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필의 [임진왜란] 시리즈 몰아보기!* _하단 링크를 클릭하세요._ ru-vid.com/group/PL0lEEgMCRI86oI5zbT1bem9tki9KkmEII 적진포의 위치는 창원이 아니라 통영입니다. 실수였습니다. 앞으로는~~~~ 저로서도 처음 도전하는 자세히 설명하는 이순신 강의이다보니 구사하는 단어들도 입에서 잘 안떨어지네요. 이해바랍니다 꾸벅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일 전국시대(정확히는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암튼) 당시 육지에서는 시즈카타케의(대충 떡발라 칠해놓은 뭐) 7본창의 명장이다. 정도수준의 (작은)별볼일 없는 소다이묘 였다 하지만 [{「 바로 그 - 오다 vs 모리 -의 대해전시 해적왕일가 구루지마가와 대적하여 바다에서는 천하의 대해적대장 출신인 구키 요시타카 이상급으로 대활약한 일본 히노모토 천하 최고의 해전장이였습니다. 」}]
황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는 해군 장교 출신인데 이 강의 너무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입대후 교육중 나이 지긋한 유명한 이순신 전문 교수가 수십년전 강의 했던 내용보다 백배천배 훌륭합니다. 그당시 지금은 쓰지 않는 포구 이름과 지명만 나열해서 강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유튭 이 강의를 듣고 이젠 이순신 장군님의 전투를 상세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십 중반에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 이순신 장군의 첫 전투를 보면서 과연 내가 바다의 후예인가를 자책하고 또한 우리 나라 역사교육의 한계를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계속 훌륭한 역사 선생님 되어주시기를 응원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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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가슴이 뜨겁고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강의 입니다. 손바닥에 물집이 터지고 온몸이 근육이 움틀댔을 노꾼들의 고단함을 상상해 봅니다. 날뛰듯 두근 거렸던 병사들의 긴장과 두렴움과 승리후의 카타르시스를 짐작해 봅니다. 산같이 정중하라고 부하들을 타이르고 나서 혼자 빈방에 누웠을 장군의 그 밤을 생각해 봅니다. 나를 뜨겁게 만드는 그 이름. 이.순.신.
이순신의 덕수 이씨의 후손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단순히 왜란을 극복한 구국영웅으로만 알고만 있을 이순신에 대한 정보를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는 모습에 가슴 철렁하게 하며 다시보게 되네요. 덕수 이씨의 자랑스런 조상님,그리고 우리들의 영웅 !최고다 이순신을 되짚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최고다 황현필!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경상도 지역의 전투상황을 보고한 실록 : 도내(道內)에 감사(監司)가 없으니 모든 적변(賊變)을 당연히 신이 아뢰어야 합니다. 신이 도내에 있으면서 여러 성이 함락된 사유와 여러 장수들이 패전한 상황을 목격하였는데, 말하는 자는 모두 ‘군졸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적과 대진하자 무너져 흩어졌기 때문에 장수가 속수 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 바로는 좌수사(左水使) 박홍(朴泓)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은 뒤이어 동래(東萊)로 도망하였으며, 우병사(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道)의 주장(主將)인데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휘하의 장졸(將卒)들이 어찌 도망하거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양산(梁山)의 가장(假將)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도 창고와 병기(兵器)를 불태우고 도망하였습니다.
ㅋ, ...저 김성일이 임난'직전 일본에 파견되어 풍신수길과 면대하고, 여러 지역의 제반사항등을 체크했던 사절단의 부사(2인자) 정사 황윤길(서인)은 귀국후 전쟁가능성을 크게 보고 선조에게 간곡히 알렸지만 동인이었던 그는 심지어 풍신수길이 '수상(쥐시키상)' 이라며 전쟁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 박박 우겨서 결국 논쟁으로 끝나버리고 제대로된 대비없이 임진난이 터졌슴. ...이때 동인의 영수가 이산해이고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징비록'의 유성룡. 저 장계이후 의병을 지휘하다 전사한 것은 맞지만, 김성일도 유성룡 이산해도 미증유의 참화에 큰 책임이 있는 사람들..!!!!!!!!!!!!!!!
@@storyfour8761 원균이는 평택에서 났데요. 그리고 본관은 원주라나? 그런건데 걍 까대는건 좀... 위키백과에 그리 써져있어요. 원균(元均, 1540년 2월 12일 (음력 1월 5일) ~ 1597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중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원성백파(原城伯派), 자는 평중(平仲)이다. 무인 가문으로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元俊良)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어머니는 남원 양씨로 양성지의 후손 양희증(梁希曾)의 딸이다. ko.m.wikipedia.org/wiki/원균
@@Kesap541 나두 저게 원균이 스스로 수군 자침시키고 나타나서.. 저런 쓰레기를 왜 단번에 목을 쳐버리지 않은건지 의아해했었는데 나중에 역사공부하니 쉽게 나오던 답이었슴. 황현필이 원균까기위해 고의로 누락시킨건진 모르겠지만.. 애초 임진왜란터질때 선조가 명령한게 수군을 없애고 수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육지에서 싸우고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었슴.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5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해도의 주사(舟師)를 없애도록 명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해도(海道)007) 의 주사(舟師)를 없애고 장사(將士)들은 육지에 올라와 전수하도록 명하였는데, 전라 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급히 아뢰기를,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므로 호남의 주사만은 온전하게 되었다. 주사 = 수군임. 장사 = 장군+병사.. 원균도 개병신수준이지만 더 문제가 선조는 더씹개또라이 병신이었슴.
이순신은 자기의 공만 내세우기보다 병사들 하나하나 공을 인정해주고 기억해줘서 불리한 전세에도 병사들 사기가 오히려 오르고 이순신을 안따를 수가 없는거지 그나저나 원균은 지휘관 자격도 없으면서 겁만 먹고 도망다니면서 자기 욕심만 챙기려고 하니 임진왜란때 최고의 민폐인물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강의 듣고, 방송사 역사 저널 이순신 영상 보고 강의 다시 들으니 훨씬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눈물날만큼 대단한 승전이었네요. 인간 이순신의 감성적인 면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장군 이순신으로 보면 그의 기개가 엄청남을 느낍니다. 열강해주신 황쌤의 열정에 무한 감사를 전합니다 ㅜ ㅜ
병사들이든 주민들이든 장사하는 사람이든 장수들이든 모두200만명 이상이 무기 함선 거북선 소총 대포 화살,,, 버리고 폐물챙겨 산으로 도주, '일부 몸 팔고 신분상승 추정' 전쟁 안 일어난다 왜곡보도정치분탕칠 준비시간,,,, 사라져 버려 수닭팔이 바로 쳐맞어 도륙 강간 살인 약탈 자행 원인제공,,,, 칠천냥, 부산포,,,,''결정타, 매판 사기꾼 정신병자들 득실~국가 에너지 소진 끝내 망함
이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룰 줄은 몰랐다. 나름 이순신장군의 자료를 많이 봤다고 자부했는데... 이렇게 엊그제 일 처럼 생동감을 주는 강의를 보게 될 줄은 몰랐음. 진심 감사드립니다. 학창시절 역사과목이 제일 싫었는데, 이렇게 배웠으면,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 머리속에 각인되는 역사의 정신을 배웠을까 싶네요.
재생. 정지. 몇번을 하면서 보는지 모르겠네요. 가슴속에서 뭔가 먹먹하고 뿌듯하고 감탄과 감격, 특히 장군님이 휘하의 장수 병졸.. 노꾼들까지.... 깊은 관심으로 보살핀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 감동의 파도가 쉴새없이 출렁이고 눈시울이 붉어지니 자꾸 멈추게 되어서요 😣😭🤧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존경하는 선생님...최근 조선과...성웅 이순신의 직관을 하고,,,나머지는 밭일을 하면서 듣고 있습니다....선생님의 강의를 보고 많은 것을 배웁니다.....선생님의 방송액션이 너무 나 좋습니다....이 나라의 보배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응원하겟습니다....늘 감사합니다....o(__)o
역사를 역사답게 때부터 다른 유투버들처럼 좋아요 구걸없어도 꽂을수밖에 없는 강의 고맙습니다 😅 타의말고 자의 내뜻으로 좋네여 고로 좋아요 꽂습니다 말리지 마세요 ㄱㅅ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 성웅 거리 넘 멀고 가장 기본적으로 내집과 식구 가정을 지켜준거니까 ㅇㅇ 저도 거의 외계인설 먼미래의 일본식민지배당하고 있는 우리 구하기위해 과거바꾸러온 타임머신 시간여행자 설이 왜나왔지 오바가 아니고 그런것 같아 동조할 수밖에 없네요 마치 수학 1+1=2 설명이 필요없듯 이순신 왜이겼죠 이길수밖엦 없게 다 해놨기에 세계적으로 공포된 4대해전 들가고 세계가 인정해주닛가 부연설명이 필요없을듯 😮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제가 참... 귀찮아서 댓글 이런 거 잘 안 다는 사람인데... 작년에 여수 여행 다녀왔는데 이런 사실들을 알고 갔었더라면 더더더 많이 생각하면서 다닐 수 있었을텐데 아쉽네요.^^; 이제 선생님 강의 들었으니까 여수 진남관에 다시 한 번 가보면서 이순신 장군님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런 좋은 강의 정말 항상 감사드립니다.^^
좋은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부원경상도장'이라는 글이군요. 기존 임진왜란 관련 논의에서 가장 제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조선 수군이 애초에 부산 앞바다를 지키고 있다가 침공한 왜선을 격파했다면 실제 역사보다 훨씬 일찍 왜란을 종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이제껏 제가 접한 모든 내용이 임진년 4월 13일에 왜군이 뭍에 상륙한 이후 전투부터 왜란을 묘사할 뿐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를 지키고 있다가 해상에서 왜선을 격파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지적하는 경우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사실 저도 마음 한 구석에 '뭔가 꺼림칙해!'하는 막연한 느낌만 간직하고 있었지 이런 말을 꺼낼 엄두를 못 내고 있었죠. 몇 달 전에 우연히 유튜브 어느 채널에 달린 댓글에서 "경상좌수영이 해상에서 왜선을 격파했다면 '임진왜변'(을묘왜변이나 삼포왜란 수준)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고 말씀하셔서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죠. 그런데 이충무공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사실 수전의 중요성은 21세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되겠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하고 해운대에 오성홍기를 꽂아도 인민해방군 전력으로는 대한해협을 넘어서 일본 본토 침공을 못 한다죠? 일본의 해상자위대 전력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말이죠. 이런 점이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하네요.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고전했던 이유를 전통적으로 조총을 갖고 있던 일본과 갖고 있지 않던 조선의 차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왔는데,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물론 그 당시로서 위력적인 신무기였음을 부정할 이유는 전혀 없으나, 전쟁의 역사 특히 전근대 전쟁의 역사에서 신무기 한두 종류가 실전에 투입되었다는 이유로 승패가 갈린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더군요.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고전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오랜 평화에 젖어서 조선이 할 수 있었던 준비를 게을리했다는 점, 즉 조선이 보유한 잠재력을 현실에서 발현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이순신이 경상좌수사였다면? 조령, 죽령 등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고갯길을 방어하는 작전계획을 사전에 철저히 짜놓았다면? 임진왜란의 피해가 실제 역사보다 훨씬 줄었겠죠? 근데 왜 이렇게 못 했을까요? 원인은 결국 한 가지로 수렴합니다. 조선이 200년에 걸친 평화에 젖어서 굳이 그렇게까지 전란에 대비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점, 즉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죠. '사회'라는 단어 자체가 조선시대엔 있지도 않았던 용어라곤 하지만요. 쿠데타로 집권해서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조선의 군대를 국방에 최적화된 군대가 아니라 쿠데타 예방에 최적화된 군대로 변형시켜서 조선의 문약화를 부른 세조의 만행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너무 재밌게 홀린듯 잘 봤습니다. 물론 외침의 역사라는 것이 아픔이기도 하지만 불세출의 영웅이 발견된 역사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 두시간여 걸리는 여수 진남관, 이순신 광장 더 멀리 울돌목도 가봤는데 갈 때마다 느껴지는 숨결 같은게 있습니다. 강의 중에 그런 감정과 느낌을 갖게 되네요. 고등학교 때 역사선생님께서도 말씀 하셨던 바로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 전략이 근대 더 나아가서는 현대 함포전과 같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네요. 현대해전 또한 적을 먼저 발견하고 장거리 정밀 타격하는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군의 피해를 극대화 하는 것이 주된 전략인데, 이순신 장군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 갖은 정보와 척후를 바탕으로 그와 같은 발상을 하셨다는게 정말 대단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생생한 이야기를 통한 역사 전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평상시 올바른 준비와 이름없는 백성과 군졸들 하나하나를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을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날조하며 시기 모함하는 원균과 박홍 무리들...그때를 생각하며 말로만 애국 애국 하며 실제는 사리사욕이 먼저인 오늘날의 원균과 박홍 무리들은 과연 어떤 집단이며 언론들일까 생각해본다...
조선 군 체제상 경상도 수군이 왜수군이 건너올 때 비로 집결하기 어려웠었음 수군문제가 아니라 조선 방어체제가 대규모 침입을 막기엔 무리였죠 각도 본수영 밑에 소속수군들 소집에만 3-4일이 걸리고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기준으로 보면 25척의 판옥선을 보유했는데 이걸 또 각 수영으로 나누면 하나의 수영당 3-4척정도 보유했을꺼라 추측됌 자기지역위주로 방어하는 진관체제는 조선 수군은 하나의 군대가 아닌 연합군 같았음 순신이 형도 1차 출동때 진관체제때문에 경상도 바다로 출정을 고민하기도 했었음 대마도에서 건너오기 전에 요격했으려면 애초에 왜로 통신사 갔다 온 인간들이 정치 분탕질 안했으면 대비 했을텐데
애초에 이순신을 경상 우수영에 배치했다면 임진왜란은 일어나기도 전에 일본 선봉대가 전부 수장되며 끝났을 것이다. 경상 우수영에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많은 100여척의 판옥선이 있었다. 반면에 전라 좌수영에는 제대로된 함선조차 없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조정의 지원 1도 없이 모두 이순신이 사비 털고 백성들 도움 받아 만든거다. 원균은 그 최강의 수군 전력을 가진 경상 우수영에 부임하고 함선 관리도 안해서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엔 100여척 대부분이 못쓰게 된 후였고, 그나마 원균은 일본이 처들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100여척의 판옥선을 모조리 불사르고 전라좌수영으로 도망왔다. 원균의 개ili새ili끼 스러움은 비단 이순신 탄핵이나 칠전량 뿐만아니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특출났던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경상 우수영에 부임하여 100여척의 판옥선을 정비하고 추라고 더 함선을 건조하며 수군을 훈련시켰다면, 고니시와 가토의 20만 선봉대는 조선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뭐 혹자중에는 선조가 이순신을 알아 보고 중용했네 하면서 실드치는데, 선조 이 개새끼는 류성룡의 성화에 못 이겨 아무것도 없는 전라 좌수영에 보내 그저 써주는 척만 한거지 중용한게 절대 아님. 자기가 아끼는 원균은 알짜배기 경상 우수영에 보내고. 선조 이 개ili씨lil발년이 싸지른 개lil새ili끼는 인조와 더불어 조선 역사에 있어 연산군보다 더 개 같은 씹ili쌔끼임.
hiker Frantz 경상우수영에 100척의 판옥선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판옥선 1척당 125-130명이 탑승합니다. 100척이라면 경상우수영만 1만 수군을 보유했겠죠. 그에 비추어볼때 삼도수군 총6개의 본영들을 모두 합치면 수군력이 5만이 되었다는 얘기인데 조선은 임진왜란 전까지 200년간 평화기를 누렸습니다. 수군은 병역 중에서도 가장 기피대상이었고 수군명부엔 있지도 않은 사람이 이름이 올라가 있는 등 병역기피, 비리가 상당했죠. 실제로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했을 때 병영 상태가 심각하게 엉망이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했습니다. 율곡이이의 10만양병설 채택이 되지 않은 것도 이만한 병력에 돈이 어마무지하게 들어가서인데 왜해적 경비하는 역할이 주임무인 수군이 5만이나 되는 전력을 갖추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에서 전쟁초기에 보유한 전함인 판옥선이 24척이고 비전투용 상선과 협선을 합쳐야 85척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경상우수영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감안해도 딱 그정도일 겁니다. 원균이 전쟁때 경상우수영에서 데리고 나온 판옥선이 총3-4척입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서 끌어모은 함선이 24척이니 전라좌수영 휘하에 각 진영으로 나누면 한 진영단 3-4척정도로 추정되는데 원균은 경상우수영 직속 자기가 직접 지휘하는 함선들을 숫자와 비슷하죠. 그리고 원균은 경상우수영 부임한지 이틀인가만에 전쟁 났어요. 원균이 속이 좁고 질투가 많은 인간인건 사실임. 왜란당시 각종 보고서를 보면지휘관으로서 자질이 부족했긴 하다만 선조 정부가 더 ㅂㅅ임.
이순신 장군님께서 출전하셨던 해전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고 실감나게 설명해 주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지도를 사용해서 수군 이동 경로를 알려주신 것도 좋았고, 여러가지 기록과 수치 등 다양한 정보와 함께 알려주시니 정말 장군님의 위대함이 더 크게 느껴지고, 그 시절에 어떻게 전쟁을 치루었는 지에 대한 궁금증도 해소되네요.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의 임진왜란 실수는 이순신 장군님을 몰랐던 실수이며, 이순신 장군님의 전력을 분석하지 못했던 과소평가에 원인으로 패배가 크며, 이순신 장군님께 패배했던 일본의 명장들 모두 그당시 분명 이순신 장군님을 두렵고 무서운 조선의 수군 명장으로 인식할수도 있다라는 대단한 영웅이라는점..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는건 후손으로서 분명 자랑스러워야될 위인이구 위기의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그밖에 의병 곽재우 권율 진주대첩 김시민 등등 부산 패배 하더라두 끝까지 싸웠던 정발장군등등 그분들께 감사드리네요
시바 료타로는 소설 "료마는 간다"를 쓴 일본에서는 유명한 소설가입니다. 러일 전쟁 때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제독을 이야기하면서 이순신에 대해서 몇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극찬을 합니다. 영국 넬슨 제독 이전에 세계 최고의 제독이라고... 이순신 이전의 세계 해전사는 배로 이동해서 배 위에서 백병전을 했습니다. 전투 장소만 배지, 육지에서의 싸움과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내내 백병전은 하지 않습니다. 함대를 포위해서 함포사격으로 작살을 냅니다. 적선이 지리멸렬할 때 마무리로 돌격 명령을 내립니다. 튼튼한 조선의 판옥선이 들이받으면 일본 함선은 부서지고 적들은 바다에 빠집니다. 세계 해전사에서도 이순신이 근대해전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원균 같은 사람은 머리속에 그런 개념 자체가 없으니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우리 눈에도 한심함 그 자체죠... 차원이 다르다 라는 말이 이 보다 더 딱 맞는 표현이 있겠습니까? 덤으로 우리 병사들은 손실이 거의 없습니다. 이러니 병사들이 이순신 장군을 믿고 명령대로 잘 싸웁니다.
@byung hern park 조선의 국방제도와 영국의 국방제도를 비교분석하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입니다. 영국은 전 국민들에게서 세금을 거둬서 필요한 부대에 배분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과 비슷합니다. 조선은 자기 관할지역에서 직접 조달하는 방식입니다. 전라 좌수영의 관할지역은 5관 5포입니다. 순천도호부(여수,순천), 광양현, 낙안군, 보성군, 고흥군 등 5개 지역의 전권을 쥔 계엄하의 사령관보다 강력합니다. 필요한 물자도 좌수사가 징발하거나 세금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즉 5관 전체가 좌수영의 둔전과 같습니다. 병사 징발 권한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충무공은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어떻게 전쟁 준비를 했겠습니까?
@@을지이도 전시가 되면 장군들은 나라에서 말 안해도 자기들 지역에서 멋대로 징발합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에요. 그것을 나라의 지원이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전쟁을 할 때 국가는 전국의 자원을 모아서 자원이 필요한 곳에 배분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라의 지원이고 이순신은 그러한 것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호남을 지켜서 나라를 지원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충무공입니다 . 공께서 보여준 호국의 정신 가족애 민족애 ... 기적을 넘어선 승리는 진정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였던가 하는 생각 뿐입니다 . 충무공 이순신의 민족적 후손임 이 진정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민족적 축제로 기념하길 ... 성웅 충무공이 노량에서 전사하신 이유는 공의 말씀에 있다 봅니다. ㅡ 적이 퇴각하는 날 죽어 유감 될 일을 남기지 않겠다 .