이자 스승일 뿐입니다. 물론 '붓다는 왜 우릴 내버려두냐?라고 ' 외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투정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붓다는 고통에 대한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확실히 기독교보다 불교가 설정을 잘 짰습니다. 신도를 고민에 빠뜨리지 않으니까요. 미륵이 말한 대사 또한 미륵의 입을 빌렸지만 기독교적 테마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의 존재와 방관에 대해서 기독교인이 내린 해답은 대개 이렇게 흘러갑니다. 미륵이 말한 대사와 유사합니다. "신은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고 있다. 실제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릴 때 울고 피흘렸다." 좋게 말하면 신앙의 신비고, 나쁘게 말하면 정신승리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방관하는 신에 대한 담론은 불교보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 또한 작중 미륵의 말과 비슷합니다. 제 뇌피셜이라구요?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이를 영화화한 사일런스에서 예수가 직접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고통을 당할 때 같이 고통받고 있다." 참고로 이 영화는 교황이 관람했습니다. 검은사제의 결말, 검은사제와 사바하를 크로스오버 할 의향이 있다는 감독의 말, 사바하가 불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주제 담론이 좀 더 기독교적인 점, 자신의 종교를 공공연히 밝히는 점을 봤을 때 감독의 세계관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적 다원주의 세계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독은 아직 기독교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현재 '신에게 실망하고 화나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신은, 감독의 세계관을 봤을 때 '100% 기독교적인 신' 은 아니지만, 기독교적인 신의 모습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전도사같이 고민없는 기독교인만 있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는 고민점을 던져주니까요. 그래서 감독은 고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당당하게 기독교인이라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미래는 어찌될지 모르지만요.
글을 다 쓰고 나서, 감독의 종교를 검색해봤습니다. 헛정보에 의존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던 그대롭니다. 그리고 인터뷰를 발견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선과 악이 모호한 불교의 기본베이스를 담으려 했다." "나는 유신론자고, 그 절대자가 선하다고 믿는다. 근데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의심이 들기보다는 원망스러웠다." "항상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의심 섞인 원망을 하곤 했다." 제 첫번째 답변 마지막 문단을 보면 감독은 '신에게 실망하고 화나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썼습니다. 일치합니다. 불교의 베이스를 담으려 했다는 건 저도 인정했습니다. 전 감독의 세계관이 '기독교에 바탕을 둔 다원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했습니다. 이 인터뷰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제가 내린 결론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방관하는 신에 대한 해답을 작중 미륵의 대사에서 발견한 윤님은, 기독교인과 비슷합니다. "예수여,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왜 우리를 버려두십니까" "난 너희와 함께 고통받으며 피흘리고 있다."
방구석 1열이란 프로에서 감독 님 왈: -여러 해석들이 나왔지만 감독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들고 꽤 있다. -광목이 불교계통의 종교를 믿고잇엇기 때문에 그것이 부처와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만약 다른 종교를 믿고있었다면 그쪽 종교와 관련있는 모습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난 이 영화의 후기가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에서 부터, 의문이었다. 평일 관람이었다.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서 정말 빠져들듯이 관람했다. 반전 요소도 좋았고, 신선한 소재였던 것도 좋았다. 후반부 이야기가 많은 데, 나는 관람 중에 계속 '그것'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안 죽이고 망설이고 있냐고 되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해답은 영화속 대사에 들어 있었다. '불교에서는 악이 없다.' 관람 중일 때 나는 '그것'은 당연히 악이고 없애야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는 반전을 설명하면서 모든 게 해명이 되었다. 거기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속 놀란 눈으로 스크린을 보았다. 처음 이 영화 예고편을 보고, 이건 빨리 안 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시간을 내서 봤다. 아마 조금 더 늦게 봤다면, 스포를 당하고 봤다면, 재미가 반감 되었으리라. 결론을 내자면, 만족했다. 평소 관심있던 종교였고, 타 종교의 이야기를 가져와서 새롭게 쓰이는 게, 너무나도 신선하고 좋았다.
세상에 호불호가 안갈리는 영화가있을까요? 영화를 진정으로보셨다면 호불호가 갈린다는말을 이해하셨을텐데.. 저는 종교에관심이어느정도있고 영화마니아입니다. 악이없다라는것을 스님과 목사의 통화언쟁때 아 이영화가 하고자하는게 이거구나 하면서 모든게 다풀려서 후반부에 좀지루했습니다. 너무 관객에게 설명하려해서요. 중반부몰입은좋구요. 그런면에서 뭔가 반전이나 숨겨진애그들을 찾거나 카타르시스를느끼자한사람들에게는 불호일것이고 탐구하거나 반전보다 원주제를찾으려하거나 종교에관심이좀있으신분들은 호일거라 봅니다. 전 애초에 검은사제들을통해 감독의 연출의도를 대충알고봤기에 후자라서 호입니다. 그리고 경찰의 존재이유가 너무 없어서 그점이 좀아쉽더라구요. 굳이 군대장면을 넣지않고 경찰로 대체해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죠.
@@cyoon9930 아 그 전단지가 관객들에게 주는 메세지가잇는장면이긴하네요. 맞는말씀입니다. 저는그냥 그쪽 경찰없이도 박목사가 다 찾아내고 그 남대문경찰서여경분이랑 둘이서 알아내고 경찰들은 결국 사건의중심에한게없어보여서요. 그렇지만 엄청많은장면에 경찰이 쓰였거든요. 그점이좀아쉬웠습니다.
이 영화는 재관람하는걸 추천드립니다. 물론 무지한 체로 그 영화를 보면 그 중요하다고 단어들을 기억하면 내용을 이해하기 쉬워지지만 불교나 기독교관련 사전지식을 알고 본다면 재미가 더욱 더 재밌어지는 거죠. 특히 이 영화는 불교 신화를 알아가는걸 추천드립니다. 불교신화를 중점으로 풀어나가는 영화는 이게 처음일껍니다. 또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정재현 감독님에게 이렇게 외쳐주세요. 감독님 이 영화를 시리즈 아니, m 나이트 샤말란감독처럼 감독님만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형성화해주소서. 검은 사제들과 크로스오버하는 관점을 쓰인 영화를 만들어주소서. P.s 부엉이는 아테네의 방패에서 그려진걸 보면 부엉이는 지혜의 상징인데 종교적 관점이 아닌데다 이 영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건 아니니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거 있다면 부엉이의 상징이 뭐냐고 설명해주세요.
태클은 아니고, 영화 다시 보니까 '그것'의 수인이 지권인은 확인이 안되요.. 정나한이 그것을 만나자 그것은 '아미타구품인'이라고 하여 중지와 엄지를 맞대고 나머지 손가락을 펴는 자세를 취해요 (아미타구품인 검색해보시면 알겠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처의 손가락 모양임. 오케이! 하는 그 손가락 모양). 이 후 아미타구품인에서 '시무외인'으로, 마지막이 '항마촉지인'으로 이어지네요. 아미타구품인은 중생들(사람)의 근기(근기가 뭔지는 모르겠음)에 따라 9개의 품으로 나누는걸 의미한다고 하네요. 시무외인은 중생들의 근심과 걱정을 없애준다는 뜻, 항마촉지인은 불건전한 악한 생각을 모두 떨쳐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쌍둥이 언니인 그것은 정나한을 보고 아미타구품인을 통해 정나한을 파악하고, 시무외인으로 정나한의 의심과 걱정들을 모두 없애주며, 항마촉지인으로 김제석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지권인은 다시 봐도 확인이 안되서 댓글을 씁니당.. ㅎㅎ
영화를 보는 중에 헤롯왕의 이야기가 나올 때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지만, 다음 날이 되고 그 말을 곡씹어보니 '언니'를 죽이려고 99년생 아이들을 다 죽였다는 걸 생각이 나더라고요ㅋㅋㅋ 그리고 이건 딱히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나한이 그 자신을 미륵이라 생각하는 분에게 갔을 때, 그 분이 사슴이 죽는 걸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길 비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째서 인간으로 태어나길 비는 가 싶었어요. 당연히 짐승보다는 인간이 더 낫죠. 근데 그건 지극히 인간의 시점이 아닐까요?
사바하가 완전 실수한 점은 연기설을 '밸런스'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선이 있기위해 악이 존재해야하고, 악이 있으면 선이 있어야하고. 이걸 하나가 생겨나면 다른게 생겨나고,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것도 없어진다. 라는 대사로 때우죠. 불교에는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다. 식으로 말이죠. 연기설은 전혀 이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식 선악관념을 불교관점으로 억지로 말하려고 한 것으로 밖에 안되죠. 절대악과 절대선이 불교에서 존재하지 않는이유는 악과 선이란 것도 연기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지는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세상의 모든것은 기준도 없는 총체적 난국이라는 관점을 낳을수밖에 없었고, (부처가 태어나기 전에도 이 가르침은 있었습니다) 아함경에도 몇번이고 사람들이 부처에게 찾아와서 그럼 본질적으로 선한것도 없고 악한것도 없으면 기준을 뭘로 잡고 살아야 되냐는 질문을 합니다. 부처는 여기서 좋은 연기와 나쁜 연기를 확실히 구분 지으며, 열반을 향해 가는 길이라면 좋은 연기이고, 그 와 반대되는 길이라면 나쁜 연기라고 가르침을 줍니다. 제일간단한걸로는 계를 주면서 일단 이것부터 지키라는 가르침이 있죠. 즉 불교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은 확실히 있다는 겁니다. 단지 불변의 무엇(불교에서는 常이라고 합니다)이 존재할수 없다는 겁니다. 보통 불교에서는 완전히 열반에 들면 되돌아가지 않다고 하지만, 영화 내에서는 부처가 되어서 세상의 법칙을 깨버린 존재가 있는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일본불교 식으로 말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부처는 육체를 뛰어넘은 존재이다. 라고 급 반전을 해버리죠. 불교의 열반은 슈퍼맨이 되는것과는 무관한데 말입니다. 만약 열반에 들었다고 세상의 법칙을 깰수있으면 부처가 왜 죽었겠습니까. 세상의 진리는 제상비상이라고 죽을때까지 가르쳤던 부처가 생은 있는데 사는 없다는 말을 들으면 피식 하실것 같습니다. 육체'만' 극복한 '부처' 가 영화에 존재하고(사바하식 부처), 그 존재로 인해 안티테제가 생겨나고, 그 명을 다 한순간 둘다 멸한다. 완전 짬뽕도 이런 짬뽕이 없습니다.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예수가 와서 같이 멸하는 식의 스토리밖에 안되죠. 나한이도 결국 손가락수만 보고 기다아니다를 생각하는 자체가 아라한과는 거리가 아주 먼 존재구요. 차라리 곡성처럼 한 종교로만 밀어서 해석이 일관적이게 하는게 훨 나았을텐데 기독교와 불교를 짬뽕을 시킬려고 하니까 한계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불교에는 우선 선업을 쌓고 악업을 피하라고 중선봉행 제악막작 가르침이 있지요. 그러나 결국 불교의 깨달음은 선악이라는 이분법의 세계도 넘어 즉 선업 악업의 윤회함, 업의 굴레 자체를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경지지요. 고를 벗어나 적멸의 경지. 사바하는 선이 있으면 그 상대로 필연적으로 악이 있다는 논리까지는 보여주었으나, 진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나 깨달은자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지는 않다고 보이지요. 아마 이런 세계관까지 차용해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한듯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