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전공자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방송 초반에 패널분들께서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 전쟁이라고 하셨는데, 전쟁의 목적 달성 측면에서 봤을 때는 맞는 말이지만 이겨도 이겼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나라꼴이 엉망진창이 됐습니다.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고 생산 기반도 조선 후반까지 회복이 못될 정도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약탈당한 문화재와 파괴된 건축물들은 얘기하기가 입이 아플 지경입니다. 학살당하고 강간당한 백성들은 뭐 부지기수였구요. 이조판서(이덕형) 아내마저 성폭행을 피하려고 자살할 정도로 나라가 개판이었어요. 일본군만 만행을 벌인게 아니라 우리를 도우러 온 명군의 패악질도 어마무시했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그 꼴 당하는 겁니다. . 일본은 임진왜란의 전쟁목적 달성(조선 점령 및 명나라 진출)이 좌절됐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맞고, 조선은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승리하게 맞지만,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배상을 받은 것도 없고 보복을 한 것도 없습니다. 역으로 치고 들어가서 규슈까지라도 점령했으면 괜찮았을텐데 임진왜란 말기 조선이 동원한 병력을 보면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이죠. 방송에도 계속 말씀하셨지만 임진왜란은 일본이 전력을 기울인게 아니라 서일본(도요토미) 세력만 가담한 것입니다. 그것도 절반 역량은 도쿠가와 견제하느라 건너오지도 않았어요. 일본이 만약 제대로 통합돼서 30만명을 온전히 동원할 수 있었다면 조선은 이기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 제 말의 요지는 뭐냐하면 일본에게 우리가 이기고도 식민지가 된 이유는 지도만 펴 봐도 생산력에서의 차이가 어마무시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농지도 많고 생산력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오랜시간 전쟁을 하면서 이미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것이 기업화가 돼 있었습니다. 남해안에 축조한 왜성들도 전문적인 성곽 건축회사들의 작품이라고 보면 됩니다. 경제 규모에서부터 시스템까지 조선은 철저하게 패배해 있는 상태였고, 그러한 구조는 구한말 식민지배를 당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 지정학적으로보나, 국토의 생산력으로 보나 조선은 최상의 효율만 추구해도 일본을 이기기 벅찬 나라였지만, 임란 이후 300년을 쌩으로 날려먹었습니다.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은 수레와 벽돌 생산을 통한 물자 유통 및 건축 혁명을 거론했으나, 당시 북경으로 사신으로 갔던 최고 엘리트들도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정조시대에 들어가서야 겨우 시대착오적인 수원 화성을 건축한겁니다. 이미 다른 나라들은 성곽 요새 시대를 끝내고 훨씬 진보한 화약 무기로 싸우고 있었는게 말입니다. 그게 조선의 한계였고 수준이었다는걸 철저하게 국민들에게 각인 시켜야 역사를 배우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겨도 이겼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전쟁을 자꾸 이겼다고 정신승리하는 것은 매우 곤란합니다. . 역사는 반성학입니다. 반성이 없으면 반드시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지금도 일본은 우리보다 국토도 인구도 경제 규모도, 산업 전반에서도 강력한 나라입니다. 도쿄,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등 자체 경제권이 건실하게 돌아가는 강대국입니다. 반면 한국은 서울 공화국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바로 원시시대로 돌아가고 다시 나라가 최빈국으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 한국이 살아나갈 길은 통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온갖 불가능한 이유들을 대며 역사적인 책무를 방관하고 회피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통일을 이뤄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모든 경제적인 문제, 인구감소의 문제는 북한 붕괴를 통해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해소할 수 있습니다. . 한국은 서울 외에도 부산경남, 평양, 신의주 등 거대 경제권을 갖춰야 합니다. 그렇게 인구와 내수시장을 확보하고, 우리 기업들의 생산 기반을 굳이 동남아로 보낼 필요없이 북한 지역에 투자를 해야합니다. 또 통일을 통해 분단유지비용이 영구적으로 해소된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북한이 뚫리면 서울의 안전이 확보되고, 코리아디스카운트의 문제도 말끔히 해소됩니다. 역사적으로도 서북지역은 상인들의 땅이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을 무시해선 안됩니다. 개방만 되면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돈을 버는 감각을 드러낼 겁니다. . 그렇게 적어도 인구 8000만에 거대 경제권이 서울 외에도 2~3개가 더 생기고, 반도체, 2차전지, 자동차, AI, 바이오, 조선 등 알짜배기 산업들은 꽉 움켜쥐고 가야 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더 부강하고 더 강력한 나라, 더 평화로운 나라가 되길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의 국가 규모가 불안정하고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 모두가 이 문제를 직시했으면 좋겠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보지마시고 당시상황을잘보세요 임란후에도 일본상황은 무신정권이라 예절 매너는 거의 최악이라고 보시면되여 사람목숨이 파리목숨이랑 같았죠 그래서 조선입장에서는 잘 지낼필요도 못느꼈어요 오죽하면 일본문화에 환멸을느낀 몇만명의 사무라이들이 임란도중에 귀화하겠어요 그리고 조선은 침략을 미개한 행위로 보았어요 조선후기 당시 제국주의 시대상황에 패러다임이 맞지않았죠 일본이 농업생산력이 좋았다하는데 그게 일반백성한테 다 가는건 아니었어요 일제강점기 전까지 대마도에서는 조선에서 매년 쌀을 얻어갔거든요 이걸보면 우리나라 유교사상 대단하죠
「다케시마」가 일본령인 것은, 이하의 3점으로부터 분명하다. 현재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지만 실제로 '다케시마'를 필요로 할 때 일본이 해상 봉쇄한다. 1. 조선이 1905년 이전에 ‘다케시마’를 알고 있던 증거가 없다. 거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그린 지도조차 없다. 모르는 섬을 영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 1905년 일본이 편입 선언했을 때 조선은 항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본에 의한 다케시마 영유가 확정되었다. 3.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에 할양하는 영토에 ‘다케시마’는 적혀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이유는 러스크 서한에 의해 이승만에 설명되어 있다. 이로써 다케시마는 일본령으로 남게 되었다. 한국인은 무지이므로 모르는 것 같지만, 한국은 대한제국의 승계국이 아니다. 한국은 조선인이 건국한 나라가 아니라 연합국이 일본에서 분리해 건국한 역사가 없는 신흥국이다.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어 소멸했기 때문에 구대한 제국의 자산이었다고 해서 한국의 자산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자산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규정된 일본에서 할양된 영토와 그때 그 영토상에 존재한 물품뿐이다. 예를 들어 타국으로 유출된 불상이나 미술품에 한국의 소유권은 없다. 물론 다케시마는 한국령이 아니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은 한번도 이기지 않았다.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모두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도망치고 있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에 이겨 ? 참 아큐짓좀 그만해 국토 유린당하고 문화재 도공 약탈 당하고 사회 혼란 야기했는대 자딸하냐 일본에 무슨 위해를 가했냐 우리가 노량해전도 히데요시 사망으로 철수하던 왜군 공략한 거지 우리가 걔네를 무력으로 밀어 냈냐 참 ? 쓰고 보니 표현은 다르지만 당신의 의중과 비슷하네 😂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은 한번도 이기지 않았다.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모두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도망치고 있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세키야마지마 해전은 확실히 조선이 승리했지만 일본 측에 큰 손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망자는 많이 견적해 300명이다. 와키자카의 수군에는 원래 병사가 1500명밖에 없고, 반년 후의 육상전에 900명이 참가하고 있다. 물론 배의 보수 요원을 제외하고이다. 이순신의 보고는 분명히 과장이다. 한국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전통이다.
일어를 전공하면서 아무래도 일어를 이해하려면 일본 역사를 알아야겠다 생각했었죠. 그 당시가 2000년초반이라 자료가 많지 않았는데 이걸 이해할 수 있는건 영화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만만치않은 조선중후반기 역사가 있었지만 일본은 근대화로 가는 길목에 수많은 몰락과 개발사가 있었고 특히 에도막부와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그 당시의 영화를 보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뒤따랐던데 한국에서 거의 가르치지 않다가 바람의 검심 때문에 좀 주목받았거든요. 특히 홋카이도 개발사가 좀 흥미로웠는데 관련 영화가 여럿있어서 이해하는데 쉬웠네요.
@@user-dw3wk8hh9c 친명 맞아요 청나라는 그 이후 조선을 침략했고 청이 명을 먹은 후 조선은 명나라를 찾다가 더 두들겨 맞았고 물론 청이 조선을 비슷한 종족이라고 우대하는 등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완전하게 굴복하게 되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하게 된 것이 평화가 오래 이어진 것 때문이 전혀 아니고 그런 식이면 일본은 왜 식민지배를 안받았겠나 조선왕조는 유학을 유교로 바꾸고 종교로 무장한 국가가 됐으니 변화가 불가능해서 퇴보를 거듭하다가 식민지배를 받은 것이고 저런 식으로 역사를 단순무식하게 왜곡하니 심각한 상황
@@dm2192 그러니까 무슨 통수를 쳣냐고?? 정작 너도 설명해보라니까 모르네 ㅋㅋㅋㅋ 딱 페.미들이 아무런 설명 못하고 공부하세욧!! 이수준임 ㅋㅋㅋ 설명은 하나도 못하고 패드립 치는거 보니 정작 못배운건 본인인듯 ㅋㅋㅋㅋ 뭐 느그 세대들중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어? 대학은 갔니?ㅋㅋ 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남은 임진왜란 3년전인 1589년에 요도도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도요토미 츠루마츠입니다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위해 1590년에 조선에서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등이 왔을때 히데요시가 갓난아기였던 츠루마츠를 안고 나왔는데 이때 츠루마츠가 히데요시의 옷에 소변을 지렸는데 이 모습을 본 통신사들이 크게 불쾌해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 장면은 임진왜란 관련 드라마에서 많이 나옵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를 정실 부인 네네에게 기르게 했으며 매우 귀하게 여겼지만 몸이 약하여 임진왜란 1년전인 1591년에 2살의 어린나이에 사망합니다 히데요시는 매우 충격을 받고 슬퍼하여 촌마게 (상투)를 잘랐고 휘하의 다이묘들도 함께 촌마게를 잘랐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히데요시는 자신이 더 이상 아들을 낳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3개월 후에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맞아들이고 다시 1개월 후에 히데츠구를 관백으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임을 공표합니다 그 후의 사건들은 썬킴님이 설명하셨으니 생략합니다
요도도노가 바람펴서 낳은게 츠루마츠란 이야기도 있죠~츠루마츠가 도요토미를 너무 안닮았고..그래도 도요토미는 간절히 원한 아이가 나왔으니 의심보다는 아들이 생겼다는거에 정신이 나갔을듯...임진왜란 자체가 츠루마츠가 병에 걸려 죽고 약간 정신병적인 상태에서 아시아정벌을 해서 죽은 츠루마츠에게 바친다는 묘한 생각으로 계획했고 마침 일본통일 뒤에 넘처나는 무사들의 뜨거운 피를 잠재운다는 신하들의 생각과도 통했으니...
에도막부도 쇄국했지만 기본적으로 세계에서 단절된건 전혀 아님. 꾸준히 국제정세 퍄악에 나섰고 기술적 발전을 해옴. 일례로 아편전쟁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서 약간의 소요가 있다니까 그말을 믿었지만 일본은 네덜란드로 부터 정확한 결과를 들어 충격받고 이는 개항에도 큰 영향을 줌
당장 포르투칼 상인들이 시바바라의 난을 일으키고 카톨릭이 들어오니 탄압했지만 나가사키에 데지마를 만들고 네덜란드로 교체해 교역했던걸 보면 조선보다는 열려 있었죠. (교역의 영향이 반 고흐의 우키요에를 보면 알 수 있으니)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로 타 왕조로 교체되지 않고, 영정조 이후 세도정치로 암흑의 기간이 길었던게 우리한테는 크리티컬 했다고 봅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 역사상 가장 정치 경제가 안정되고 민초들이 살기 편한 그야말로 태평성대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조선처럼 중앙집권제가 아닌 지방 영주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봉건제라서 나중에는 지방영주들이 군웅할거하게 되는 시스템 차이가 쇄국과 메이지유신으로 갈리게 되는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2:27: 📚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에 대한 역사적 이유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물적 특징을 설명한 영상 2:27: 일본의 260년간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부족한 이해 2:41: 임진왜란 이후의 일본의 행동에 대한 궁금증 2:54: 일본의 식민지화 과정에 대한 관심 부족 3:28: 일본의 막부 시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역할 3:4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적 영향력 3:5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정자증과 후궁의 자녀 문제 4:49: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설 5:39: 📜 조선 시대의 권력 승계와 사회적 불평등 5:39: 태조왕건의 외동아들 태어남 6:54: 도토미디어의 후계자로 선정됨 7:19: 임진왜란 발발 7:46: 도토미디어의 외모와 사회적 지위 9:02: 도토미디어의 결백 주장과 권력 쟁탈 9:46: 영주들의 돈 빌려주기와 돈봉투 사건 10:23: 도토미디어의 자살 10:31: 📜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후 식민지로 변모한 이유 10:31: 임진왜란 당시 영주들의 살인과 사망 11:2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주들에 대한 관대함 14:2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쿄 건설 15:40: 도쿄에서의 초밥의 시작 17:56: 🇰🇷 이순신의 노량 회전과 도토미 히데오의 죽음으로 조선이 승리하고 미스 나리의 배신으로 인한 사건 17:56: 미스 나리의 배신 19:36: 도토미 히데오의 죽음 20:54: 조선의 승리 20:54: 이순신의 노량 회전 21:25: 🏯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세키가하라 대전투의 결정적인 순간과 이유 21:25: 도토미 히데오의 사망과 후계자 문제 21:55: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의 세력 분쟁 22:32: 세키가하라 대전투의 중요성 25:10: 도쿠가와의 역전과 뒤통수 치기 25:35: 고바야카와의 결정적 역할 26:49: 도쿄 시대의 시작과 도토미 히데요리의 결정 27:02: 도토미 히데요리의 아들과 오사카 성의 운명 27:09: 📜 도쿠가와 이스와 이순신의 역사적인 이야기 27:09: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활약 27:17: 도쿠가와 이스의 조건과 전략 28:03: 도쿠가와 이스의 전략 수용 30:12: 이순신의 소설 속 활약 32:39: 도쿠가와 이스의 정책 변화 32:53: 🇰🇷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와 관련된 주요 내용 32:53: 일본 260년 동안 조선 관에 전쟁을 안 해서 안심하게 만듦 33:18: 에도막부의 서구 문무를 빨아들이고 나라를 개혁함 34:29: 일본의 침범을 예상하지 않고 평화주의적 태도로 관심을 끊음 34:36: 결과적으로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가 됨 Recapped using Tammy AI
Jedoros님의 밀씀에 동감합니다. 왜란, 호란 두번의 전란을 격으며 조선은 한마디로 참혹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나라는 구했었도 백성들의 삶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7년전쟁 후 인구는 150만이 감소 합니다. 인구는 노동력으로 경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경제는 나라의 세금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구의 7분의 1이 감소합니다. 전답은 10분의 9가 사라집니다. 어느정도 회복해서도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은 3분의1이 소실됩니다. 하지만 역병, 질병으로 살아 남은 사람들도 죽어나갑니다. 설상가상 구제역으로 소들이 죽어 갑니다. 소는 사람 10명 이상의 노동력을 제공했다고 합니다.농사에 필수적인 소였습니다. 광해군때 대동법을 실시해 모든 세금을 쌀로 내게 했습니다. 소의 씨가 말라갑니다. 이북에서 시작된 구제역은 한양을 지나 남쪽으로 계속번집니다. 결국 구제역에서 안전했던 제주도에 있었던 소들을 던국각지에 나누어 공급 합니다. 조선의 블행은 더 해 갑니다. 제주도 마저 구제역이 발생합니다. 살아남은 소값은 마구 뛰어 3배에서 5배로 오릅니다. 일반 백성으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가격이었습니다. 조선의 경제적 파단과 위기는 지속됩니다.
그 동안에 일본이 무엇을 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동안 우리나라는 무엇을 못했는지도 중요 합니다. 중국만 섬기길 열심히 했죠. 우리가 얼마나 중국으로 부터 아주 순한양임을 증명하느라 말이죠. 하지만 일본이 봤을 때도 우리는 아주 잡아먹히기 순한양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먹힌거
내용중 디테일이 좀틀린부분이 많네요. 도쿠가와 뒤를 치는것은 모리가문과 킷카와인데 킷카와 가문이 배신해서 길을막아 모리가 공격을 못하고, 고바야카와는 간보다가 도쿠카와가 열받아서 포를 쏜후에 도쿠가와 쪽으로 붙어서 승패를 결정지었음. 킷카와,고바야카와는 모리 모토나리의 아들들이 양자로 들어가 접수해서 범모리가에속함. 모리가문이 나중에 메이지 유신에 주요 번인 쵸슈번이고, 시마즈가 사스마번이 됨.
영상보는 중인데 바로잡기1. 히데요시의 최초의 아들은 히데요리가 아닌 측실 요도사이에서 1589년에 태어안 스테마루(스테마루는 아명, 추후 츠루마츠)임. 영상에서는 히데요리가 최초의 아들인것처럼 나와 댓글 남김. 여담으로 첫째아들의 아명을 스테(버려라) 라고 지어서 그런지 태어나서 2년만에 죽자 후에 히데요리가 태어나서는 아명을 히로이(주어라)라고 지었다는 일화도 있음. 다른설로는 보다 이전에 자식들이 이미 있었다는 설도 있음.
에도막부는 인구증가로 인해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했고 그로 인해 히비키라 불리는 영아살해 풍토가 생김. 이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나 되야 사라짐. 시마즈와 고니시는 일본 극서의 군주들로 에도막부의 압력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서양세력과 교류하며 칼을 갈았고 1800년대 중후반 미국이 도쿄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를 쏘며 개항하라고 협박함. 쇼군이 쫄아서 ㅇㅋ 하고 이때다 싶은 사츠마와 조슈번(이름바 삿쵸동맹이고 시마즈와 고니시의 후예들)이 미국과 영국에게 돈 지원을 받아 이름바 개혁군을 만듬. 그걸로 에도 막부를 이겨서 무너뜨림. 여기의 정신적 지주가 료마 뭐 이런 애들이고 이토도 있음. 그 제자들의 후예중 하나가 아베 신조임
최근에 방심해서 식민지 된 게 아닙니다. 임란 때는 철두철미하게 대비하고 있어서 이겼나요? 그때도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도 왜군이 안 온다고 방심하고 있다가 처맞고 하나로 뭉쳐 싸워 이겼죠.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동력, 역사가 있었기에. 그런데 최근에는 역사를 안 하니까 그게 없이 조선인들끼리 서로 지지고 볶다가 망한 게 최근 식민지입니다. 세조 때 '조대기' 외 14권의 우리 실제 역사책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저변에선 그래도 그 책들로 공부하고 서당에서 애들을 가르치고 혼내며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림파가 발호하며 친중사대 풍토가 되면서 역사 의식을 거세했고, 그 결과가 조선 후기입니다. 왜는 본래 백제의 신하 국가입니다. 반도와 중국 대륙 북부, 일본 열도 서부를 장악했던 백제가 신당 연합에 멸망한 후 백제 부흥 운동에 수만 명이 도우러 올 정도로 백제 부흥에 힘을 쓴 게 '왜'이지만 결국 백제는 멸망했습니다. 그 후로 왜는 한반도와 연을 끊고 살고 있다가 고려 몽고 항쟁기에 '고몽 연합' 침략을 겪은 일본이 한국에 적대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왜에서 '왜와 한반도와의 관계'에 대한 '역사 왜곡'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그러한 여론이 발호'하면서 한참 뒤에 일어난 것이 '임진왜란'입니다. 임란 당시 조선에서 앞잡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은 하나가 되어 싸우는 조선에 크게 고전하고 퇴각했습니다. 100년 전 식민지가 되고 임란 때처럼 모든 조선인이 100% 싸우지 않은 것은 조선은 역사를 스스로 버린 나라였기 때문이고, 일본은 역사 왜곡 계획을 가지고 와서 그렇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앞잡이를 확실히 만들었습니다. 최근 조선인들은 임란 때처럼 뭉쳐 싸울 동력이 없었습니다. 즉, 스스로 역사를 버렸고 뭘 해야 하는지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일본은 완전히 역사를 왜곡했고, 역사 망하고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으며 그러고 살았죠. 지금도 언론들에게 생각과 행동이 왜곡되어 서로 지지고 볶다가 통수 맞아도 모를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보면 이해가 쉽지요. 이 역사는.. 널린 교과서 주워다 읽고 학생과 다름 없는 사람들에게 배우면 안 되고 정통 민족 사학자에게 배워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 살리자고 북쪽에서 돌아다니시며 고생하신 분이 신채호, 다른 분 계연수. 홍범도는 계연수가 엮어낸 환단고기를 없는 돈을 짜내 출판하고, 만주 독립군들에게 역사서로 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즉, 싸우는 독립군의 역사 의식은 바로 그런 것. 역사 의식이 없는 자는 국가를 위해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 亂이 반란이란 의미라 생각하고 이런 말 하는거임? 그 亂 이란 단어에 전쟁의 의미가 없다 생각하고 이런 말 하는거임? 난중일기라는건 들어본적이 있음? 보통 한정된 지역과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 "전"을 붙임 명량 해전 처럼 그 승리가 특별히 큰 전투에는 "첩" 대첩을 붙이고 청산리대첩, 한산대첩처럼 war, campaign, battle 차이도 모르겠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ㅋ 엄청 용감하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노량은 꼭 보셨음하네요.노량을 본 일인으로서 명량, 한산, 노량 중, 노량이 최고였습니다. 같이 간 지인도 노량이 최고라고 하더군요. 매불쇼 영화 평론가 거의없다와 라이너가 왜 악평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가고요! 일반관에서도 전투가 전혀 어둡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전투중, 아군과 적군을 구분 못했다는 사람들은 초반에 잠을 잤거나 집중력이 모자란거 인증하는 겁니다. 우리 초등학교 조카는 노량 책까지 읽고 갔다와서 영화가 감동이라고 펑펑 울었다고 하더군요. 초등생도 구분하는 아군적군을 왜 ??? 참나...???? 매불쇼 평론가 양반! 반성하세요!!
조선은 인구가 절단나고 국토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지만, 일본은 오히려 약탈해간 인력과 재화들로 경제적 문화적 부흥을 이루었다. 그걸 이겼다고 표현하는 허울뿐인 자존심이 중요한게 아니라 조선에게는 어떻게든 왕조가 살아남았다는게 중요한 의미겠지. 그 결과가 부정적으로 이어져서 결국 망국으로 이끌었고.
동감합니다. 임진왜란이 전쟁 목적달성 측면에서 볼때 이긴전쟁은 맞지만 그걸 요즘 국뽕사학자들이 정신승리용으로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어서 제 얼굴이 다 뜨끈뜨끈해질 지경입니다. 학살당하고 강간당하고 집이 홀라당 불탔는데 보복도 제대로 못하고 "우리가 이겼다~" 하는게 정신병자지 정상인일까요.
전쟁의 피해자들의 죽음과 삶은 매우 비참합니다. 특히나 침략을 당한 쪽은 침략자들보다 몇배 더하죠. 사람이 많이 죽은 쪽이 전쟁에서 진 것 같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전쟁의 승패는 각 교전국들이 목표로 하는 전략적 목적이 달성되었느냐의 여부로 따집니다. 피해가 막심했어도 그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다면 승리이고 별 피해가 없었더라도 전략적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면 패전인겁니다. 피해량의 다소로만 전쟁의 승패를 따질수는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2차세계대전시 2천6백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소련과 6백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독일의 경우 누가 과연 승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